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된 얘기다. 1970년대 중반 서울에서 '한국정치학회'가 주관하는 '개발도상국가와 민주화'에 대한 세미나가 개최됐다. 주제 발표자는 서울소재 사립(私立) S 대학교 젊은 정치학 전공 S 교수였다. S 교수는 "개발도상국가는 선(先)민주, 후(後)산업화가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S 교수는 또 "박정희 정권은 독재정권"이라고 비판했다.
  
  이날의 세미나 현장에는 박정희 정부의 청와대 정무수석 유혁인과 국내외 정치학 전공 학자들도 많이 참석했다. 주제 발표가 끝나고 토론에 들어가 논쟁이 뜨거웠다. 방청석에서 발언권을 요청하며 손을 든 한 학자가 있었다. 부산대학교 J 박사였다. J 박사는 미국 펜실베이니어 대학에서 국제 비교정치학을 전공하고 학위도 받았다.
  
  J 박사는 S 교수의 주제 발표에 반론을 제기했다. "S 교수가 주장한 개발도상국가의 정치 발전이 先민주화, 後산업화로 가야 한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하버드대학교의 로버트 배로 교수는 개발도상국가의 정치 발전은 '선민주화, 후산업화가 아니라 선산업화,후민주화가 옳은 방향'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배로 교수는 미국이 지원한 100여 개 개발도상국가를 대상으로 연구 분석한 결과 '한국·대만·싱가포르·홍콩' 등 이른바 '네 마리의 용(龍)'이 모범적 사례라고 지적한 바도 있다. 특히 '선산업화, 후민주화'의 국가 경영을 하는 이들 국가는 권위주의적이긴 하지만 민주화의 암흑기가 아니라 민주화를 위한 사회경제적 기반 조성기라고 배로 교수는 평가하고 있다"고 했다. J 교수의 이같은 주장에 대해 주제 발표자 S 교수와 방청석의 많은 학자들도 경청했다.
  
  세미나장의 분위기를 지켜 본 유혁인 정무수석이 청와대로 돌아가 J 교수의 발언 요지를 보고했다. "각하, 부산에서 올라온 J 교수란 분이 이런 주장을 했는데도 방청석은 조용합디다"라고 보고했다. 유혁인 정무수석의 보고를 받은 박정희 대통령이 유혁인 수석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유 수석, 요새 젊은 교수들 가운데 상당수가 나를 독재자로 비난하고 있는데 그런 용기있는 교수가 부산에 있다니 J 교수를 청와대로 한번 초대해서 얘기 좀 들어 봅시다."
  
  유혁인 수석은 J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박 대통령의 뜻을 전하고 만나는 날자까지 잡았다. J 교수가 약속한 날 저녁 청와대에 도착하니 서울대학교 P 교수도 와 있었다고 J 교수는 후일 밝혔다.
  
  박 대통령은 저녁 밥상의 반주로 막걸리를 들며 J 교수와 P 교수로부터 국가 경영과 정치 발전에 대한 얘기를 열심히 듣더라고 했다. 특히 박 대통령은 J 교수에게 "요즘 젊은 학자들이 나를 독재자라고 비난하는데 J 교수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습니까?" 물었다.
  
  J 교수는 "각하 그것은 저 개인의 견해가 아닙니다. 미국 하버드대학교의 유명한 경제학자인 '로버트 배로' 같은 석학(碩學)들의 주장을 제가 전달한 것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내용은 작고하신 J 교수가 생존시 들려 준 이야기를 필자가 정리한 것이다. J 교수는 정치학계의 태두(泰頭)이자 '정치발전론(政治發展論)'의 저자이기도 한 정희채(鄭熙彩) 박사다. 정희채 박사의 저서 '정치발전론'은 정치학도들의 필독서이다. 정희채 박사는 국회의원과 교육부차관, 서울시립대학교 총장 등을 역임하고 4년 전 별세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유혁인 정무수석이 인재(人材)를 찾아 세미나장에까지 찾아갔다는 사실을 오늘의 정치 지도자들은 본받았으면 좋겠다.
  
  정희채 박사의 '정치발전론'과 앞서 소개한 발언 요지는 2004년 9월15일 신지호 전 의원이 동아일보에 발표한 '집권세력의 자학사관(自虐史觀)'에서도 인용한 바 있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