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명시 나의 경험>
  
  3개 나라 국경과 감옥을 거치며 천신만고, 사생결단 찾아간 모스크바 남조선대사관, 먼저 들어간 탈북 벌목공들을, 안 나가면 경찰을 부르겠어! 하며 쫓아내는 1992년 시대였다.
  그래도 연구원 출신이라고 1950년대 후반의 유명한 반북 망명 인사인
  허진 선생 쪽에 소개하기까지 며칠은 무주 고혼이었다.
  넥타이 맨 양복신사복 차림이었지만 지갑은 거지였다.
  낙심해서인지 면역력이 떨어져 감기까지 걸렸다.
  탈북 과정 나흘 동안 강 따라 내려왔어도 감기 한번 안 걸렸었다.
  아파트가 저기 보이는 공원 벤치에 누워 앓고 있는데
  고층 창가에서 나를 본 주민이 신고하여 구급차가 왔다.
  불법 체류자임이 드러날까봐 감사표시를 거듭하면서도 구급차에 타는 것은 거부하였다.
  
  3일 후 감기가 낫자 이제는 배가 고팠다.
  3일 굶으면 체면이고 뭐고 도둑질 안하는 자 없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도둑질하다 잡히면 절도죄보다 더 무서운
  생명을 잃을 수 있는 북송자가 될 것을 잘 안다.
  그래서 골몰하니 어느 쓰레기장을 지날 때 보이던 쵸르나 흘레브(검은빵) 생각이 났다.
  검은 빵은 맛이 없어 버리는 경우가 있다.
  어두워지면 아파트 쓰레기장이 조용하다.
  대신 어두우니 먹을 것을 찾기가 시간이 걸린다.
  그만 지나가는 러시아 여인에게 들켰다.
  겨우 대화나 하는 로어 실력이지만 말 뜻을 알아듣는다.
  (신사)가 뭘 뒤지냐고 물어 - 오해를 살까봐 -
  강도를 만나 다 털려(이건 거짓말) 배가 고파서…
  그러니 그 러시아 여인은 너무 안 됐다며 다짜고짜
  자신이 들고 있는 바톤 흘레브(긴 흰빵)와 칼파스 일부를 꺼내준다.
  내가 너무 고마워 쓰빠시보! 하며 무릅꿇고 감사하다고 표시하니
  저를 황급히 일으켜 세우고 꼭 안아주며 힘내라고 한다.
  낯선 남자를 포옹해주는 러시아 여인의 큰 젖가슴이 야릇하게 느껴졌지만
  아무튼 얻어먹는 주제에 감사하기 그지 없었다.
  서양사람들은 포옹하는 것이 깊은 인사임을 훗날 이해가 되었다.
  
  며칠 후 남한 대사관에서 소개한 허진 선생이 안배한 곳에 있게 되었다.
  10일도 안되어 또 다른 탈북자를 보내 와 함께 하게 되었다.
  망명시 처음 만난 탈북자이다.
  신통하게도 내가 있던 평남도 은산군 내의 성산광산 출신으로서
  제대된 후 건설공으로 소련에 왔다고 한다.
  돈벌이로 자유주의하다 세 번 잡혔지만 매번 탈출하였다고 하는 이진호이다.
  동료가 생겨 고독하지 않아 좋겠다 했는데 고독보다 더 무섭게 되었다.
  그가 모스크바 시내 구경을 하자고 하여 함께 나갔는데 -
  도둑질을 기 막히게 하는 것이다.
  이진호는 빠쫌(저거 얼마야?) 하며 물건을 가리키면
  판매원이 돌아보는 순간 과일을 주머니에 넣는다.
  뺘쫌 할 때마다 양쪽 주머니에 채워진다.
  시장에 나가서도 마찬가지였다.
  
  멋진 러시아 여자를 꼬셔 오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 중 아프카니스탄에서 남편이 전사하여 아이 둘 있다는 젊은 여인을 자주 데리고 왔다.
  혼자만 성 만족을 누리는 것이 미안한지 나에게도 소개한다.
  여자에게 문의하니 자기보다 내가 더 좋은 남자 갔다며 다와이!한다는 것이다.
  나도 한창 나이에 여자와 자 본 지 3년이 지나 본능은 불 같지만
  고기도 먹어본 자가 먹는다고 이성이 말을 안 듣는다.
  여자 관계는 그래도 조용해서 좋은데 이 친구는 애주가로서
  취하면 너무 떠들며 술 주정하는 것이 문제였다.
  반복되니 옆집 사람이 경고를 한다.
  경찰에 신고부터 안한 것이 다행이지만 재차 그러면 그럴 판이다.
  이러다 큰일 치겠다 해서 허진 선생에게 사정하여
  조용한 다차(별장)에 나가 있게 했다.
  마침 다차를 짓다 말았기에 건설도 해주는 겸 있게 되어 좋았다.
  그렇지만 또 문제가 생겼다.
  러시아 사람들은 개를 잡아먹지 않아 개가 눈에 많이 띈다.
  친구는 개를 잡아 먹겠다고 나선다.
  제발 제발 사정하며 말렸다.
  네가 훔치는 사과 한 알에 또 개 한 마리에 우리 목숨과 바꾸고 싶냐고?
  그러자 그는 야 야! 아무것도 없는 망명자가 이렇게 살지 어케 사냐!?
  
  조용한 다챠여서 좋은데 문제는 그 친구의 성욕을 푸는 것이다.
  자기 말로 160여 명의 여자와 자 보았다는 대 성욕가였다.
  숲 속의 별장이어서 어쩔 수 없으니 이번에는 타슈켄트에서 사귀었던 여자를 불러왔다.
  아이 달린 고려인 여성이었다.
  내가 그녀를 다칠까 봐 경계하지만(자기 같은 줄 아는 모양인 듯)
  미칠 듯한 성욕 문제가 해결되어 사고 치지 않게 되어 안심되었다.
  겨울이 닥치자 모스크바 추위로는 건축 일을 못한다.
  그는 여자가 있는 따뜻한 타슈켄트로 가자고 한다.
  거기 가면 돈벌이감도 많고 여사도 많다고 나를 설득한다.
  너같이 술 담배 않고 성실하면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여자의 조카 처녀를 모스크바에까지 불러와 소개하기도 했다.
  마음 같에서는 다 그러고 싶었지만 - 나의 오로지 목적,
  남한에 가는 것과 거리가 멀기에 참고 사양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나를 살리는 신의 한 수가 되기도 했다.
  조갑제 월간조선 편집장이 보낸 황성준 기자와 인터뷰를 하는 통해 연결된
  UNHCR(유엔고등판무국) 난민으로 첫 등록되어 남한에 오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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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이 열리자 가장 먼저 생각난 탈북동료 이진호로서 연락하였다.
  전화를 받는 것은 동거녀였는데 첫 마디가 그런다.
  <이진호는 모스크바에서 여기 오는 날 비행장에서 잡혔고 북한 측에서 죽였다>.
  왜 그런가 하면 자기와 동거 전에 여자가 있었는데 배은망덕하다고 고발하였고
  그것 때문에 경찰에 잡혀서 북송 과정 모스크바 북한대사관에서 도망,
  동거녀인 자신과 연계됨을 추적, 공항에 나타나자 체포했다는 것이다.
  북한 공관에 이송하였지만 도망 선수인 데다가
  비행기값이 아깝다고 외진 곳에 끌고 가 사살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선생님도 그때 우리와 함께 왔으면
  더불어 잡혀 북송될 뻔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살아났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