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용맹으로 여자 혼자서 산에 가나?>
  
  1. 어제 조선일보에 이런 기사 제목이 있었다.《대낮 신림 등산로서 성폭행…2시간 전 집에서 출발해 어슬렁》서울의 한 공원 근처에서 대낮에 여자를 때리고 성폭행 한 자에 관한 기사인데 피해자는 생명이 위독하다고 한다. 내가 좋아하는 무학산에서도 저런 성폭행 살인사건이 있었으니 남의 일 같지가 않다. 게다가 나는 사형집행 재개를 조르는 사람이니 저런 자부터 사형시키기를 원한다.
  
  그런데 말이다. 제목에 “집에서 2시간 전에 출발해 어슬렁”이란 말은 왜 넣었는지 이해가 안 된다. 2시간 동안 어슬렁거리며 범행 대상을 물색했다는 느낌을 주는 표현인데 사실과는 다르다. 2시간 동안 어슬렁거린 것은 사건과 인과관계가 없고, 범의를 품고 어슬렁댄 것으로 드러나지도 않았다. 그냥 어슬렁거렸을 뿐일 것이다. 이것을 성폭행과 연결해 버렸으니 자칫 어슬렁거리는 사람은 무언가 나쁜 일을 할 사람으로 인식되게 돼 버렸다. 약 30년 전에 길을 묻는 척하면서 어린이를 유괴해간 사건이 있었다. 그러자 어른이 길을 물으면 어린이들이 달아나버리는 웃지 못할 사태가 벌어졌었다. 이 일처럼 '어슬렁거렸다'는 기사 제목 때문에 어슬렁거리는 사람은 요주의 인물로 대접될 것 같다.
  
  어슬렁거리다와 소요(逍遙)는 조금 차이가 있는 말이기는 하지만 결국 같은 의미이다. 소요는 어떤 목적도 없이 이리저리 어슬렁거리는 것을 말한다. 우리 세대는 '빨리빨리' 세대이다. 이젠 이 세대에게도 어슬렁거리거나 소요하는 여유가 있어야 하겠다. 장자(莊子)는 소요에다가 논다는 뜻인 유(遊)를 보태서 소요유(逍遙遊)라 하고 ‘장자’의 첫 장 제목으로 삼았다. 어슬렁거림의 미학을 개척했던 것이다. 이러한데 굳이 어슬렁거림을 나쁜 일에 끌어다 쓴 것이 입맛을 쓰게 한다.
  
  나는 무학산에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올라간다. 한 번은 귀신에게 쫓기는 양 달리듯이 올라가고, 한 번은 이러저리 배회하며 길가의 온갖 것을 보고 즐기며 천천히 올라간다. 이름 모를 산유화를 사진 촬영하기도 하고, 청솔모가 놀라 나무에 뛰어 올라가면 “내가 너한테 뭐 어쨌기에 그리 놀라니?” 하기도 하고, 아카시아 나뭇잎에 “넌 왜 그렇게 생겼니?” 물어도 보고, 산새가 지저귀면 “너. 노래를 잘하는데 줄리아드 스쿨을 나왔니?” 하며 묻고 서있기도 한다. 또 멋있는 바위 위에 올라가서 좌선을 하기도 하면서 애써 시간 가는 것을 잊는다. 이런 것을 불가에서는 포행(布行)이라 한다고 들었다. 포행은 좌선하는 중간에 잠깐 걷는 것을 이르는 말인데, 가볍게 산책하는 것과 소요하듯이 걷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이렇게 산길에서 어슬렁거리기를 좋아하는 내가,《…2시간 전 집에서 출발해 어슬렁》이란 기사 제목에 왜 신경이 쓰이지 않겠나? 이제 산에서 어슬렁거리면 여부없이 범죄자로 의심받게 돼 버렸다. 어슬렁거림이 나쁜 일도 아닌데 어슬렁거리는 것도 조심해서 해야만 하게 된 것에 억울한 감정이 든다. 산에서는 누구나가 어슬렁대며 경치를 내려다보고 호흡도 가다듬는데 말이다.
  
  2. 전국적으로 떠들썩했던 무학산 성폭행 살인사건은 2015년에 있었다. 여자가 변을 당한 장소도 이번 사건처럼 등산객의 내왕이 많은 길가이며 주된 등산로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사고는 이렇게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장소에서도 일어난다. 그리고 언론에 크게 보도되지는 않았지만 마산 반룡산에서도 혼자 등산 갔던 여자가 성폭행 당하고 죽은 사건이 있었다. 마산만 하더라도 산에 혼자 갔다가 당한 사고가 소문난 것만 해도 벌써 두 건이다. 이러한데 산에 왜 여자가 혼자 다니는지 여자에게 물어보고 싶다.
  
  모든 종교는 “죄 지을 기회를 피하라”고 가르친다. 마찬가지로 여자가 산에 혼자 가지 말아서 사고를 당할 기회를 피하는 것이 최고의 예방책이지 않겠나? 이렇게 말하니 혹자는 “그럼 여자는 혼자서 등산도 가지 말라는 말이냐”고 반론할 것이다. 그렇다. 세상이 아무리 밝더라도 조심은 스스로의 몫이다. 나는 덩치가 좀 있어서 거구에 속한다. 이런 나도 혼자 산에 갈 때는 호신 도구를 지니고 가는데 그래도 으스스할 때가 많다.
  
  등산도 좋지마는 여자가 혼자서 산에 가는 것은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이는 민주주의와는 아무 관계가 없고, 남녀평등과도 관계없는 말이며 다만 자기 안전은 자기가 먼저 챙겨야 된다는 말일 뿐이다. 치안이 아무리 잘 돼 있더라도 치안 그 너머의 안전은 본인이 애써야 한다. 여자 혼자서 산에 갔기에 악한을 만난 것이지 최소한 두 명이 짝을 이루어 갔다면 불행을 당했겠나?
  
  70년대에 일본에서 있었던 일이다. 미군 부대 PX 안에서 새벽에 일본인 여자가 술에 취해 있다가 미군에게 성폭행 당했다. 이때 일본인 관계 장관이 “여자가 그 시각에 술에 취해 왜 거기 있었나”라고 일갈했다. 우리 같으면 어느 정치인이 저런 입바른 소리를 하겠나? 그랬다가는 여성단체가 들고일어선 끝에 목이 날아가거나 탄핵 당하고 만다. 여성의 안전을 지켜주지도 못하면서 여자이니 더 조심하라는 말도 못 하는 것이다.
  
  신문 댓글을 쭉 읽어보니 하나같이 범인을 죽일 놈이라고 썼을 뿐, “여자 혼자서 왜 산에 가나?”라는 불친절한 말을 한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여성에게 비겁한 친절을 베푼 것이다. 저것이 우리 국민 전체의 안전의식일 수 있다. 이에 나는 여성단체로부터 돌팔매를 맞을 각오와 안타까움을 담아 못난 글을 썼다. 피해자는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쾌유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