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김장실 참판 어른의 노래를 늘 기다리며 애청한다. 노래에 딸린 배경 설명을 들으면, 나도 몰래 스르륵 옛날로 돌아가서, 즐거웠던 일, 아쉬웠던 일들을 추억 상자에서 꺼내 보는 재미가 솔솔하다. 그렇게 어느 노래인들 사연이 없으랴만, 어제 불러 주신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에는 우리가 일평생 애석해마지 않는 누님이 있다.
  
  우리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 우리 옆방에 이모와 조카딸 두 사람이 살았다. 그 이모를 나는 할머니라 불렀는데, 배태(胚胎)도 못해 본 사람이라 동생의 딸을 양녀로 들여 둘이서 다정하게 살았다. 마산 시내 한가운데에 아주 오래된 시장인 부림(富林)시장이 있다. 그 이름처럼 부자들이 장사하는 곳이다. 그 할머니는 거기서 큰 옷 가게를 하였다.
  
  조카딸은 마산여자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김영삼 대통령의 부인이 졸업한 학교이다. 그때는 여고생이 귀하던 시절이었고 마산여고는 전국 7대 명문(名門)이었다. 어느 날 누나가 외출하려 대문을 나서는 중에 호주머니에서 종이 쪼가리 하나를 흘리고 갔다. 내가 주워 보니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의 가사를 연필로 적은 종이였다. 누나가 자주 흥얼거리더니 알고 보니 이 노래였던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우리 누나는 노란 샤쓰 남자를 좋아한대요” 하며 무척 놀려먹었고 그때마다 누나는 얼굴을 붉히며 그러지 말라고 나를 살살 달래곤 했다. 그러다가 때로는 성을 냈고 또 때로는 유과를 사 주기도 했다.
  
  온 집안에 아이라고는 그 누나와 나 둘뿐이었다. 그래선지 꼭 친남매처럼 지냈는데 그 누나의 붙임성이 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누나가 나에게 산수를 가르쳐 주다가 내가 틀리게 답한다고 꿀밤을 때리곤 했는데 그러면 나는 아파 죽는 시늉을 하고 누나의 발을 간지르면 누나도 나처럼 뒹굴었다. 그리고 간혹 누나는 나에게 만화책을 빌려오라고 돈을 주었는데 글자가 많은 만화책을 가져오라고 했다. 요즘으로 치면 삽도(揷圖)가 많이 들어있는 소설 같은 만화책이었다. 그런 만화가는 박기당 선생의 이름이 높았고, 요즘같이 글이 적은 만화는 김경언 선생이 유명했다.
  
  내일은 누나의 졸업식날인데 오늘 할머니가 마루바닥을 치며 대성통곡을 하고, 간혹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이. 어린 것을. 그놈이 사람이냐” “그 가난뱅이 한테” 어린 내 눈에도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생긴 것으로 보였지만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일이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어머니 무슨 일이예요? 누나에게 무슨 일이 있는데요?” 하고 물었더니 “아이는 알 일이 아니다” 하고 나를 나무랐다. 이튿날 졸업식에 간다고 나간 누나가 다시는 집에 오지 않았다.
  
  마산에서도 가장 변두리이면서 늙어빠진 동네가 있었다 거기를 가려면 문둥이들이 모여 사는 ‘문둥이 고개’를 넘어서 가야 했다(현재의 NC 다이노스 마산 야구장 자리) 그 늙은 동네에 우리 진외종조모(陳外從祖母)가 있어서 간혹 심부름을 갔다. 종조모의 집과 그 옆집 사이에는 울타리도 없었고 같은 우물을 사용했다. 그런데 우물가에서 한 젊은 여자가 아이를 업고 쌀을 씻고 있었다. 고개를 드는데 보니까 누나였다. 할머니가 울면서 하던 말이 그때는 이해가 되었다. 곱디 고운 누나가 여고를 졸업함과 동시에 그 더러운 동네에서 신접살림을 차린 것이다. 누나가 아깝고 불쌍해서 걷다가 돌아보고, 걷다가 돌아보기를 수도 없이 했다. 이젠 안 돌아보겠다면서도 또 돌아보았다. 내가 마지막 본 누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