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지적>
  
  내가 묵고 있는 바닷가 실버타운으로 친구가 찾아왔다. 고등학교와 대학을 같이 나온 그는 법관 생활을 마치고 변호사를 한 지도 이십 년쯤 되는 것 같다. 초임 판사 시절 그의 아파트를 갔을 때 벽에 마리아상과 그 앞에 촛대가 놓여있는 걸 본 기억이 있다. 그는 독실한 천주교인이었다. 판사 시절 그의 독특한 생활습관을 전해 들었다. 저녁 아홉 시면 자고 새벽 세 시면 일어나서 그때 맑은 정신으로 고시공부하듯 기록을 읽고 판결문을 쓴다는 것이다. 여러 면으로 부럽던 친구였다. 법조인 아버지를 둔 여유 있는 환경이었다. 총명한 머리를 가진 그는 대학생활의 낭만을 즐기면서도 고시에 합격했다. 성품이 원만한 그는 판사 생활을 하면서도 적(敵)이 없었다.
  
  내가 묵는 실버타운의 방에서 함께 잤다. 새벽 세 시경 인기척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아직 어둠이 짙은 창가에 있는 내 책상 앞에 앉아 조용히 책을 보고 있었다.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뭘 읽고 있어?"
  그가 나를 돌아보더니 다시 책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토마스 아 캠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이야. 내가 제 이의 성경으로 읽는 책이지.”
  
  자연스럽게 새벽에 주고받는 우리들의 대화 주제는 진리에 관한 것이었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주위에 보면 말이야 진리를 찾겠다고 가족을 두고 혼자 산 속이나 바닷가에 떨어져 사는 사람들이 있어. 경전을 읽으면서 조용히 생활을 하면서도 아직도 어디로 갈지 좌표를 못 정해 허우적거리는 거야. 방법이 문제지 좌표는 간단하고 이미 정해진 거 아니야?”
  
  마음이 찔리는 느낌이었다. 말년에 뭔가 찾아보겠다고 나는 동해안 바닷가를 찾은 입장이었다. 그가 나를 두고 하는 소리 같기도 했다.
  
  “간단한 그 좌표가 뭔데?”
  내가 되물었다.
  
  “사랑이지. 혼자 멀리 떨어져 시간을 보내면서 관념같은 도를 닦을 게 아니라 먼저 구체적으로 가족을 사랑하는 거야. 그리고 가까운 친구나 이웃을 사랑하는 거지. 그런 이웃사랑이 결국 하나님사랑으로 통하는 게 아니겠어? 그게 좌표고 진리 아니야? 진리란 투명하고 단순하단 말이야. 그걸로 어떤 복잡한 의문도 간단히 풀 수가 있잖아? 나는 도를 닦는다고 하면서 세상의 짐은 혼자 다 진 것처럼 고뇌하는 표정을 짓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할 수가 없어. 그들의 신앙도 겨우겨우 유지해 나가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하고 그들이 얻은 진리가 곧 무너질 것 같아 위태로워 보이기도 하지. 진리에 도달했다면 안심하고 유유히 자기의 길을 가야 하는 거 아닌가?”
  
  그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수도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가 모르는 차원 높은 진리가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하다.
  
  “자네는 그 진리를 얻었다고 생각해?”
  진리를 알아야만 남에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연히 못 얻었지. 그러니까 매일 아침 이렇게 책을 읽지. 진리는 지식은 아니야. 그러나 역사가 생긴 후 지혜자들의 말을 적은 책은 참고가 되지. 만일 내 생각이 그들의 인생관과 다르다면 반성하고 내 소신을 다시 깊이 검토하게 되니까 말이야. 책은 진리를 찾는데 참고는 되지.”
  
  “책 말고 진리를 찾는 방법은 뭐라고 생각해?”
  “진리는 학문이나 철학이 아니야.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가슴이 아니라 발로 얻어야 한다고 생각해. 아버지 덕에 여유 있게 자라고 무난하게 법관 생활을 하면서 칭찬을 받을 때보다 요즈음 더 얻는 게 많아. 새벽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도시락 반찬을 직접 만들고 그 도시락을 산동네 쪽방에 하나하나 배달할 때 깨닫는 게 있어. 손바닥만한 창문이라도 있는 쪽방이 창 없는 쪽방보다 더 비싸. 그걸 보면서 한 줌 햇볕의 가치를 알게 됐지. 도시락을 배달하고 돌아올 때 가슴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지. 판사가 기록 속에서 어떻게 그런 따뜻함을 발견할 수 있겠어? 진리를 찾으려면 상식적인 작은 선행이라도 몸으로 해봐야 한다는 걸 알았어.”
  
  “그러면 산 속에서 도를 닦아 세상에 나오겠다는 사람에 대해서는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어?”
  
  나는 진리의 산을 오르는 데는 여러 가지 길이 있다는 생각이다. 편편한 둘레길도 있고 경사가 급한 바위 길도 있기 마련이다. 그가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산 속에서 도를 닦는다는 것도 한 방법이겠지.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진리를 마치 어두운 숲 속을 뚫고 지나가는 보통사람들이 모르는 오솔길같이 인식하는 것 같기도 하단 말이야. 자기들만 그 길을 발견하고 독점하는 것 같이 행동하는 걸 볼 때도 있어. 나는 진리란 누구에게나 보이는 큰 길이라고 생각해. 진리란 있는 그대로의 것 맑고도 깊은 것이어서 깨끗한 마음으로 보면 누구나 볼 수 있는 거 아닐까? 진리란 도를 닦았다는 특정인들이 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다니는 게 아니라 진리가 사람을 품고 다녀야지.”
  
  창 밖에서 푸른 여명이 피어나고 있었다. 좋은 친구가 찾아와 혼자 있는 내게 뭔가를 알려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