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 프로그램 같은 유전자>
  
  수십 년 동안 대치동에서 입시를 지도해온 일타강사 출신 부자 회장의 이런 얘기를 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명문대학은 학원 다닌다고 되는 게 아니예요. 아버지 엄마의 고등학교때 성적이나 아이큐 검사표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어요. 자기들은 공부를 못해놓고 아이는 닦달하는 부모를 보면 이해할 수 없어요. 다 유전자에 정해져 있는 건데.”
  
  수십 년 대입 전문가인 그의 의견이 일리가 있었다. 좋은 대학도 물려받은 유전자가 있어야 할 것 같다. 우리가 소년일 때 선생님들은 ‘운명아 비켜라 내가 간다. 하면 할 수 있다’라는 표어를 주면서 우리들을 몰아쳤었다. 돌이켜 보면 될 놈은 되고 안될 놈은 안된 것 같기도 하다.
  
  그러면 공부 유전자만 좋으면 되는 건가. 나는 ‘공부 잘하는 바보’들을 많이 보았다. 최고 명문대 교수인 친구들이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걸 들었다.
  
  “학생들이 싸가지 없는 데 정말 질렸어. 철저하게 자기 중심인 아이들이야. 자기 이익 외에는 보이지 않아. 소통도 안 되고 남의 입장이 되어 보거나 배려할 줄을 몰라. 그냥 공부만 잘해. 사회에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 어제는 여학생 아이들이 말끝마다 부끄러운 줄 모르고 ‘존나 존나’ 하길래 좆이 뭔지를 알려줬어.”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대를 나온 칠십대 부인으로부터 얼마 전 이런 말을 들었다.
  
  “우리 시절 문리대에 여학생 스물여덟 명이 있었어요. 모임을 만들고 평생을 만나고 있어요. 그런데 내가 느끼는 건 거의 다가 세상 사물에 대해 부정적이고 비평적이예요. 철저하게 자기 앞만 보는. 시야가 좁은 사람들이예요. 인생을 살아보면 이류대 삼류대를 나온 사람들이 훨씬 성공하고 잘사는 것 같아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지능이 높은 것과 인간이 양질인 것과는 다르다. 변호사를 하면서 내가 만난 범죄인 중에는 천재같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 비상한 머리로 주가조작을 하고 기업을 인수했다. 엄청나게 정교한 사기 조직을 만들기도 했다. 비상한 머리로 완전범죄들을 구상하는 걸 봤다. 사탄들의 머리도 좋았다. 그러나 그들의 마지막이 행복은 아닌 것 같았다. 감옥이거나 아무도 없는 방에서 목을 매단 채 허무하게 죽어 있기도 했다. 그들의 유전자 속 높은 지능이 차라리 저주 같았다. 그들은 천재와 짝퉁인 저질 상품이었다.
  
  심성까지 갖춘 특품의 유전자를 가진 인물도 봤다. 나와 친한 고교 선배의 경우다. 그는 대법관인 아버지의 유전자를 받은 것 같다. 서울법대를 나오고 사법고시에 수석 합격했다. 판사시절 독일유학을 갔다. 이년 만에 학위논문을 통과하자 독일인 교수들은 그의 천재성에 놀라면서 독일에 남아 교수를 하라고 권했었다. 그는 온유하고 소박한 성품도 물려받았다. 대법관인 그의 아버지는 법조계의 신화였다. 검은 고무신을 신고 양철 도시락에 밥을 담아 전차를 타고 법원에 출근했었다. 아들인 그는 내가 세를 살던 아파트의 위층에 살았다. 중견법관인 그의 집에는 낡은 흑백텔레비전이 끝까지 버티고 있었다. 세상이 모두 컬러텔레비전을 놓고 보던 시절이었다.
  
  그는 듣는 재능도 유전자를 통해 받은 것 같았다. 법정은 물론 사석에서도 다른 사람들의 말을 귀담아들을 뿐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꼭 필요한 경우에만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하면서 핵심을 말했다. 그는 한국사회 거물급들의 재판장이면서도 공손하고 정중했다. 그러나 결론은 확실하고 공정했다. 그는 정치공작에 대해서는 흔들리지 않고 사법부의 중심을 잡는 판사였다. 그런데 명품 중의 명품에 속하는 인간도 예상대로 성공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신(神)은 그가 모략에 걸려 벌거벗긴 채 진창에 뒹굴게 한 후 법원을 떠나게 했다. 예를 들자면 이회창 대법관이 그 비슷한 사례 같았다. 대선 당시 이회창 후보의 당선은 거의 확실한 분위기였다. 투표 직전 갑자기 그 아들이 병역을 기피했다는 가짜 뉴스와 가짜 증인이 등장했다. 진실은 바로 확인됐지만 수사 결과 발표를 지연시키는 검은 손이 뒤에 있었다. 정치공작의 냄새가 진동했다. 마지막 순간 그는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인간 명품이 꼭 성공하는 건 아니었다. 내가 아는 명품선배도 그 비슷한 경로를 밟고 대법관이 되지 못했다.
  
  법원을 나온 그 선배는 삶을 즐기는 것으로 인생궤도를 수정했다. 그는 스키를 좋아하게 됐다. 놀이에도 집념이 대단했다. 시베리아부터 남미 최남단 도시 푼타아레나스에까지 가서 스키를 탔다. 그는 집에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미 유명출판사에서 한 권이 나왔고 다음 편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며칠 전 만난 그에게 물었다.
  
  “법쟁이가 문학을 만나니까 어떻습니까?”
  
  “포에틱 저스티스 그러니까 ‘시적(詩的) 정의’를 생각하게 됐어. 판결문 중에 한 줌의 철학을 짧은 시적 문장으로 만들어 담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했지. 우리나라 판사들이 아직 거기에 눈을 뜨지 못한 것 같아. 그걸 알려주는 소설을 쓰고 싶어.”
  
  간단한 말이지만 의미가 깊었다. 신은 인간의 계획을 깨뜨리고 그가 원하는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 같다. 신은 어떤 때는 그가 미워하는 존재에게 더 높은 자리와 많은 돈을 주어 공중 높이 들어올리기도 하는 것 같다. 그게 성공이고 축복만은 아닌 것 같다. 공부 유전자는 절대자가 심어둔 조그만 보조 프로그램에 불과한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