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역의 밤이 되고 지하철이 끊기면 노숙자들이 여기저기 잠자리를 준비한다. 모르는 척 하고 국가가 주는 집이다. 젊은 노숙자 한 명이 벽에 있는 광고판의 귀퉁이를 살짝 들어 열더니 그 안턱에 놓여있던 낡은 공책 한 권을 꺼냈다. 그는 역사(驛舍) 구석의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몽당연필로 그 공책 안에 뭔가를 쓰고 있다. 유심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이 조용히 다가가 뭘 쓰는지 묻는다.
  
  “감사 일기요. 오늘 하루에 감사했던 세 번을요.”
  
  노숙자가 절망하지 않고 감사 일기를 쓸 수 있는 것일까? 어젯밤 보았던 영화 속에 나오는 한 장면이었지만 잔잔한 감동의 물결이 마음 기슭을 건드렸다. 노숙자이면서도 감사할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어떤 도의 세계와도 통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역의 지하철 2번 출구를 나오면 여러 명의 노숙자들이 내려 쬐는 햇볕을 받으면서 시간을 죽이는 모습들이 보였다.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어떤 말을 하는지 보고 들으면서 걸은 적이 여러 번 있다. 대부분이 쓰레기 같은 내용들이었다. 그런 속에서도 광장 구석에서 성경을 펴놓고 읽는 노숙자를 본 적이 있다. 몽당연필에 침을 묻혀가며 성경에 줄을 치며 공부하고 있었다. 성경을 보는 그의 표정은 덤덤해 보였다. 배고프거나 어떤 환경 속에서도 잘살 것같이 보였다. 그의 내면이 어떤지 궁금했다. 그는 행복할까? 정말 영적인 빵을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것일까. 남산쪽에서 명동성당 방향으로 내려오다 길거리 한 모퉁이 벽에 적힌 글이 지금도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빌어먹을 힘만 있어도 그건 축복입니다.’
  
  그 글을 보면서 처음에는 속으로 비웃었다. 밥을 구걸하면서 노숙자로 살기보다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나의 잣대로 판단했었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한 사형수로부터 간절한 내용이 담긴 편지를 받은 일이 있다. 그는 사형이 확정된 후부터는 죽음을 정면으로 받아들이자고 결심했다고 했다. 매일 아침 찬물로 몸을 깨끗이 하고 주위의 재소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갈 거라고 했다. 그가 각오한 사형집행이 하루하루 미루어지고 김영삼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사형수들 사이에 의견이 갈라졌다. 단호하고 결단력 있는 대통령이 사형수들 모두를 죽이고 끝을 낼 것이라는 의견이 있었다. 또 다른 의견도 있었다. 신앙인인 대통령이 설마 사형을 집행하겠냐면서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러나 그는 불안했다. 엉터리로 하더라도 뭔가 정부에 청원서를 내면 그 절차가 끝날 때까지는 죽이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절벽을 건너가던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벼랑에 걸린 줄을 잡고 생명을 유지하는 그런 모습이라고 할까.
  
  사형수들의 기대와는 달리 천구백구십칠년 십이월 삼십일 그동안 미루어져 왔던 사형을 일제히 집행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평소 죽음에 대한 각오를 했지만 막상 그 시간이 닥치니까 그의 머리 속이 하얘졌다. 본능적으로 살고 싶었다. 그날 교도관 두 명이 그의 감방으로 찾아왔다. 그는 온 몸의 힘이 빠졌다. 다른 사형수들도 정신을 잃고 몸이 뻣뻣하게 굳어져서 교도관들이 양쪽에서 팔을 잡고 물건같이 끌고 갔다. 교도관이 그를 보고 말했다.
  
  “당신은 오늘 집행에서 제외됐습니다.”
  
  그가 법무부에 제출한 청원서의 처리 절차 때문에 그는 죽음이 잠시 지연된 것이다. 그는 내게 무기징역만 받아도 행복하겠다고 했다. 목숨만 붙어 있다면 평생을 감옥 안에서 살아도 감사하면서 좋은 일만 할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그를 보면 노숙자들도 감사할 일이 참 많을 것 같았다.
  
  존재하고 있었다. 걸어다닐 수 있다. 복지사회에서 정부에서 주는 돈으로 밥을 먹고 옷을 입고 자기가 원하면 잠을 잘 집에도 들어갈 수 있다. 성경을 읽을 수도 있다. 신문사 사장을 지낸 선배가 세계적인 여론기관이 조사한 통계라면서 내게 카톡으로 이런 내용을 보내왔다. 만약 먹을 음식이 있고 입을 옷이 있고 잠을 잘 집이 있다면 그 상태가 어떠하든 그 사람은 복 받은 사람이다. 인류의 이십오 퍼센트만이 그런 환경을 누린다. 만약 한 달을 여유있게 보낼 생활비가 있고 오늘 얼마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돈이 있다면 그 사람은 복 받은 사람이다. 오직 전세계의 팔 퍼센트만이 그런 환경을 누린다. 만약 그가 속한 나라가 전쟁중이 아니며 갑자기 끌려가 고문을 받거나 기근으로 목숨이 위태한 상황이 아니라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지금도 오억명이 그런 위험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을 수 있고 기도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세상의 삼십 퍼센트의 사람들이 여전히 성경을 구할 수 없고 더 많은 사람들이 잠깐의 기도도 목숨을 걸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자료를 보면서 노숙자도 매일 감사 일기를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이 들끓는 사회에서 왜 모두 불행할까. 인생의 황혼에 바닷가에서 글을 쓰는 나는 낙원에 와 있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