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가의 태풍>
  
  천구백구십육년 일월 십오일 겨울비가 그치고 찬바람이 길거리에 생긴 물웅덩이를 꽝꽝 얼어붙게 하던 저녁 일곱시경이었다. 나는 서울중앙지방법원 사백십칠호 법정의 방청석에 앉아 재벌 회장들이 재판을 받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정권이 바뀌고 전임대통령에게 돈을 먹인 것이 뇌물죄로 기소가 된 것이다.
  
  “정태수 피고인.”
  김진태 검사가 한보그룹의 회장을 불렀다.
  
  “수서에 대단지 아파트를 짓기 위해 대통령에게 크게 베팅을 했다고 그랬죠?”
  “저는 무식해서 베팅이라는 소리가 뭔지도 모릅니더.”
  
  노련한 재벌 회장의 더듬수였다. 재벌로 생존하기 위해서는 권력자에게 돈을 바쳐도 철저히 부인해야 하는 것 같았다.
  
  “이건희 피고인.”
  검사가 삼성그룹의 회장을 불렀다. 이건희 회장이 불만이 가득찬 심드렁한 모습으로 검사를 쳐다보았다.
  
  “삼성이 자동차사업에 뛰어들기 위해 대통령에게 로비했죠?”
  “로비를 안 했습니다. 대구 사람들이 오히려 자동차사업을 원해서 하게 됐습니다.”
  
  그날 내가 법정에서 보고 들은 광경이었다. 그리고 이십사년이 흘렀다. 노태우 대통령 당시 경제수석비서관을 했던 김종인씨가 당시 상황에 대한 회고록을 썼다. 당시 경제수석이던 김종인은 삼성가의 이건희 회장이 그를 만나 으름장을 놓았던 광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대통령이랑 형님 동생하는 사이란 말이야. 어젯밤에도 대통령 안방에서 대통령 부부랑 우리 부부가 함께 식사를 했어.”
  김종인씨는 이건희 회장의 은근한 협박이었다고 회고록에서 말하고 있다.
  
  “회장님께서 대통령을 만나 저녁을 드신 게 저랑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경제수석비서관인 그가 그렇게 되받아쳤다.
  
  “그래도 자동차사업 허가를 안 내주겠나?”
  “우리나라에도 자동차회사가 현대 대우 기아 쌍용 네 개이고 국내뿐 아니라 세계시장을 봐도 승용차 생산이 포화상태에 있는데 그런 사업을 해서 이익을 낼 수 있겠습니까?”
  
  경제수석은 삼성의 자동차사업 진출을 적극 반대했었다고 했다. 그러자 전직총리, 장관, 대통령 측근 등 온갖 인맥을 동원한 로비가 들어왔다. 삼성의 회장이 다시 경제수석에게 말했다.
  
  “나는 한번 하려고 하는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해. 한번 자존심을 걸고 자동차사업을 시작할 테니까 어디 두고 봐.”
  
  재벌의 힘은 막강했다. 그 얼마 후 삼성의 자동차사업 허가가 떨어졌다. 당시 경제수석이었던 김종인씨는 회고록에서 당시 또 다른 재벌회장이 씩씩거리며 찾아와 항의하던 광경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당신 몇 살이야? 오십대 아니야? 당신은 이 자리에 있어봤자 대통령 임기 끝나면 물러가야 할 사람 아니야 기껏 이삼 년이면 임기가 끝나는데 당신은 아직도 오십 년은 더 살 텐데 도대체 앞으로 어떻게 살려고 그러나.”
  
  그 회장은 대통령에게 부탁을 했는데 경제수석이 방해한다고 생각하고 협박을 하고 있었다. 그 회장은 이런 말로 회유도 잊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한번 신세 진 사람에 대해서는 영원히 잊지 않아.”
  
  공무원으로 있던 사람들은 육십대에 퇴직하면 인생의 나머지 절반 가량은 연금으로 살아가야 한다. 공직에 있을 동안 재벌 대기업과 좋은 관계를 맺어 놓아야 자리라도 하나 건질 수 있다. 총리나 장관을 마치고 재벌기업에 들어가 명함을 바꾸곤 했다. 재벌은 입법부도 쉽게 장악하고 있는 것 같다. 한 재벌회장이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국회의원 한 사람당 이삼십억만 주면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있어요. 오백억만 있으면 충분히 교섭단체가 될 국회의원들을 사올 수 있지.”
  
  정당도 돈으로 간단히 만들 수 있다는 얘기였다. 입법안의 통과는 말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국민들은 투표를 해서 대표를 뽑는다. 그 대표는 돈에 오염되어 재벌의 의사를 반영했다. 돈에 지배되는 세상을 보면서 과연 내가 사는 나라가 민주주의인지 국민이 왜 투표를 하는지 의문이 들었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렀다. 법정에서 이건희 회장의 말이 옳은 것인지 아니면 대척점에 있던 김종인 경제수석의 회고가 옳은 것인지 객관적으로 판단할 자료는 없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렀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태풍을 경험한 재벌들의 의식과 자세도 변했을 것이다. 경제민주화란 민주주의가 재벌의 돈에 의해 오염되지 말자는 뜻도 있는 게 아닐까.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재벌회장을 뇌물죄로 걸어 한번 감옥에 갔다 오게 하는 태풍이 고정적으로 분다. 그리고는 사면해 주는 게 공식이었다. 나라 경제에 이바지한 공이 크다는 명분으로. 이제 그런 인위적인 정치적 쇼가 끝이 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