나의 머리 속에는 낡은 사진첩처럼 수많은 풍경들이 찍혀있다. 사진가들이 첨단 장비를 들고 아름다움을 찾아다니듯 나도 감동적인 한 장면을 보기 위해 세상을 떠돌기도 했다.
  
  미국에서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넌 적이 있었다. 작은 언덕만한 파도들이 머리를 들었다가 내려앉고 그 사이 바다의 훈김을 헤치고 거대한 여객선이 미끄러지고 있었다. 햇빛의 각도에 따라 바다의 색깔과 질감은 수시로 달라지고 있었다. 피부를 스치는 바람은 바다가 주는 질감 속에 또다른 아름다운 무늬를 영혼에 새겨주는 것 같았다. 오후가 되면 지는 태양이 비스듬히 그 빛을 바다에 넣으면 물은 순식간에 형언하기 힘든 신비를 지닌 에메랄드빛으로 변했다. 나의 영혼은 비늘을 반짝이는 작은 물고기가 되어 그 보석 같은 아름다운 바다 속을 유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식사 시간에 같은 식탁에 앉은 오십대 미국 남자가 내게 물었다.
  
  “왜 비디오카메라를 가지고 촬영을 안 하죠? 우리들은 기념으로 다 그렇게 하는데.”
  “저는 아름다움을 직접 제 눈으로 보는 걸 좋아하지 뷰파인더를 통해 보는 건 좋아하지 않아요.”
  
  직접 여행을 가서도 모든 걸 뷰파인더를 통해서만 볼 거면 차라리 집에서 스크린을 통해 잘 촬영된 광경들을 보는 게 나을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그러면 좋은 광경을 봐도 남는 게 없잖아요? 필름으로 기록이 안 되잖아요?”
  그 미국인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동양인인 나를 보고 물었다. 약 사천 명가량이 탄 그 배에 동양인은 몇 사람 되지 않았었다.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카메라는 인간의 눈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최고의 필름은 인간의 두뇌라고 생각해요. 자기의 눈으로 보고 머리 속에 추억으로 저장해 두면 그게 가장 아름다운 기록물 아닐까요?”
  “글쎄요”
  
  미국인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나의 영혼이 지구에 여행을 왔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게 온 여행이라면 하나라도 더 아름다운 장면을 보는 게 가장 이득이었다. 사십대 초부터 오십대 중반까지 인생의 무게 중심을 여행에 두었었다. 약간의 비용만 생기면 여행길에 올랐다. 공산권이 무너진 지 얼마 되지 않는 천구백구십년대 중반쯤이었다. 나는 구 소련의 낡은 초록색 열차를 타고 시베리아를 횡단하고 있었다. 바이칼호수를 지나서부터 눈을 머리에 인 자작나무와 소나무 숲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시선을 창밖에 두고 끊임없이 변하는 광경을 소중히 머리에 담고 있었다.
  
  그런 어느 순간이었다. 거대한 둥근 태양이 지평선 저쪽으로 반쯤 내려가 있었다. 그 붉은 태양 속에 작은 마을들과 숲이 장난감 나라처럼 들어있는 게 보였다. 알 수 없는 감동으로 가슴이 벅찼다. 뇌리에 새겨지는 그 광경 하나만으로도 여행에 대한 보상은 충분할 것 같았다. 나는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열려있는 마음이 아무 때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건 피가 수런거리는 젊음이 있을 때라야 느낄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최첨단의 디지털 카메라도 그런 감동을 표현할 수는 없다.
  
  이천년대 초에 나는 티베트에 들어가 낡은 도요타 지프 한 대를 빌려 히말라야 계곡 계곡에 있는 마을을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유채꽃이 핀 넓은 밭을 지나기도 하고 작은 개울물을 건너기도 하고 소똥을 개서 벽에 바르는 마을 사람들을 지나치기도 했었다. 히말라야의 여러 봉우리가 보이는 해발 오천 미터의 팅그리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히말라야에 오르는 사람들의 베이스캠프 가까운 곳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만년설에 덮인 히말라야의 여러 봉우리들을 보았다. 아침 햇빛을 받은 히말라야의 하얀 봉우리들은 분홍빛으로 변하기도 하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홍으로 변하기도 했다. 해발 오천 미터의 계곡을 흐르는 바람이 그 광경에 질감을 부여하는 것 같았다. 나는 두뇌의 사진첩 속에 그런 감동들을 차곡차곡 쌓으려고 노력해 왔다. 지구여행을 왔다가 그 기억만은 가지고 갈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지나보니까 아무리 노력했어도 나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그냥 스쳐버린 적이 많았다. 봐도 흘깃 일부만 바라보았을 뿐이다. 보다 더 열려있는 눈만 있었더라면 무색의 얼음 속에서도 반짝이는 무지개를 보았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