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봄경 부천의 군부대에서 법무장교를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비상이 걸렸다. 병사 한 명이 총과 실탄을 들고 나가 인천의 한 술집에서 인질 난동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현장으로 갔었다. 인질범은 특별한 요구도 없었다. 그러면서 한 시간에 한 명씩 총을 쏴서 인질을 죽였다.
  
  그 원인을 살펴봤다. 전날 그 병사가 사귀던 여성으로부터 헤어지자는 편지가 왔다고 했다. 실연으로 인한 엄청난 분노가 인질극으로 번진 것이다. 부하를 데리고 그를 잡으러 용감하게 진입한 헌병대장이 오히려 인질범의 총알에 배가 관통되어 응급실로 후송되고 있었다. 마침내 인질범이 체포되고 상황이 종료됐다. 나는 피해자의 시신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죽은 여성들이 눈을 꼭 감고 나란히 누워 있었다. 그들도 누군가의 귀여운 딸이었을 텐데 엉뚱한 분노의 희생물이 된 것이다.
  
  칠팔십년대 분노로 인질극을 벌인 사건을 여러 번 취급했었다. 전방의 철책선 부대에 근무할 때였다. 옆 사단에서 인질 난동사고가 있었다. 불만이 가득한 병사 한 명이 실탄이 장전된 총을 들고 부대 전체와 대치하는 상황이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병사는 가수 배호의 노래를 목청껏 부르다가 자살로 인생을 마감했다.
  
  그 시절 군 생활을 하다 보면 장교나 사병이나 원인 모를 불공정과 극한적인 고통을 겪었다. 얻어맞기도 하고 심한 모멸감을 느끼기도 했다. 마음은 세상에 대한 불만으로 폭발 직전의 분노로 가득차기도 했었다. 나무를 반들반들하게 만들기 위해 사포질을 하는 것처럼 그런 고통과 불만들은 나를 매끄럽게 만드는 굵은 모래알이 붙은 사포였다. 불만이 가득하고 분노로 터지기 직전 어떻게 해야 하나는 인생의 성공과 파멸을 결정하는 것 같았다.
  
  변호사로 법정을 드나들던 어느 날이었다. 법원 정문 앞에서 한 중년의 남자가 샌드위치맨이 되어 서 있었다. 그의 앞과 뒤의 판넬에는 특정 재판부의 불공정과 판사를 규탄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 남자의 얼굴은 예상 외로 선비 같은 착한 인상이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외롭게 투쟁하는 사람에게는 한마디 동조도 크게 위로가 되는 걸 알고 있었다.
  
  교수인 그는 개결한 성품의 소지자 같았다. 그런 그가 경박한 판사의 편견이 담긴 판결문에 불만을 가진 것이다. 나는 그 교수 샌드위치맨을 핸드폰의 카메라에 담아 주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일인시위가 세상에 널리 퍼지기를 간절히 원하기 때문이었다. 그 며칠 후 신문에 보도된 석궁사건을 봤다. 내가 법원 문 앞에서 보았던 그 남자가 활과 화살을 들고 판자가 사는 아파트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활을 쏘았다는 내용이었다. 불만이 증오의 에너지를 뿜어내고 그 불길이 모든 걸 태워버렸다.
  
  변호사를 하다 보면 그 교수 같은 사람들의 불만과 분노에 충분히 공감하곤 했다. 법의 여신이 들고 있는 칼이 녹슬고 저울이 기울어져 있는 걸 자주 보았기 때문이다.
  
  한 불쌍한 노인이 평생 번 돈을 아낌없이 기부했다. 그 노인은 평생 고기 한번 마음껏 못 먹고 옷이나 구두도 좋은 것을 사보지 못했다. 명망가로 울려진 시민운동을 한 사람이 그 기부 받은 돈으로 고급호텔에서 파티를 여는 걸 보고 나는 불만이었다. 그 명망가를 상대로 소송을 걸고 나는 법정에서 분노가 폭발했었다. 세상이나 법정은 그런 사람들 편인 경우도 많았다. 그렇다고 인질극을 벌일 수도 없고 화살을 쏘아댈 수도 없는 일이다. 속에서 화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어느 날이었다. 읽던 책 속에서 이런 문장 하나가 자기를 강조하듯 튀어 올랐다.
  
  ‘주위의 모든 것에 대해 또 자신에 대해 불만을 느낄 때 달팽이가 껍질 속으로 들어가듯 내면으로 들어가 숙면하라. 원인을 지나치게 분석할 필요 없다. 지나가도록 내버려 두라. 그러면 다시 살아갈 의욕이 생길 것이다.’
  
  불만이 있을 때 흔들리기 쉽다. 흔들리면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버린다. 바른 판단을 하기 힘들다. 그럴 때 일단 한 박자 늦추고 생각하라는 말도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