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 김연수는 일본제국의 중추원 참의란 직에 있었습니다
  
  나는 국립도서관 자료관에서 해방 후 친일파로 검거되었던 경성방직 사장 김연수의 재판기록을 읽은 적이 있다. 그는 일제시대 중추원참의, 만주명예 총영사로 임명된 적이 있었다. 80년이 지난 지금도 친일파에 관한 보도가 나오면 포승에 묶여 끌려가는 그의 영상이 대표적으로 흘러나오곤 한다. 그에 대한 재판은 어떤 것이었을까. 재판기록 중 기억에 강하게 남아있는 몇 장면을 소개한다.
  
  1949년 2월 16일 오후였다. 반민족행위 특별 검찰부에서 검찰관 심상준은 서기 장옥준을 입회시키고 김연수를 조사하고 있었다.
  
  “일제시대 중추원참의 등을 지낸 적이 있죠?”
  
  검찰관이 일제시대 관보를 증거로 제시했다.
  
  “무슨 구차한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런 직함을 가졌다는 사실만으로 민족에게 죄를 지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벌을 준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임명을 거부할 수 있지 않았나요?”
  
  “물론 그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제가 하는 사업을 포기하고 은퇴하거나 외국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건 회사의 4,000명 종업원들과 그 가족의 생명을 구하지 않는 행위라고 생각했습니다.”
  
  재판에 넘겨진 그를 위해 올림픽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를 대표로 하는 체육인들의 진정서가 법원에 접수됐다. 그 핵심 내용은 이랬다.
  
  ‘저희들은 반민특위의 조사가 인민재판식으로 “저놈 죽일 놈이다. 일정시대 무엇 무엇을 역임했다”하면 “옳소 죽여라”하는 식이 안 됐으면 합니다. 김연수가 일제가 주는 직책을 거부했더라면 그의 여러 공적으로 보아 그는 지금 애국자가 됐을 겁니다. 그러나 그가 그걸 거부하지 못한 것 자체도 일본놈들의 압제였다는 걸 아셨으면 합니다. 친일파 선정에서 옥석을 잘 구별해 주시기를 희망합니다. 친일파 처벌의 교수대에 오른 사람 중에는 김연수 같이 피가 있고 눈물이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음은 서울공대 학장 이승기를 비롯한 교수들과 기업계에서 그를 위해 낸 진정서가 있었다. 핵심 내용은 이랬다.
  
  ‘경성방직은 기미독립운동당시‘민족의 옷감은 우리의 손으로’라는 민족적 요청으로 창립된 회사입니다. 제품의 상표도 태극성이었고 사장부터 직공까지 대한동포만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일본인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과거 미 군정 삼년간 모든 생산 공업이 마비된 상태에서도 우리의 섬유업계가 운영된 이면에는 경성방직에서 배출된 한국인 기술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들이 참작되었으면 합니다.’
  
  
  1949년 6월 15일 서울 지방법원 대법정에서 마지막 심리가 열리고 있었다. 재판장은 서순영, 배석판사는 최국현, 최영환이고 담당 검사는 심상준이었다. 그 반대편에 변호사 김점석이 앉아 있었다. 담당검사가 논고를 했다.
  
  “피고인 김연수는 일본제국의 중추원 참의란 직에 있었습니다. 법 규정은 중추원 참의에 임명만 되어 있어도 친일파로 간주하게 되어 있습니다. 검찰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순영 재판장이 피고인 김연수에게 최후진술의 기회를 주었다.
  
  “저는 제 양심에 비추어 일제시대 우리 조선동포에게 어떤 악행도 한 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후 재판관들 사이에 범의나 행위가 없이 관직에 임명됐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처벌되는 게 맞느냐의 논쟁이 있었다.
  
  1949년 8월 6일 오전 10시 40분 법정에서 서순영 재판장이 판결이유를 말하고 있었다.
  
  “우리 재판관들은 민족주의와 반민족행위의 개념이 무엇인가 그 본질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삼일운동은 민족주의 사상과 정신을 체현한 것이고 그 선언문에 나오는 정치적으로는 자주, 경제적으로는 자치, 그리고 어떤 상황이 닥쳐도 민족의 긍지와 단결을 도모하면서 함께 죽고 함께 살자는 대의를 도모하자는 것이 대중화된 민족주의의 핵심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반민족행위란 반국가행위와는 다소 이념을 달리하는 윤리적 개념으로 파악했습니다. 일제시대 피압박민족으로서 대부분의 대중들은 모르는 바는 아니나 대의보다는 개인 자신을 보호하기에 급급했습니다.
  
  재판부로서는 우리 국민 모두가 먼저 엄숙한 자기반성과 냉철한 역사적 고찰에 입각해서 친일파를 정죄해야 할 것으로 봅니다. 친일파로 처벌해야 할 대상은 모든 사람들이 죽여야 한다고 입을 모아 저주하는 그런 사람에 한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동족을 박해했거나 희생시킨 사람, 민족적인 비극이 눈앞에 있는데도 적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자진해서 아부한 자에 한정하는 것이 법및 헌법의 취지에 맞다고 할 것입니다.
  
  중추원참의 등의 직책을 가진 사람을 친일파로 규정하는 법은 그런 지위를 가지고 있으면 반민족행위를 했을 개연성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피고인 김연수의 경우는 자유의사에 의한 취임이 아니었습니다. 주위 상황상 저항하기 어려운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반민족행위에 대한 범의를 인정할 자료가 없어 무죄를 선고합니다.”
  
  해방 후 친일파 재판을 하는 사법부의 철학과 역사관이 들어있는 판결문이었다. 그 시대를 살아보고 차별도 겪어본 판사들의 생각이었다. 지금의 시각에서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고 관념으로 말하는 사람들에게 그 판결문에 나타난 법 정신을 알려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