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이천사년 일월 하노이>
  
  냉기 섞인 찬바람이 불던 이천사년 일월 나는 하노이의 오래된 거리를 걷고 있었다. 퇴락한 낡은 집들이 부서진 벽돌담 사이로 내장을 드러낸 듯 보였다. 길거리에 정물같이 쭈그리고 앉아 망연히 지나가는 차를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신호등이 보이지 않는 교차로에서 오토바이들이 거센 물결을 일으키며 반대편에서 오는 오토바이들의 물결과 부딪쳐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것 같았다.
  
  이따금씩 입을 벌리고 있는 듯한 검은 뒷골목 안에는 재래시장이 자리잡고 있었고 시장 구석의 점포에는 털을 벗긴 죽은 개들이 고리에 걸린 채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가게 주인이 중량감 있어 보이는 넓적한 네모난 칼을 가지고 두꺼운 나무 도마 위에서 죽은 개를 내리쳐 절단하고 있었다.
  
  하노이라는 도시의 이름은 특이하게 내 귀에 익었다. 육십년대 중반 서울의 라디오 방송 뉴스 시간에 아나운서는 매일같이 미국의 폭격기가 통킹만을 지나 하노이를 맹폭격했다고 보도했었다. 미국은 베트남에 이차대전 때 사용한 폭탄보다 세 배가 더 많은 양의 폭탄을 투하했다고 했다. 어린 나는 훌륭한 미국이 그렇게 월맹이라는 나라를 파괴해야 하는 것으로 알았었다. 한국도 6.25전쟁 때 미국의 B-29폭격기가 북한을 초토화시켜 주어 우리가 살아난 것으로 알았다.
  
  어려서 우리는 미국에 저항하는 북베트남군을 ‘베트콩’이라고 부르고 그들을 악의 화신으로 인식했다. 가끔 신문사진을 통해 보는 베트콩은 헐벗고 굶주리고 비쩍 마른 북어 같은 존재였다. 미군 병사에게 그 자리에서 처형되는 베트콩의 사진을 본 적도 있다. 월남에 파병 나갔다 온 형들은 베트콩이 숨어있는 굴 속에 수류탄을 까 넣은 것을 자랑하곤 했었다. 중학교 3학년 무렵 그렇게 막강한 미국이 거지 같은 군대인 베트콩에게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게 어린 시절 나의 인식이었다.
  
  베트남의 통일을 이룬 지도자 호지명이 잠들어 있는 묘로 갔다. 그는 대리석으로 만든 묘지에 누워있었다. 방부 처리된 시신은 대머리에 약간 수염이 나 있었다. 쭈글쭈글한 둥근 귀였다. 현장의 묘지 안내인이 내게 이렇게 설명했다.
  
  “젊은 시절 잠시 교사를 했던 호지명은 베트남 국민들의 정신을 깨우치는 글을 썼습니다. 그의 글이 잡지를 통해 또 책으로 만들어져 퍼져 나갔습니다. 혁명가 호지명은 평생을 베트남의 정신을 깨우고 독립과 통일을 위해 싸웠습니다. 혁명가인 그 분은 자식도 두지 않았고 재산도 없었습니다. 폐타이어를 잘라 만든 슬리퍼와 몇 권의 책, 램프 하나, 탁상시계가 그의 소유물의 전부였죠. 혁명가는 미군의 폭탄을 피해 동굴 안에서 버티며 일생을 보냈습니다. 수염을 깎을 여유도 없이 살았습니다. 프랑스 총독부에서 혁명가 호지명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미국의 정보부에서도 죽이려고 했지만 혁명가는 살아남았습니다. 베트남이 미국에 승리한 것은 무력이 아니었습니다. 기다림과 인내였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안내인의 말에는 민족적인 긍지가 담겨있는 것 같았다. 안내인이 말을 계속했다.
  
  “공산혁명이 이루어지기 전 베트남의 남쪽 반은 친미정권이 있었죠. 그 사회의 부자나 관료, 군인, 경찰, 승려들은 너무 서구화되어 있었고 부패해 있었습니다. 민족의식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통일이 된 다음 인민재판을 통해 브루주아에 대한 숙청을 했습니다. 숙청과정에서 민중의 분노로 인해 일부 무리한 일도 있었습니다. 여성들 중 미인이 많이 죽었습니다. 민중은 미녀를 부자나 사치의 상징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안경 낀 지식인을 민중은 싫어했습니다. 손에 노동의 흔적인 굳은살이 없는 사람도 우리들은 마땅치 않아 했습니다. 집 안에서 금덩어리가 나온 집들은 브루주아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런 숙청기준이 있었던 역사가 있습니다.”
  
  베트남은 남과 북의 싸움이 끝이 났지만 우리의 경우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사회 내부도 좌와 우로 갈리어 서로 증오의 이빨과 발톱을 세우고 있다. 너무 미국화되어 버린 사람들도 많다. 미국시민권을 자랑하고 위기가 오면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도망가려고 한다. 그들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이미 실종된 것 같다. 그들의 의식은 미국의 식민지화 된 지 오래다.
  
  남쪽을 점령했던 베트남의 숙청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어떤 존재인가 생각해 봤다. 우리 사회 많은 사람들이 숙청의 두려움을 잠재의식 속에 가지고 있다. 반공주의는 그런 사람들의 처절한 생존의 몸부림이었다. 나는 변호사로 평생을 살아왔다. 장교로 군 복무를 했었고 공무원도 했다. 나도 그들의 잣대로 재단되면 숙청 대상일까. 북한 사람들을 만나보면 그들은 그들대로 겁을 먹고 있다. 남의 자본주의가 그들을 지배하면 그들 모두가 돈의 노예가 되어 이 사회의 밑바닥에서 무시당하고 고통을 받는다는 두려움이었다. 남과 북의 평화가 왔으면 좋겠다. 마음 내키면 바로 평양과 원산을 가고 신의주를 넘어 유럽으로 가는 도로를 들어섰으면 하는 소망이다. 정치의 벽만 허물면 되지 않을까.
  [출처] 이천사년 일월 하노이|작성자 엄상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