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은 대한민국이 누란(累卵)의 위기를 맞아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풍전등화(風前燈火)처럼 흔들릴 때 목숨 바쳐 국가를 지켜 낸 호국(護國)의 보루(堡壘)였다. 부산은 자유대한이 괴뢰와 오랑캐들로부터 침략을 받아 국민들의 생명이 무참하게 짓밟히고 강토가 불탈 때 수많은 피난민을 지극정성으로 안아주고 보듬어 준 따뜻한 희망의 항구였다. 부산은 공산도배(共産徒輩)들의 침노(侵擄)로부터 세계의 젊은이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낸 자유와 평화의 성지(聖地)였다.
  
  부산은 1950년 8월18일부터 10월26일. 그리고 1951년 1월4일부터 1953년 8월14일. 두 차례에 걸쳐 1023일간 임시수도였다. 한반도 5000년 역사에 특정한 한 도시가 두 차례나 수도(首都)가 되어 국가를 지켜낸 역사의 현장은 부산이 유일(唯一)하다. ‘임시수도 부산 1023일’은 학문과 예술이 재생·부활된 부산 문화의 ‘르네상스’기였다. 그러나 그동안 잊혀졌던 ‘임시수도 부산 1023일’의 자랑스런 역사는, 안타깝게도 그 흔적이 사라져 가고 있다.
  
  ‘임시수도 부산 1023일’, 그 위대한 역사의 현장을 찾아가 보자. ‘임시수도 부산’ 당시 정부종합청사(중앙청)로 활용했던 경상남도 도청 청사를 비롯해서 이승만 대통령 집무실(경무대)이었던 경상남도 도지사 관사, 임시 국회의사당이었던 경상남도 도청 구내 무덕관(武德館) 건물, 부산시청 청사, 부산항 부두와 해운대 동백섬 탄약부두, 부산수산대학 내 워커 유엔군사령관 집무실, 서전(스웨덴) 병원, 5육군병원, 피란민들이 살았던 아미동·보수동·대청동·영주동·초량등지의 판잣집(하꼬방), 국제시장, 영도다리, 부산역, 문화예술인들의 휴게처이자 김동리 소설 ‘밀다원 시대’의 현장무대인 ‘밀다원’ 다방. 허기져 홀로 앉아 있는 피난 청년을 따뜻한 마음으로 보듬어 주던 대중가요 ‘경상도 아가씨’의 무대인 ‘40계단 층층대’. 그리고 부산항으로 침투하여 후방교란을 노리던 북괴군 군함을 격침시키고 600여 명의 북괴군을 수장(水葬)시킨 청사포 앞바다는 대한해군의 ‘백두산함’이 거둔 대한해군 승전보 1호의 빛나는 전적지(戰績)이다. 한국동란 당시의 수많은 현장들이 ‘임시수도 부산’의 역사를 증언할 전쟁유적들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전란을 피해 부산으로 피난온 문화예술인들의 발자취 또한 찾아내고 복원할 만한 가치 있는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건축가 김경업이 설계하고 시인 조병화가 지은 송도 언덕배기 보리밭 자락 ‘패각의 집(貝殼)’은 박종화, 모윤숙, 이헌구, 김환기 등의 예술인들이 모여 집들이를 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화가 이중섭이 은박지에 ‘소 그림’을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영주동의 어느 판잣집, 소설가 이호철이 부두에서 등짐을 날라주며 받은 일당(日當)으로 국수를 사먹으며 소설공부를 했던 초장동 어느 국수공장 뒷골방, 월탄 박종화와 화가 김환기가 살았던 단칸방, 소설가 김용익이 ‘겨울의 사랑’이란 소설을 썼던 광복동의 어느 다방, 김경업이 파리에서 시인 조병화에게 보낸 엽서가 43년 만에 파리에서 부산일보로 전달된 사연 등은 피난온 문화예술인들이 남긴 발자취가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내일을 알 수 없었던 ‘임시수도 부산’의 암울했던 전시(戰時)의 시대상이요 소중한 부산의 문화유산일진데, 이 같은 흔적을 제대로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으니 참으로 통탄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임시수도 부산’의 소중한 역사현장은 대부분 사라지고 그 일부가 초라한 모습으로나마 남아있을 뿐이다. 헤밍웨이와 피카소가 한때 살았던 스페인 바로셀로나의 고택들이 잘 보존돼 관광자원으로 소개되고 있음을 생각할 때 ‘임시수도 부산’의 유산들이 사라지고 있음은 가슴 아픈 일이다. 필자는 방송 현역에서 활동할 당시 ‘유엔기념묘지’ 일대를 자유 평화구역으로 지정, ‘부산평화박물관’ 또는 ‘전쟁기념관’ 등을 만들 것을 여러 차례 제안한 바도 있다. 아쉽게도 부산광역시 서구 부민동 비탈진 언덕에 ‘임시수도기념관’이 있고 구(舊) 경남도청 앞거리가 ‘임시수도 기념거리’로 지정된 것이 고작이다.
  
  ‘임시수도 부산’의 위대한 역사에 대한 보존관리와 기념사업은 부산시 차원에서가 아니라 국가차원에서 추진되고 계승·발전됐어야 했음에도 이를 소홀히 한 역대 대통령과 국회의장 등 위정자들의 무관심한 역사 인식을 성토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부산은 3명의 대통령(김영삼, 노무현, 문재인)과 4명의 국회의장(박관용, 박희태, 김형오, 정의화)을 배출했으나 ‘임시수도 부산’의 위대한 역사를 소중하게 조명하고 깊이 생각한 지도자가 없었다.
  
  ‘임시수도 부산’ 당시 정부종합청사였던 경남도청 건물과 국회의사당이었던 경남도청 경내 무덕관(武德館)은 대한민국 역사에 기록으로 남겨야 할 국가적 유산이다. 특히 임시 국회의사당은 헌정사(憲政史)의 기념비(紀念碑)적 자산이다. 전란(戰亂)의 위기에서도 민의(民意)의 전당(殿堂)인 국회를 운영한 사실은 자랑스런 역사다. 임시 국회의사당에서 1952년 발췌개헌안(拔萃改憲案)이 통과됐다. 자유대한을 지키고 의회민주주의를 숭상해온 이처럼 위대하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적 흔적이 제대로 보존되고 관리되지 못한 안타까움은 후회막급(後悔莫及)이다.
  
  ‘임시수도 부산’ 당시 중앙청 건물이었던 경남도청 청사는 경상남도청이 1980년대 창원으로 이전하면서 부산의 동아대학교에 매각됐다. 이후 동아대학교가 당시 국회의사당이었던 무덕관 건물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고층빌딩을 세워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전쟁 시에도 민의를 대변했던 국회의사당이 역사유물로 보존되지 못한 것은 대한민국 국회의 책임이 크다. 임시수도 국회의사당에서 대한민국 의정사상 기록할 만한 사건들이 있었음을 상기한다면 말로만 민주주의를 외치는 국회의원들의 천박한 역사 인식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노무현 정권 때 광주를 ‘문화수도’로 조성하기 위해 중앙정부가 5조 3000억 원의 막강한 자금을 투자해 전남도청 건물 부지 주변을 ‘국립 아세아문화전당’으로 만들어 잘 활용하고 있는 것과 잊혀진 ‘임시수도 부산’ 복원사업은 크게 대조된다. 지금도 국립 아세아문화전당 운영에 연간 800억 원대의 운영비가 지원되고 있으며 문재인 정부가 3조 5000억 원을 추가 지원하기로 했다는 언론보도도 있었다. 부산시가 초라하지만 ‘임시수도 기념관(직원 6명)’을 운영하며 최근에는 유네스코 기록문화재 등재를 위해 노력하고 있음은 때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다행이라 하겠다. 특히 부산포럼과 북방경제인연합회, 여성정책연구소와 유엔 한국평화봉사단 같은 NGO가 ‘임시수도 복원 및 지역발전 모범도시 조성에 관한 특별법(안)’ 제정을 추진하고 있는 데 한줄기 희망의 빛을 기대하게 한다. 늦게나마 국난(國難)의 위기를 극복한 역사현장을 복원하고 보존하려는 부산시민들의 의지와 역사인식의 발현에 찬사를 보낸다.
  
  이런 움직임과는 달리 6·25 한국동란을 승리로 이끄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워커 장군 집무실은 방치돼 있다. 또 적(敵)의 무리와 대치하고 있던 국군과 유엔군에 공급된 수많은 탄약과 탄환이 하역된 해운대 동백섬 탄약부두 해안을 최근 해양수산부가 매립하여 요트마리나로 만들어 특정 업체에 특혜를 주려고 하는 것은 ‘임시수도 부산’의 위대한 역사현장을 짓밟는 망동이다. 시민과 해당 관할구청이 강력 반대함에도 해양수산부가 앞장서고 있음은 이해하기 어렵다. 대한해군 승리1호 현장인 청사포 앞 1.2km 해상에는 대첩승전기념비 대신 풍력발전9기 설치를 위한 작업이 추진되고 있다. 부산시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하는 것은 임시수도 복원을 추진하는 시민의 여망을 짓밟는 행위다.
  
  부산이 420여년 전 임진왜란 당시 부산포해전을 기리고 순절(殉節)한 다대포첨사 윤흥신과 동래부사 송상현공의 동상을 세워 추모하는 것은 좋다. 그런가 하면 71년 전 부산을 지킴으로써 자유대한을 수호한 자랑스런 역사와 공신(功臣)들에 대해서는 소홀한 것도 사실이다. 존망(存亡)의 기로(岐路)에서 국민과 국가를 지켜낸 자유와 평화의 성지(聖地)를 천추만대에 길이길이 잘 가꾸어 전하는 것이야말로 국가를 경영하는 지도자들의 중요한 책무이자 국가적 사업임을 일깨워 두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