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변호사)
“똥 그 친구 말이야 요즈음은 어떻게 지내는지 몰라.”
고교 동기인 탤런트 정한용이 쇳소리 섞인 어조로 내뱉었다. 그가 말한 친구의 본명은 김동원이었다. 이름 가운데 ‘동’자를 익살스럽게 똥이라고 별명같이 불렀다.
“똥 그 친구 우리 시절 유명한 산부인과 의사의 외아들로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살았어. 중학교 때 덕수궁 근처에 있던 그 친구 집을 놀러 가면 완전히 저택이었어. 의사인 엄마가 우리들한테 잘해주는 거야. 앞으로 우리 동원이하고 친하게 지내라고 말이야. 그 친구 엄마가 당시 유명하다는 사람들의 애는 거의 다 받아줬을걸.”
탤런트 정한용이 말하는 그 친구의 중고교 시절 영상이 내 뇌리에 떠올랐다. 장난꾸러기 같은 귀염성 있는 꼬마였다. 대학시절 그는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오는 장발을 하고 다녔다. 탤런트 정한용이 말을 계속했다.
“똥은 대학도 나하고 같은 학교로 갔어. 거기서 연극반도 같이 했지. 무역학과에 다니던 문성근도 같은 연극반이었고 말이야. 대학 시절 똥이 나보고 방학 때 같이 불란서 문화원에 다니자고 그러더라고. 똥은 거기서 인생이 변했어. 불란서 혁명과 모택동 사상에 심취했어. 그러더니 어느 날부터 빈민운동을 한다고 그러더라구. 빈민운동을 하는 똥이 어느 날 나를 찾아왔는데 시큼한 노숙자 냄새가 나서 같이 있을 수가 없는 거야. 똥은 스스로 가난 속으로 들어갔다고 하더라구. 결혼도 운동권의 여성과 했어. 검정 통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고 다니는 여자였지. 똥은 그 여자와 산꼭대기 달동네에 사는 것 같았어. 똥은 완전히 다른 세계로 갔어. 이따금 그 엄마한테 들르면 엄마는 재산을 아들한테 물려주면 다 빈민들에게 나누어 줄까봐 걱정을 하고 계셨어. 그런 중에도 아들이 장교복을 입고 찍은 사진을 벽에 걸어놓고 대견해 하는 모습이었어. 똥이 알오티씨 출신으로 군에서는 장교였거든.”
빈민운동을 하고 자유로운 영혼이던 그가 장교 출신이라는 사실은 의외였다. 나는 다음 말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한번은 빈민운동을 하던 똥이 감옥에 간 적이 있어. 명동성당 앞에서 구속자를 석방하라는 시위가 있었는데 나도 똥을 위해 거기 나와서 거들라는 거야. 그래서 땡뼡에서 종주먹을 뻗으면서 석방하라 석방하라 똥을 석방하라고 외친 적도 있었지.”
해학적으로 얘기하는 탤런트 정한용의 말의 행간 속에는 친구에 대한 강한 애정이 묻어 있었다. 그가 말하는 김동원이라는 친구와 허름한 식당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영혼까지 완전히 달려져 있었다. 그가 말하는 과거중에 그의 삶과는 아이러니한 장면도 있었다. 그가 장교로 군대에서 받은 보직은 12.12. 군사반란시 노태우 사단장이 지휘하던 9사단의 소대장이었다. 어느 날 그는 사단장의 명령에 따라 부하들을 이끌고 서울로 나와 중앙청의 경비를 맡았다. 그는 중앙청에서 거리 쪽으로 놓인 대포를 돌려놓아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면서 무력감에 잠겼었다고 했다.
제대 후 그는 영화판의 조감독이 됐다. 어느 날 그는 아는 사람을 통해 빈민운동을 하는 미국인 정일우 신부가 철거현장을 촬영할 사람을 찾는다는 소리를 들었다. 정일우 신부는 그가 나온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했었다. 그는 빈민촌인 상계동 주민들과 용역들의 전투장면을 찍기 시작했다. 극영화와는 다른 현실을 찍는 그에게 또 다른 감동이 전율같이 왔다. 그가 살아온 세상이 반쪽이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정일우 신부를 봤다. 정 신부는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예수의 말을 그대로 믿는 사람이었다. 정 신부는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가는 사람이었다.
그는 철거민들이 자는 임시천막에서 자기 시작했다. 철거민들과 한 식구가 되었다. 낮이면 촬영을 하고 밤이면 그곳 가난한 아이들의 선생님이 되었다. 그는 철거민촌에서 찍은 영상들을 편집해 보았다. 단순한 장면들이 모여 감동을 이루며 그 자체로 생명력이 있는 것 같았다. 한국 최초의 독립 다큐멘터리 작품이 된 것이다. 지금까지 단편의 독립영화는 있었지만 그런 장르는 없었다. 그의 철거현장을 찍은 작품이 베를린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다.
그는 사회의식을 작품으로 만들었다. 그는 달동네에 사는 비전향 장기수의 일생을 찍었다. 그들을 보면서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송환’이라는 제목으로 비전향 장기수의 삶을 작은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었다. 그 작품이 미국의 선덴스 영화제에서 수상작품으로 결정이 됐다. 전 세계 각 지역에서 일어나는 사회문제들을 잘 소화해낸 작품성 높은 것들을 선발하는 권위 있는 영화제였다. 동시에 그 작품들은 예술성도 있어야 했다. 그는 그 분야의 최고의 영화제작자가 됐다. 그를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지만 그를 만든 건 무엇인지 궁금하다. 모택동 사상인지 아니면 정일우 신부의 속에 숨어있던 예수인지 말이다.
로그인메뉴
2024년 10월 20일 02:38
상단주메뉴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