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세상에 나온 시기와 장소 그리고 환경을 보면 정말 한심하다. 이 땅이 폭격으로 초토화되고 이백만이 넘는 사람들이 죽은 6·25 전쟁의 말에 태어났다. 산불 뒤에 재 위에 난 뾰족한 새 싹에 비유할까. 결혼한 아버지는 병사로 전쟁에 끌려나가고 임신한 어머니는 피난간 시골 농가 구석 토방에서 나를 나았다고 한다. 피난민의 삶이라는 게 하루에 고구마 한 개로 요기를 하고 볏짚을 조금 얻어서 아궁이에 넣어 태워 간신히 방구들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막았다고 했다.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 그냥 세상에 내던져지는 것이라고 실존주의는 말한다. 셰익스피어는 아이가 태어나서 우는 것은 고통 많은 세상에 밀려 나왔기 때문이라고 리어왕의 입을 빌려서 말했던가. 나도 알았더라면 그런 상황에 그런 부모에게서 세상에 밀려나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우연히 유튜브에서 ‘실존철학’을 강의하는 교수의 말을 듣다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 그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인간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에 던져지고 또 이 삶의 무대에서 자기의 뜻과는 상관없이 끌려 내려지는 운명입니다. 그걸 실존주의라고 하죠.”
  
  나도 얕은 지식으로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자 중에는 인간이 자기 의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자살이라고 한다는 얘기를 얼핏 들은 적이 있었다. 나는 무심히 실존주의 철학을 강의하는 교수의 얘기를 계속 듣고 있었다.
  
  “그러나 살아있는 동안 자기의 자유의지로 할 수 있는 일해야 하는 일이 있다는 겁니다. 운명론적 절망이 아니고 자기를 찾아가는 게 실존주의의 핵심입니다.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실존의 의미는 일반적으로 가지는 그런 절망적인 운명론과는 전혀 다릅니다. 세상에는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가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회사에 들어가면 임원이 되기 위해 경쟁을 하고 그게 보편적인 삶의 모습이 됩니다. 공무원이나 군인이 되면 승진의 사다리를 오르기 위해 평생 거기에 매몰되기도 합니다. 상인들은 돈을 벌기 위해 일생을 거기에 바칩니다.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실존은 그런 사회의 일반적인 흐름에 휩쓸리지 말고 진정한 자신을 찾으라는 겁니다. 그게 실존이라는 거죠. 세상에 던져지고 어찌할 수 없이 끌려가지만 사는 동안 자신의 실존을 찾아야 진정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이었다. 나의 삶은 실존이었는지 돌이켜 보았다. 내가 자란 시대의 보편적 가치관은 경쟁에서 이겨 높은 지위를 얻거나 부자가 되는 것이었다. 수재들의 세상적 방향성은 대충 비슷했다. 장관이나 국회의원이 되면 성공이었고 그 앞에서 다른 사람들은 원인 모를 열등감과 패배의식 비슷한 게 있었다.
  
  대리석이 번들거리는 호화스런 빌라에서 클라리넷을 연주하고 고급 와인을 마시는 친구를 부러워했다. 고급 골프장이나 헬스장의 회원권이 인생 성공의 표상이기도 했다. 나도 젊은 시절 그런 경쟁에서 살아남아 그렇게 되고 싶었다.
  
  인생의 여름이었던 삼십대가 끝날 무렵 나는 소나기 같이 쏟아지는 상상 속의 매미소리 속에서 갑자기 회의가 들었다. 제사상 위패에 써붙여 자랑하는 그런 높은 관직이 무의미하게 보였다. 무능한 왕이 종이에 몇자 적어 내리는 교지에 가문의 영광을 다는 그런 벼슬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을 사적으로 도운 사람들이 나누어 먹는 엽관제의 자리가 뭐가 그렇게 훌륭할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낙하산으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선거나 정치와 상관이 없는 사람들은 눈치 보는 하급관리일 뿐이었다. 번들거리는 고급빌라나 간결하고 소박한 토담집이나 돌과 흙 속에서 사는 건 마찬가지라는 생각이었다. 죽은 물고기는 물에 쓸려가지만 살아있는 물고기는 물을 거슬러 오른다고 했다. 사회의 보편적 가치에 휩쓸려 그냥 가는 것이 싫었다. 새로운 것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벼슬이나 사업을 그만두고 북한산 자락에서 경전을 읽던 다석 류영모 선생의 삶이 존경스러워졌다. 산 속의 암자에서 후박나무와 대화하며 이따금씩 수필로 세상과 소통하는 법정 스님이 진짜 사는 것 같아 보였다. 일찍 벼슬을 그만두고 세상을 방랑하면서 이천 수의 시와 몇 권의 소설을 남긴 김시습이 마음속으로 쳐들어오기도 했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지를 나름대로 탐구하면서 살기 시작했다. 나는 공직에서 사표를 내고 나와 독자적인 나의 방향을 추구했다. 모래시계를 흘러내리는 입자같이 세월이 흘렀다. 높이 높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고 싶었던 친구들이 하나씩 둘씩 사다리에서 떨어져 나왔다. 정상까지 올라갔던 친구들도 허허로운 깃발을 꽂아놓은 채 내려왔다. 우리들은 내남없이 바다를 바라보는 넓은 강의 하류에 물방울이 되어 모여있다. 골짜기의 계곡 시냇물 시절부터 여러 길을 따라 각자 흘러왔다.
  
  유튜브에서 강의하는 교수의 실존주의를 들으면서 나는 약간의 위안을 얻었다. 세상의 보편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자기대로 사는 게 실존이라는 말을 듣고 말이다. 안정을 위해 공무원이나 대기업에 들어가려고 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실존주의 철학을 알려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