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마을 길가의 열녀비(烈女碑)>
  
  얼마 전 나는 동해안의 갯마을들을 구경하며 돌아다녔다. 젊은 시절 동해안의 북에서 시작해서 남쪽 끝까지 바닷가 길을 한없이 걷고 싶었다. 노년에 이르러 그 꿈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유한의 세계에서 무한의 세계로 옮기기 전 약간 틈을 두는 것도 좋은 일 같다는 생각이다.
  
  차로 이동하다가 갯마을이 나타나면 바다를 끼고 있는 마을 앞길과 다닥다닥 붙어 있는 낮은 집들 사이의 미로 같은 골목을 걸어보았다. 꽃 화분을 앞에 가득 놓은 집은 낡았어도 풍성해 보였다. 꾸덕꾸덕 말라가는 줄에 매달린 오징어와 물고기들의 비릿한 냄새 그리고 소금기가 밴 바닷바람이 골목길을 휘돌아 가기도 했다.
  
  갯마을 어귀의 잔잔한 파도가 치는 길을 걷다가 길섶에 먼지를 뒤집어 쓰고 묵묵히 서 있는 비석 하나를 보았다. 표면에 풍화되어 있는 글을 보니까 ‘열녀비’였다. 갑자기 ‘열녀(烈女)’라는 단어가 기억의 깊은 우물 속에서 떠올랐다. 평생 정조를 지킨 여자에게 그 시대 세상에서 주는 명예였다. 정조나 열녀라는 단어가 조금은 생소한 느낌이 들었다.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 죄로 다루어지는 그 시대였다. 그 열녀는 과연 자진해서 열녀가 되고 그래서 행복했을까.
  
  중국 성인의 글을 강론하고 중국 고대의 충신 효자의 사적을 외웠던 시절이었다. 사서삼경은 충신과 효자 열녀를 만드는 정신의 거푸집이었다. 경전의 딱딱한 글들이 강요하는 외면이 원초적 본능의 인간 내면을 누르고 위선자를 찍어내는 시대였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교 도덕을 논하는 양반들이 머슴과 하인의 여자들을 물건같이 건드리기도 했었다. 그렇게 태어난 자기 자식을 노비로 삼던 시대이기도 했다.
  
  6.25 전쟁 무렵 태어난 우리 세대는 어려서부터 반공정신이 구겨 넣어졌다. 그게 정신교육의 가장 기본이었다. 내 기억의 바위에 각인된 한 장면이 있다. 빨갱이라는 도깨비가 있다. 어두움 속 거미줄을 배경으로 도깨비의 길다란 손톱이 보인다. 그런 포스터 그림을 그리면서 자라야 했다. 북한이라는 곳은 동화 속에 나오는 마녀의 동굴 같은 존재였다. 그런 도깨비로부터 국가와 민족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용감하게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정신교육을 받고 자라났다.
  
  또 다른 정신적인 전족도 찼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교회에 빠지지 않고 나가야 구원을 받을 것 같았다. 성경의 교훈은 실천하지 못하면서 말끝마다 성경 구절을 인용했다. 때때로 성직자의 흉내를 내고 세상 사람들에게 나도 모르는 어리석은 소리를 하곤 했다. 저 세상을 갔다 온 사람이 없는데도 교회의 단 위에서는 확신을 가진 듯 떠드는 사람이 많았다. 자기도 모르는 소리를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말로 떠드는 신학박사 앞에서 무식하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할렐루야 하며 맞장구를 쳤다.
  
  자기 기만의 극(極)이고 오류의 극인 세상에서 살아왔다. 학교나 교회 국가가 모두 위선자 양성의 기관이기도 했다. 진짜 바른 정신의 교육이란 무엇일까. 이십년 전쯤의 일기를 펼치다가 죽은 박수근 화백의 아들이 내게 했던 말이 기록되어 있는 부분을 봤다. 아들은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우리 아버지는 나에게 그림이란 선(善)과 진실을 담는 그릇이라고 했어요. 화가에게 먼저 바른 정신이 있어야 제대로 된 그림이 나온다는 거죠. 그림만 보지 말고 그 뒤에 있는 화가를 보라고 했어요.”
  
  깊은 의미가 담긴 말 같았다. 박수근 화백의 아들은 또 이런 말을 했었다.
  
  “아버지는 내게 조각을 할 때 예리한 칼보다 무딘 칼로 새긴 게 오래 간다고 했어요. 그 의미는 인내와 끈기 마음을 다해 만든 작품이 생명력을 가진다는 거죠.”
  
  바른 정신을 가진 아버지가 마음 속 샘에서 솟아나오는 물을 아들에게 흘려보낸 것 같았다. 아들은 배운 게 아니라 그 샘물을 느끼고 받아마셨다. 정신은 느껴야 하는 것이지 배운다고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죽은 박수근 화백의 그런 정신은 결국 믿음에서 나온 것 같았다. 그는 열두 살 때 밀레의 ‘만종’이라는 작품을 보고 하나님에게 그런 화가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미술학교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나뭇가지를 태워서 만든 목탄으로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다고 했다.
  
  그의 정신은 아들을 거쳐 손자에게 흘러간 것 같았다. 손자는 시드니의 미술대학에 들어가 배우고 작품전시회를 열었다. 손자의 작품이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았다. 손자는 찾아온 기자들에게 자신은 그분의 도구로 움직여 그림을 그렸다고 했다. 박수근 화백의 집안은 믿음으로 결핍을 보충했던 것 같다. 믿음으로 세상을 이겼다고 할까. 신앙의 지팡이로 딱딱한 마음의 바위를 두드리면 그 속에서 좋은 것들이 나오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