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잊는 죄>
  
  삼십대 후반 직장의 책임자가 자기의 보좌관이 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는 보좌업무를 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나는 눈치가 둔했다. 재빠르지도 못했다. 오히려 주변에서는 나를 느려 터졌다고 했다. 게다가 나는 일이 쉽기를 바라고 노동시간도 짧기를 바라는 베짱이 같은 인간이었다. 상하의 차별이 있는 걸 싫어하는 반항적인 성품이었다. 나는 그걸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책임자에게 나의 모습들을 솔직히 말하고 나는 아닌 것 같다고 그 직책을 사양했다. 책임자는 그래도 괜찮다고 하면서 나를 그의 보좌관으로 임명했다. 하는 수 없이 그 일을 맡게 됐다. 나는 어떤 마음 자세를 가질까를 생각해 보았다. 보좌관이라는 것은 그건 단순한 업무적인 관계를 넘어서 어떤 인간적이고 숙명적인 관계의 설정이기도 했다.
  
  나는 속으로 하나님에게 ‘어떻게 할까요?’라고 물었다. 그분은 내게 ‘상관에게 어떤 기대도 하지 말아라’고 했다.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기대가 있을 때 실망이 있고 거기서 배신의 싹이 트기 마련이다. 그렇게 보좌관 일을 시작했다. 실수의 연속이었다. 상관은 더러 나를 룸살롱 같은 곳에 배석시키기도 했다. 밖에서 기다리는 수행비서 같은 보좌관이 아니라 같이 술 마시고 춤을 추었다. 요정정치의 이면을 알게 하려는 취지 같았다. 둔한 나는 마음을 풀어놓고 그 자리에 휩쓸리기도 했다. 그러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사람에게서 “상관과 부하 두 사람 중에서 누가 보좌관인지 구별이 안 된다”라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 그 사람의 말이 맞았다. 나는 역시 아니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상관이 오후에 두 인물을 만나 얘기를 나누고 그 결과를 보고하라고 했다. 권력을 가지고 언론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들은 더러 나같은 보좌관을 심부름꾼으로 사용하는 것 같았다. 점심시간 사람을 만나고 헤어진 후 다음 시간은 저녁 약속이었다. 그 사이 시간이 남았다. 원칙으로 치면 사무실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야 했다. 나는 그게 귀찮아서 사우나로 들어가 목욕을 하고 쉬기로 했다. 사우나의 휴게실에 있는데 갑자기 상관한테서 전화가 왔다. 아마도 결과를 알고 싶어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지금 뭐 하고 있나?”
  상관이 물었다. 이런 때 나는 머리 회전이 되지 않는 인간형이었다. 재빠른 거짓말을 해내는 능력이 없었다. 나는 잠시 주저하다가 말했다.
  
  “사우나에서 목욕하고 있습니다.”
  “그래?”
  상관의 반응이 미묘했다. 불호령이 떨어질 것 같았다. 욕을 먹어야지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면 사우나 잘해라”
  
  상관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내가 사회생활을 그럭저럭 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 같았다. 상관은 자리를 떠날 때 후임자에게 나를 부탁했다. 그때 나는 사표를 냈다. 나는 그저 변호사라는 직함 하나면 평생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처음 그분을 만날 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기로 한 맹세를 지키려고 했다. 상관은 그 후에도 대학교수 자리를 내게 만들어 주기도 했다. 그것도 사양했다. 그는 틈만 나면 나를 키워주려고 애를 썼다. 감사했다. 그렇게 알게 된 상관은 지금 팔십대 중반이다. 그리고 나는 칠십 고개를 넘고 있다. 상관과 나는 지금도 한 달에 한번씩 만나 밥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나만 그런 게 아닌 것 같다. 젊은 날 국무총리 보좌관을 한 친한 친구가 있다. 그는 공무원을 하면서 가장 친한 사람을 쓰는 경력난에 나를 써 준 친구였다. 나와 같은 직급이었던 그 친구는 보좌관을 마치고 지방의 군수를 지망했다. 지방자치제가 실시되기 전인 그때 그 자리는 스스로 좌천되는 모습이었다. 모두들 그의 겸손을 보고 칭찬했다. 총리가 그를 중앙부서의 요직에 앉히려고 애를 쓰는 걸 그는 전혀 인식하고 있지 않았다. 그 친구는 마지막에 장관을 지내고 공직생활의 끝을 맺었다. 얼마 전 그는 내게 모시던 총리가 치매라고 걱정을 했었다. 총리가 세상을 떠나자 보좌관을 했던 그 친구는 마지막까지 모시던 분을 지키고 그 가족을 위로했다.
  
  그런 게 우리가 부모에게서 학교에서 배워온 인간의 모습이었다. 인간들은 은혜에 너무 익숙해져 있는 것 같다. 감사하지 않고 그 이상을 기대한다. 은혜가 적다며 불만을 품고 배반하고 떠나기도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으레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남에게 줄 사랑으로 여기지 않는다. ‘은혜를 잊는 죄’도 상당히 무거운 죄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