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정권 시절 북한과의 비밀회담을 하는 통일부 고위 공무원과 마음을 터놓고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대머리에 키가 후리후리한 마음이 좋아 보이는 남자였다. 그는 자기 차로 판문점의 북측 통일각으로 넘어가 그곳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기차로 평양의 용성역으로 간다고 했다. 평양의 서재골 초대소에서 묵으면서 북한의 고위당국자들과 회담을 한다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서른 번이 넘게 북한을 다녀왔다고 했다. 반공교육에 세뇌되어 북한이 마녀의 음침한 동굴쯤 상상했던 나의 시각으로 그는 시공을 초월한 신기한 존재였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
  
  “북쪽 사람들은 먼저 술로 우리를 제압하려고 들어요. 그걸 받아마시면 어떻게 독한지 정신을 차리려고 애써도 소용이 없어."
  
  김정일의 폭탄주 공세가 대단하죠. 남북문제는 솔직히 지금까지는 국내정치를 풀기 위해 이용했던 면이 많았죠. 외교정책도 그래요. 북을 고립시키기 위한 외교였죠. 서방세계 하고만 놀던 반쪽짜리 외교였구요. 그런데 북한을 들여다보니까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북한도 방대한 영토 안에서 많은 주민들을 통치합니다. 남북이 유엔에도 가입했고 국제적으로도 많은 나라가 북을 국가로 인정하잖아요? 북은 북대로 남은 남대로 공존하면서 평화롭게 지내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그렇게 하려면 지금까지 하던 정치적 쇼나 공허한 사상전이 아닌 진정한 접근이 필요해요. 저는 공무원으로 북방정책을 담당하고 있어요. 헝가리부터 시작해서 소련까지 문을 열고 들어가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 목적이 뭐겠습니까? 결국 북한을 개방시켜 같은 민족끼리 같이 잘살자는 겁니다. 거기서 저는 확고하게 느낀 게 있습니다. 남북이 각자 현 체제를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 이웃나라로 평화롭게 살아가거나 연방제고 가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김일성도 그렇게 남한이 해 준다면 얼마든지 정상회담을 할 용의가 있다고 했어요.”
  
  그 말을 듣고 나는 혼란스러웠다. 군 출신으로 보수성향의 노태우 정권의 상상을 초월한 전향적인 움직임이었다. 그의 말이 계속됐다.
  
  “남북 교류를 추진해야 합니다. 현대의 정주영 회장은 금강산에 관광특구를 만들어 속초에서 금강산으로 갈 수 있게 하고 철원에서 내금강과 외금강을 연결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고 있어요. 북의 통천에 자동차 부속품 공장도 구상하고 있죠. 정부에서 허락만 해 주면 현대에서 시베리아 개발도 하겠다고 합니다.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도 합작투자를 위해 북한과 헝거리를 다녀왔어요. 그 외에 비무장 지대 안에 평화시를 만들어 그 안에 남북한 이산가족이 편하게 만날 수 있는 호텔도 짓고 거기서 학술을 교류하기도 하고 상품도 교역하고 그런 방안들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남북이 서로 신뢰하면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주변 강대국이 문제에요. 미국의 허락을 얻지 못하면 우리는 한 발자국 나가기가 힘들어요. 중국도 한반도의 통일을 싫어하고. 또 반공의식에 젖은 경직된 국민 여론도 문제죠.”
  
  나의 고정관념과 편견이 깨지고 인식의 지평이 넓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런 인식은 고급정보를 가지고 있는 역대 대통령이 공유하고 있는 게 분명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헌법은 아직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있다. 북한까지 우리의 영토라고 못박고 있다. 북한은 이미 핵을 가진 일등 군사국가가 됐는데 많은사람들이 북한을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무슨 능력으로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영국을 세계적인 국가로 만든 청교도 혁명의 지도자가 크롬웰이다. 그는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합병을 굳혔다. 국가를 위해서는 법률문자에 얽매이지 않는 강한 의지의 소유자였다. 헌법학자의 눈으로 볼 때 그는 비 입헌적 독재자였다. 그러나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무엇보다도 성경을 많이 읽은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 했다. 그는 “만일 저마다 자기의 이상적인 정치를 해나가겠다고 고집하면 나라는 하루도 지탱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 크롬웰은 법률의 문자를 초월해서 그 정신을 지켰다. 역사는 그가 채택한 정책이 그 시대에 알맞은 것이었음을 증명했다. 우리나라도 심지가 굳은 강한 지도자가 나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