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학교를 같이 나온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제주도에 땅을 좀 가지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허락도 없이 막 쓰는 거야.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친구는 대단한 재력가였다. 어쩌면 소유재산이 대한민국에서 손꼽을 정도인지도 모른다. 그는 대한민국 최고 재벌가와 사돈을 맺어 언론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수십 점이 넘는 국보급 고려청자들을 보존하기 위해 삼성가와 쌍벽을 이루는 박물관을 설립하기도 했다. 남들은 그런 부자 친구들과 스스럼없는 사이를 이상한 눈으로 보기도 했다.
  
  대한민국에서 한 가닥을 했던 인물들의 아들들과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 인연을 맺기도 했다. 또 극히 우수한 두뇌를 가진 친구들을 만나기도 했다. 그건 뜨개질 품팔이를 했던 가난한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 외아들인 나를 당시 명문이라고 불렸던 학교에 보낸 은혜였다.
  
  중학교 시절 검정물을 들인 교복을 입고 교실에서 부자나 고관집 아이들과 함께 공부했다. 휴일이면 포터블을 들고 교외로 빠져나가 엘피판에서 흘러나오는 팝송을 들으면서 춤을 추고 몰래 담배를 같이 배우기도 했었다. 그런 약간의 일탈된 행동들이 공범의식을 형성해 관계를 더욱 가까이하게도 했다.
  
  우리 집은 가난했지만 부자집 아이들이 자주 놀러왔다. 어머니는 가난했지만 귀한 집 도련님들이 나의 친구라고 놀러 오면 김치국을 끓여 밥을 반질반질하게 닦은 양철 소반에 담아 가져다주었다. 아들의 인간관계를 만들어주려는 배려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세월의 강물이 흘렀다. 부자집 아이들은 재벌그룹의 회장이 되어 있었다. 거대한 금융회사를 만들어 경제계의 거물이 된 친구도 있었다. 장관이 되기도 하고 고위공무원이나 높은 법관이 되기도 했다.
  
  사십대 중반 공무원들만 따로 모이는 동창 모임에 나갔을 때였다. 정부 16개 부처의 현역국장이 그 자리에 다 모여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그 안에 있는 셈이었다. 대한민국은 사실상 관료가 지배하는 나라였다. 전국의 대학 총장들은 문교부의 과장에게 가서 머리를 굽혔다. 대학들은 정부의 지원금에 의지하기 때문이었다. 예산을 주무르는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전국의 은행장들이 재무부의 은행과장에게 가서 고개를 숙였다. 중앙정부의 서기관들이 나라를 주무른다는 소리가 들렸다. 모임에 본 고교 동창인 친구들은 그 정부 각 부처를 장악하고 있는 실무의 총 책임자인 국장들이었다. 정치인도 장관도 그들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모인 자리에서 나는 예산처의 국장을 하는 친구에게 내가 돕는 자선단체의 지원을 부탁했다. 그가 즉석에서 알겠다고 대답을 하고 매년 수억 원의 지원금을 배정하겠다고 약속했다. 그가 관련 부처의 국장인 친구에게 그 자리에서 내가 돕는 단체에 그 예산이 가도록 하라고 말해주었다. 자동화 기계같이 일은 그렇게 처리됐다.
  
  공무원만이 그런 게 아니었다. 사회 곳곳의 중요한 자리에 고교 동창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한번은 내가 사이비 이단(異端) 교주를 상대로 소송을 하고 있었다. 그 단체의 힘은 대단했다. 그들의 비리를 돈으로 틀어막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신도들을 동원해서 폭동 같은 데모로 겁을 먹게도 했다. 내가 소송을 하는 걸 알고 방송국 책임자인 고교 동창이 집중적인 고발방송을 기획해 주었다. 그 종교단체에서 법원에 방송금지 가처분을 신청했다. 그 심리를 담당한 재판장도 고교 동기였다. 우리끼리는 전화 한 통으로 상황을 알려주면서 서로 도왔다. 그 사이비 종교단체의 교주는 방송국이고 법원이고 사방의 벽이 뚫리지 않는 이유를 모르고 펄펄 뛰었다. 돈보다 인맥이 더 강했다. 그런 것들이 우리 시대 있었던 지금은 없어진 명문 학교의 의미였다.
  
  명문이라는 것은 공부를 잘해서가 아니었다. 인맥이었고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는 출세의 사다리였다. 끈끈한 학연 앞에서는 좌도 우도 보수도 진보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것들이 내가 체험한 예전 명문 학교의 실질적인 위력이었다.
  
  가난하고 무식했던 어머니는 목숨을 걸고 아들인 나를 개천 밖으로 밀어냈다. 변호사를 하면서 재벌을 꿈꾸던 두 인물을 본 적이 있다. 머리가 비상한 그들은 이 사회의 장애를 극복하고 거의 구름 위로 솟아올랐다. 그러다 마지막 성공을 눈앞에 두고 골짜기 아래로 추락했다. 그들은 내게 아무리 돈으로 해결을 하려고 해도 이 사회의 학연이라는 그물망을 뚫을 수가 없었다고 하소연했다.
  
  명문이 없어진 이 사회에서 나 같은 개천 출신 흙수저들은 어떻게 다른 계급과 친구가 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 그래서 그냥 개천의 붕어나 가재로 남으라는 모 서울대학 교수의 글이 돌아다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