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부부의 아름다운 인생>
  
  실버타운에 묵으니까 젊은 사람과 대화할 기회가 거의 없다. 그래서 젊은 사람이 쓴 에세이집을 책방에서 샀다. 책은 마음과 마음의 진솔한 대화다. 굳이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된다. 늙은이가 책 한 권을 사 주는 것도 예의고 배려인 것 같다. 책 속에서 글을 쓴 젊은 부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천만 원의 여윳돈과 이백만 원의 정기수입은 우리 부부에게 많은 안정감을 주었다. 식당에서 가격을 크게 따지지 않고 음식을 주문했고 커피와 디저트도 마음껏 먹었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마음을 담은 선물을 하며 작은 기쁨을 누렸고 동네 책방에서 책을 구매하며 손님의 도리를 다할 수 있었다. 돈은 마음의 안정제였고 우리가 사람 구실을 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 부부는 동해시로 옮겨와 여덟 평 원룸에 살고 있는 부부라고 했다. 글을 쓴 주부는 얼마나 모으면 돈에 끌려다니지 않을지 돈이 많아지면 걱정이 사라질지 돈을 얼마나 쓰면 만족스러울지에 대해 스스로에게 묻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여행에 대해 이런 경험을 얘기하고 있다.
  
  ‘팔년 전 우리는 돈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해외여행을 가고 싶었다. 일단 돈을 빌려 스페인행 편도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현지에서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사진을 찍어주며 돈을 벌기로 계획했다. 매일같이 사진 연습을 반복했다. 숙박비를 아끼기 위해 몇 곳의 숙소에 제안 메일을 보냈다. 생각해 보면 지금보다 덜 풍족했던 그때의 여행이 더 풍성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는 그 부부의 현재진행형 삶은 내 기억의 우물 바닥에 앙금같이 뭉쳐있는 젊은날들의 기억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했다.
  
  사십여년 전 신촌의 두 평짜리 쪽방에서 신혼생활을 할 때 나는 얼마의 돈이 있었더라? 방의 보증금이 이백만 원이었고 나의 한 달 월급이 구만 원가량이었다. 어느날 해가 어스름해 질 무렵 골목길 구멍가게를 지나쳤다. 박스 위에 가지런히 놓인 빨간 사과가 알전구의 불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아내에게 사과를 사다주고 싶었다. 금딱지가 붙은 사과 한 알에 오백 원이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다행히 오백 원짜리 백동전 한 개가 있었다. 간신히 사과 하나 값이었다. 나는 사과를 하나 손에 들고 가서 쪽방 부엌문을 열고 나오는 아내에게 주었다. 사과 한 개를 나누어 먹으면서 우리는 행복했다. 그 시절 모처럼 큰마음 먹고 고깃집을 갔었다.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서 일인분을 시켰다. 그때 느꼈던 고기 맛은 지금 생각해도 평생 최고였다.
  
  그때 여행을 하고 싶었다. 청담색으로 툭 터진 바다의 자유를 느끼고 싶었다. 서울역에서 삼등열차를 타고 밤새 어둠 속을 달려 새벽 동이 틀 무렵 바닷가에 도착했다. 잔잔한 파도소리가 적막한 해변을 조용히 어루만지고 있었다. 신선한 바람이 뺨을 부드럽게 만지며 지나갔다. 그 순간의 장면이 뇌리에 깊숙이 찍혔다.
  
  우리는 순간순간 하고 싶은 것들을 하고 살자고 약속했다. 황홀한 붉은 노을은 부자집만이 아니라 쪽방의 깨어진 창을 통해서도 비쳐 들어오게 되어 있다. 처마에 달린 고드름에서도 볼 수 있는 눈만 가지면 무지개를 볼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주변에서는 우리 부부를 보고 저렇게 살다가 굶어 죽는다고 걱정을 했다. 그냥 절약하라고 자기들의 철학을 강요했다. 일단 주머니 속에 들어간 돈은 나오지 않게 해야 부자가 된다고 했다.
  
  나는 일찌감치 출세와 부자가 되기를 포기했다. 일용할 양식만 달라고 기도했다. 속인의 속박을 받지 않을 만큼만 돈을 벌었으면 했다. 돈이 주는 자유를 희망했다. 정직하고 성실한 땀을 흘리면 그 정도는 하나님이 준다고 믿었다. 돈은 나중에도 가질 수 있지만 가슴 벅찬 젊음의 감동은 자칫하면 시들어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순간순간 내가 살아있다는 걸 알려주는 감동을 찾아다녔다. 그렇게 청춘의 산맥을 넘고 장년의 강을 건너 노년의 산자락에 도착했다. 나는 툭터져 나간 동해의 청담색 바다의 자유를 만끽하면서 조용한 실버타운에 묵고 있다. 매일 해변을 산책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심심하면 전망이 좋은 바닷가 레스토랑에 가서 와인과 스테이크를 즐기기도 한다.
  
  재산이 닻이 되어 묶여있는 친구들이 많다. 수천억 재산에 빌딩들이 있으면 거기에 인생이 잡혀 먹히는 것 같다. 아직도 대접받던 높은 자리의 맛에 연연해 정치권을 기웃거리는 모습도 본다. 나는 어떻게 살아온 인생일까. 그런대로 즐거웠던 인생으로 결론짓고 싶다. 살아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짜릿한 감동이 얼마나 존재했느냐가 인생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인생을 바쳐 만들어 놓은 아파트나 예금통장의 돈은 저 세상으로 가지고 갈 수 없다. 그렇지만 내가 느꼈던 수많은 감동의 기억들은 마음에 담아 가지고 갈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