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도둑>
  
  법원장 출신의 아는 사람이 큰 로펌의 대표로 들어갔다. 그가 어느 날 만난 내게 이런 말을 내뱉었다.
  
  “요즈음은 로펌이 사건을 따는 것도 공개 입찰인 것 같아. 내가 자료를 만들어서 재벌 회장들 앞에 가서 브리핑을 해야 해. 어떤 문제점이 있을 수 있고 어떤 법적 해결 방안이 있는지가 핵심이지. 이미 자기들끼리 다른 로펌에 맡기기로 정하고도 부르는 수가 있어. 그런 때는 완전히 헛삽질하는 거지.”
  
  재벌 기업들은 그렇게 고도의 법률 지식들을 돈을 들이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 같았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삼십년 전 혈기 왕성하던 중견 변호사 시절이 떠올랐다. 이름있는 재벌회장 측에서 사건 기록을 가져다주면서 검토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밤 늦도록 기록 한 장 한 장을 꼼꼼히 읽었다. 회장은 자신의 기업들을 권력에 빼앗겼다고 했다. 판례를 찾아보고 논문도 들추어봤다. 그리고 정보기관에 근무하면서 기억했던 그 기업의 이면도 떠올려보았다. 나의 의견을 담은 서류를 만들었다. 두 번을 보고 세 번을 보면서 나름대로 시선이 가도록 파란 줄도 치고 정성을 들였다. 재벌 회장의 저택에서 보고를 해달라는 말이 왔다. 서울 시내의 요지에 넓은 잔디밭을 가진 재벌 회장의 저택으로 갔다.
  
  그는 큰 집에 가정부와 커다란 셰퍼드 한 마리와 함께 혼자 살고 있었다. 부자가 망해도 삼대가 간다는 말이 있듯이 회장은 기업을 빼앗겼어도 아직도 부동산 부자라고 했다. 회장에게 보고서를 건네고 설명을 마쳤을 때였다.
  
  “들을 만한 정보도 있네. 수고했어요 돌아가 봐요.”
  
  회장은 그 말뿐이었다. 뭔가 이상했다. 남의 시간을 빼앗았으면 돈을 주어야 했다. 그런데 그런 인식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회장의 심부름을 온 사람도 어떻게 수고비를 지급한다는 아무 언급이 없었다. 그러다 깨달았다. 사건을 유치하려는 수많은 로펌에서 공짜 브리핑을 하고 갔을지도 몰랐다. 내가 그 사건을 맡을 가능성은 애초에 없었다. 그들은 다만 내 의견을 참고로 한번 들어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입장은 달랐다. 나는 시간을 파는 프라이드를 가진 전문인이었다. 그냥 가면 바보가 될 것 같았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회장에게 말했다.
  
  “이건 아니죠. 저는 변호사로서 제 시간을 팔았습니다. 그러면 그 값을 치르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순간 회장의 얼굴에 불쾌한 표정이 일면서 내게 물었다.
  
  “내가 지금 치과에 가야 하고 지갑에 돈이 없는데 얼마를 드리면 되겠소?”
  “내가 노동한 시간만큼 주세요. 변호사 경력에 따라 시간당 공정가격이 있습니다.”
  
  그는 돈을 줄 의사가 전혀 없어 보였다. 한 마디 안 하고 가면 나중에라도 마음에 찜찜한 게 남을 것 같아 말했다.
  
  “회장님 이렇게 살지 마십시오.”
  나는 그가 디킨즈의 소설 속에 나오는 스크루지 영감같아 보였다. 인색한 부자는 마음도 추운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뭐 어떻게 살길래?”
  회장이 퉁명스럽게 말을 받았다.
  
  그 집에서 나오면서 나는 그를 시간 도둑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수만 명이 되는 직원들이나 공장 노동자의 시간을 절취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다 보면 수많은 시간 도둑들이 찾아왔다.
  
  시간을 판매하는 변호사인 나에게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시간을 빼앗았다. 법률상담을 한다고 와서 하루 종일 눌러붙어 묻고 또 묻는 목사도 있었다. 법률상담을 온 것이 아니라 놀러 온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하나님은 사람마다 일정한 분량의 시간을 주셨고 그 시간은 장사하는 사람들의 본전과 같은 게 아닐까. 한 해 한 해를 보내면서 많은 큰 일을 했을 수도 있고 시간을 소홀히 해서 장사꾼이 본전을 손해 본 것과 같을 수도 있다. 젊어서는 시간보다 돈이 귀한 것 같았다. 그래서 돈에 많은 시간을 값싸게 팔았다. 나이를 먹으니까 시간이 돈보다 훨씬 귀중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이 주신 시간을 잘 활용해 이익을 남긴 장사가 되었어야 하는 데 내 삶은 어땠는지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