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판의 도박사들
  
  이제 덴버사령탑의 고민이 눈앞에 선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그것은 원인 모르게 혼수상태에 빠진 환자를 앞에 두고 치료 방법을 골똘하게 생각하고 있는 의사의 곤경과도 같았다. JDZ-Ⅶ-I는 죽어가고 있었다. 9월 29일의 종합 진찰에서 소생의 서광이 비치기는 했었다. 이 환자는 가느다란 소생력을 지닌 것 같이 보였었다. 그 여력은 어느 정도인가. 수술(산출시험)을 견딜 만한 정도인가. 더 정확히 알아보자. 그래서 천공시료 채취와 간이생산성 시험이 집중적으로 실시됐다. 이 테스트에 대한 환자의 반응은 만족스러운 것이 못됐다. 그렇다고 완전히 절망적인 것도 아닌 듯 했다.
  
  강심제나 알부민 등 보강주사(산처리)를 놓고 수술을 강행하면 살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이 보강주사약을 구할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것이다. 환자의 목숨은 경각에 달렸는데……. 덴버에서 보낸 DST준비작업 지침에 따르면 JDZ-Ⅶ-I의 생존 가능성은 한계적이라는 것이다. 서너 개의 두꺼운 사암층이 천연가스를 품고 있는 것은 틀림없었다. 공극률은 10∼12%로 약간 낮았지만 가스풀의 조건으로 낙제는 아니다. 지층 압력도 충분했다. 이 팽팽한 사암층에 구멍을 뚫어주면 지층 속 천연가스는 입구를 향해 치 닫을 것이다.
  
  문제는 이 입구가 막혀있는 것 같다는 데 있었다. 지층유체의 투과율(Permeability)이 낮은 것으로 밝혀졌던 것이다. 이 입구를 틀어막고 있는 것은 어느 놈인가. 제1원흉은 진흙 성분이었다. 이 퇴적층은 강바닥 또는 삼각주에서 퇴적된 것으로 많은 진흙이 사암의 틈 사이에 끼여 있었던 것이다. 둘째 원흉은 회분이었다. 이것도 사암층의 틈 사이에 끼여 공극 사이에 뚫린 유체 턴넬을 막고 있었다.
  
  세 번째는 갱정벽으로 침투한 이수였다. 천연가스를 못나오게 하기 위해 비중 높은 끈적끈적한 이수를 고압으로 사암층 湛?향해 밀어 넣었던 것이다. 이수엔 화공약품도 섞여 있었고 아교질의 인공 풀 성분도 들어 있어 가스층의 입구를 도배하여 밀봉해 놓다시피 했던 것이다. 이 세 놈의 수문장들을 처치하거나 녹초로 만들어 포로가 된 천연가스를 해방시키는 방법은 있었다. 먼저 이수를 완전히 빼 버리고 염화칼슘 용액과 중수를 구멍 속으로 부어 넣는다. 갱정벽에 박힌 이수 찌꺼기를 상당히 씻어낼 수가 있다. 뿐 아니라 이 상태에서 폭약을 쓰면 구멍이 사암층 속으로 더 깊숙히 뚫려진다.
  
  다음에 강산인 염산을 부어 넣는다. 입구를 틀어막고 있는 회분이 녹아 나오고 이수 찌꺼기도 홀랑 빠져 버린다. 필리핀의 남(南)니도유전의 경우, 이런 산 처리를 하기 전엔 산출이 안되던 유층이 산 처리를 한 직후 일산(日産) 3천 배럴의 기름을 펑펑 쏟아 놓은 적이 있었다. 이런 산 처리엔 특별한 기재와 원료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당장 구하기란 매우 힘든 것 같았다. 더구나 충분한 폭약마저 없지 않은가. JDZ-Ⅶ-I의 생명은 시한부인데 무작정 이들 기자재가 들어오기를 기다릴 수도 없는 몸. 이 보강주사를 놓지 않고 수술을 했다가 실패하면 약 20억원의 수술비만 날려버리는 꼴이 된다.
  
  1천만달러를 꼴아 박은 이 시점에서 깨끗이 손을 털고 일어나느냐. 3백80만 달러를 더 걸고 한번 큰 승부를 하느냐. 덴버 사령탑은 막판으로 몰린 노름꾼의 심리 상태에 빠져 있었다. 코암사(社)의 구성 멤버 이력을 훑어보면 이들이 모두 기막힌 한판 승부를 할 수 있는 저력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코암 사장 찰스 오는 필립스와 함께 맨 주먹으로 7광구의 조광권을 따내는데 일조를 한 사람이다. 그는 6·25가 한창이던 지난 52년에 한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갔다. 조지 타운 대학에서 국제법학을 전공한 다음 하와이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을 때 작은 석유회사를 가진 웬델 필립스 박사를 알게 됐다.
  
  두 사람은 70년에 한국에 와서 정부 고위층에게 7광구 설정을 종용했다고 한다. 그의 국제법 지식이 이때 큰 몫을 했을 것이다. 7광구를 당장 개발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광구권을 선포함으로써 주변 국가에 흥정의 미끼를 던져 놓는 것이 유리하다고 그는 설득했을 것이다. 필립스 박사는 7광구 조광권을 얻은 뒤 얼마 안 있다가 죽었다. 이 조광권은 해밀턴 브라더즈, 유니버스, 윅스 등 세 미국 석유회사에 넘어갔다. 7소구역 시추 직전에 다시 텍사코, 세브론, 日本石油開發이 참여, 6개회사의 공동 투자사업으로 변했다.
  
  찰스 오는 이들 회사가 만든 코암의 사장으로 뽑혔던 것이다. 해밀턴 형제가 설립한 석유회사는 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 바깥에서는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석유산업의 중소기업인 독립계 석유회사의 하나였을 뿐이다. 미국엔 독립계 석유회사가 약 4만에 이른다고 하니 해밀턴의 이름이 널리 알려질 턱이 없었다. 해밀턴은 북해로 진출했다. 71년 영국령 북해에서 알길 유전을 발견했다. 매장량 7천만 배럴쯤의 작은놈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세계 굴지의 대 석유 회사들이 판치던 북해에서 이뤄진 쾌거였기에 해밀턴의 대담성은 더욱 빛나는 것이 됐다. 이 도박에서 실패했다면 자금력이 약한 해밀턴은 회사의 존립 자체가 흔들리는 궁지에 몰렸을 것이다.
  
  해밀턴은 여세를 몰아 북해의 브루스, 크로포드해역에서 계속 시추를 하고 있다. 미국에서 사유 재산이 가장 많은 사람으로는 네 사람이 주로 꼽혀 왔다. 게티 석유사장 폴 게티. 휴즈 석유기재사 사장 하워드 휴즈. 이스트 텍사스 유전의 석유부호 헌트 형제. 그리고 다니엘 K. 루드빅. 이들 네 사람은 모두 석유에서 치부를 했고 게티를 제외한 세 명은 텍사스 오일 맨이다. 루드빅의 석유회사가 유니버스. 이 회사가 코암에 22.222%의 주식 투자를 하고 있다. 루드빅은 세계 해운업의 혁명아로 더 유명하다. 초대형 탱커 시대의 막을 연 개척자는 루드빅과 그리스의 라이벌 해운인 오나시스 및 니아코스 등 세 명이다. 이 세 명 중에서도 진짜 선구자는 루드빅이라는 것이 일본을 비롯한 세계 해운업계의 정설이다.
  
  세계 최대의 개인 탱커 선단을 갖고 있던 루드빅은 1955년 8만5천t급 탱커 유니버스 리더호를 일본에 발주했다. 이것이 초대형 탱커 시대의 개막을 알린 신호탄이었다. 2년 뒤 오나시스는 첫 10만t급 탱커를 발주했고 그의 적수 니아코스는 10만6천t급 유조선을 주문, 이에 대항했다. 루드빅은 화가 났는지 10만t급 탱커 4척을 한꺼번에 주문하여 상대방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다. 그때만 해도 슈퍼 탱커의 경제성에 의문을 가지는 해운인들이 많았으나 루드빅은 자신의 육감을 믿고 거대한 도박을 했고 대성공을 거둔 것이었다.
  
  루드빅의 모험정신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최근엔 아마존강 상에 성곽과 같은 수상 펄프공장을 만들어 띄어 놓고 있다. 굴착선을 닮은 이 쇳덩어리를 그는 일본 조선소에서 만들어 태평양을 횡단시켜 아마존강으로 끌고 왔었다. 무인지경의 밀림 속 강 위에 우뚝 떠있는 이 공장은 환상적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루드빅이나 해밀턴 형제와 같은 도박사들이 무턱대고 화투장을 던지는 것은 아니다. 최후의 패를 쓰기 전에 그들은 최대한의 정보를 수집한다. 과학의 힘이 한계성을 가진 석유개발이지만, 그 한계의 끝까지 가서라도 필요한 지질정보를 얻어 온다. 마감시간 직전까지 잡다한 정보를 수집했다가 그 시점에서 짜낼 수 있는 최선의 추리와 전망을 갖고 후다닥 기사를 갈겨쓰는 사건 기자처럼. 해밀턴의 덴버 본사에선 아직 마지막 카드를 던질 때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메스를 갖다 대기 전에 환자를 한 번 더 정밀진단 해 보기로 했다.
  
  10월 8일 백룡3호에선 코어 시료 채취작업이 진행됐다. 4천3백99m에서 4천4백7m까지 사암층에 코어 철관을 박았다. 이 철관을 뽑아 올렸더니 철관 속엔 지층의 단면샘플이 물려 있었다. 이 코어시료 조사는 굴진 중의 암석시료 분석이나 천공시료 검사보다도 훨씬 정확한 지질정보를 제공한다. 원형 그대로의 성질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로스차일드는 육안판정을 했다. 사암은 회색에 약간의 갈색을 띠었고 입자는 석영가루 등으로 돼 있었으며 돌비늘이 많이 끼였고 치밀, 단단하며 진흙 성분이 있고 공극률은 전무상태라는 것이었다. 사암은 너무 단단해서 망치와 끌로 두드려야 부서질 정도였다.
  
  로스차일드는 이 시료를 포장하여 즉시 헬기편으로 서귀포 기지로 보냈다. 서귀포에선 KAL편으로 부산에, 부산에선 굴착 상담역인 필로우가 기다리고 있다가 이 꾸러미를 받아 들고 로스엔젤스행 비행기에 올랐다. 하루 30만원씩 받는 고참 굴착 기술자가 우체부로 변한 것이다. 이 시료는 세브론의 석유분석센터로 보내졌다. 다우던은 당초 이 샘플을 항공화물편으로 보낼 생각도 했으나 이럴 경우 나흘이 걸린다는 얘기를 듣고 인편으로 부친 것이었다. 10일 아침 일기 예보 텔렉스를 읽던 다우던은 우거지상이 됐다. 또 태풍이 올라오고 있었다. 태풍 윈호는 무서운 소용돌이를 일으키면서 일직선으로 백룡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중심의 최대 풍속은 초속 60m나 됐고 영향은 반경 2백 50해리의 해상에 걸쳐 있었다.
  
  도리없이 다우던은 철수 명령을 내렸다. 세 번째 태풍 대피였다. 이번은 태풍 세기도 그렇고 직격 될 확률이 높으므로 12명만 남기고 모두 제주도로 대피토록 지시했다. 일기예보는 13일께 백룡3호가 태풍에 휩쓸릴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태풍권에 들기 전에 리그를 도망쳐야 한다. 11월 정오부터 굴착 파이프를 걷어올리는 작업이 시작됐다. 저녁 8시 30분까지는 모든 대피 준비 작업이 끝났다. 이튿날까지 86명의 승선자 중 72명이 헬기와 배편으로 제주도에 대피했다.
  
  태풍 일과후(一過後)
  
  어쨌든 시추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산출 시험기 자재는 싱가포르에서 하나씩 둘씩 김해공항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세방기업 직원들은 연일 야근을 해 가면서 이것들을 통관시키고 리그로 보내곤 했다. 산출시험 전문가들도 오고 있었다. 브라운 석유 기자재회사에선 14일에 기술자 알렌 프레데릭이 서울에 도착할 것이라 알려 왔다. 산출시험을 직접 리드할 핼리버턴의 프랑크 아이어 코트도 부산을 향해 오고 있었다. 기지의 한국 직원들은 3.5인치 철관의 선적 명령을 애태우며 기다리고 있었다. 이 철관이 리그로 들어가면 산출시험이 곧바로 시작된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태풍은 이처럼 숨막히게 돌아가던 시추의 리듬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았다. 리그의 태풍 대피작업으로 굴진이 중단되자 할 일이 없어진 기지는 느슨해지고 한산해졌다.
  
  정점을 겨냥한 질주의 모멘텀이 콱 꺽여버리는 기분을 나는 가졌다. 그것은 육감이었다. 기자생활 아홉 해 동안 갈아두었던 육감의 발동이었다. 대 사건이 터지기 직전의 불안스런 공기를 감지할 수 있을 만큼 단련됐던 육감이 그렇게 전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7인치 파이프를 싣고 갔던 자가호도 기지로 돌아왔다. 태풍 대피 작업 때문에 파이프를 리그로 부릴 수 없어 그냥 싣고 온 것이었다. 이것도 나에겐 불길한 징조로 포착됐다. 자가호의 선원들은 돈이 떨어졌는지 완월동이나 초량 텍사스촌으로 가지 않고 경비실에 모여 진로 소주를 경비원들로부터 얻어 마시고 있었다. 애띠게 보이는 스물 일곱 살의 필리핀 청년은 어둠 속으로 독일 선장이 외출 나가자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오늘밤에 누군가가 선장 놈 때려 죽여주었으면 좋겠다고 악담을 늘어놓았다.
  
  또 다른 말레이지아 선원은 한국 창녀들이 최고라고 음담패설을 뇌까리기 시작했다. 성병에 걸릴 위험이 적고 친절하다는 것이 최고의 이유였다. 이들은 창녀들은 배 위로 데리고 와 배설을 하곤 했으나 지금은 빈 호주머니가 원망스러울 뿐. 월급이 고작 3백∼4백 달러인 선원들이었다. 필리핀·인도네시아·말레이지아·싱가포르인들이 보급선의 하급선원 계층을 구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한결같이 독일 선장이 인종 차별을 한다고 불평을 쏟았다. 유럽 쪽에서 일하는 게 딱 질색이란 것이었다. 유색인종 차별이 없는 한국에서만 오래 오래 일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그들의 표정은 진지했다.
  
  선원들은 시추엔 관심이 통 없었다. 타국의 시추현장만 떠돌아다니다가 보니 유전 발견의 이익 분배에 자신들은 항상 소외된 신세임을 몸에 배일 정도로 느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기름이 나오든 가스가 분출하든 그것은 남의 일이었다. 나 이상으로 7소구역 시추에 관심을 쓰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정성엽씨였다. 그는 부산에 내려올 때마다 나를 찾았다.
  『아직 포항에 미련이 있습니까?』
  『있다마다. 더 깊이 뚫어야 돼요, 더 깊이.』
  
  『지난번엔 3천5백m까지 내려갔잖아요. 그래도 기름이 안비쳤죠.』
  『아직 저류층(貯留層)이 안 드러났어요. 그 깊이에선 좀 더 뚫으면 그린 타프(녹색 응회암)가 나타나게 돼 있어요. 그게 유층입니다. 그린 타프가…….』
  그는 포항 시추의 실패 이후 기독교 신자가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포항엔 더 뚫어봐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 동안 그는 늙어 있었다. 그러나 집념은 식지 않고 있었다. 서울 가는 길에 포항에 또 들려볼 것이라고 했다.
  
  『공동광구에서 실패하는 것은 안된 일이지만 우리 국민들에겐 다행일 것이오. 바다에서 유전을 못 찾으면 다시 육지에 관심을 들릴것이 아니겠오. 그때는 포항이 또 다시 각광을 받을꺼요. 조선생 그때 특종을 해요.』
  그는 포항을 다시 한 번 살리기 위한 자료 수집을 하고 있다고 했다. 포항에 열두 구멍이나 뚫었지만 그것은 석유가 안 나올 곳만 찾아 찌른 셈이란 것이었다. B 갱정에서 석유가 나왔지만 그것은 화성암 속에 약간 괴어 있는 것으로 자신은 처음부터 그건 문제가 안 된다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사실 정성엽씨는 75∼77년의 포항 2차 시추때는 핵심 역할을 하지 못했었다. 그의 형 장출씨가 시추 재개공작에서부터 지질분석 시추지점 선택에 이르기까지 중심 역할을 했던 것이다. 장출씨는 79년 가을 경북 의석 다인면에서 석유 시추를 다시 시작했다. 대구 흥구석유(주)의 사장 서주원 씨의 초빙으로 기술 자문을 해주었는데 최근엔 손을 뗐다는 것이었다. 의성은 중생대 백악기 퇴적층이 두껍게 발달해 있는 곳이다. 다우던이나 로스차일드는 모르겠지만 7소구역의 시추는 정성엽씨에게 힘입은 바가 적지 않았다. 65년부터 포항 시추가 정성엽씨의 주도로 떠들썩하게 진행되자 정부는 이 부근의 지질조사를 실시, 포항 육상부의 퇴적층은 동해로 뻗어 들어갔음을 알아낸다. 정말 두껍고 희망 있는 곳은 대륙붕에 있었던 것이다.
  
  해저 석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정부도 적극적인 자세로 해저석유개발 문제를 다루게 됐으며 7개광구가 선포되고 72년부터 해저시추가 시작됐던 것이다. 정성엽 혼자의 기여라고 하면 과장이 되겠지만 그는 자신을 내던짐으로써 해저석유를 부각시키는데 선구자적 역할을 한 것은 확실하다. 그의 어조엔 아직 그 정열이 스며 있었다.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 앞에선 웅변조가 된다. 부산엔 아직 그의 동지들이 많다. 연일유전개발(주)에 투자하여 재산을 날려버린 사람들이지만 그를 원망하지 않는다. 정씨가 부산에 오면 주로 이들 옛 동지에게 신세를 진다. 누렇게 바래진 포항석유 관계 신문 클리핑 첩을 아직도 보존하고 있는 서진택씨. 오늘의 화제는 사라진 기름 얘기다.
  
  『정형, 포항에서 맨 첨 기름이 나온 것은 75년이 아니라 65년 아닙니까. 그때 내가 비닐 봉지에 원유를 담았지요.』
  『분석의뢰도 기형이 했죠. 아마?』
  『내가 부산세관 분석실의 최과장에게 바로 들고 갔잖아요. 원유가 틀림없다는 거에요. 원통한 것은 그때 서류로 감정 결과를 받아 놓지 못한 것이지. 지금 말하면 누가 믿어 주어야지.』
  『그때만 해도 기름이 더 나올 줄 알고 대수롭게 생각하지도 않았잖아.』
  『누군가는 그 기름을 갖고 다니며 자랑한다고 신문지에 기름을 묻혀 불도 켜보이기도 했지요. 남포동 중앙동 다방들을 쓸고 다녔단 말에요.』
  
  좋았던 옛날의 얘기는 그칠 줄 모른다. 태풍 윈은 빗나갔다. 13일 윈은 방향을 바꿔 백룡3회 왼쪽 1백 해리에서 북상해 버렸다. 초속 20m의 강풍과 파고 6m의 물결이 일긴 했지만 백룡에 아무 상처도 주지 않았다. 13일 저녁부터 작업 재개 준비가 시작되고 있었다. 15일 헤플러는 다우던에게 새 작업지침을 통보해 왔다. 굴진은 현재 심도(4천4백86m)에서 끝낸다는 것이었다. 작업 재개 준비가 끝나면 곧장 검층 작업을 하도록 지시했다.
  
  『…우리 파트너(코암 회원사)들의 견해도 이만하면 뚫을 대로 뚫었다는 것이다. 전 번에 보내준 코어 샘플의 분석 결과가 나왔는데 사암의 공극률은 6∼8%, 투수율은 0.05md(Millidarcy : 투수율의 단위)이하이다. 아직 산출시험을 할지 안 할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마지막 검층 결과를 살핀 다음에 결정해야 할 것 같다.』
  투수율은 아무리 낮아도 1md 이상이라야 지층 유체가 바깥으로 나올 수 있다. 심도 4천4백m의 사암층이 이렇게 단단하니 더 뚫어 보았자 희망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었다. 이른바 경제적 기반암에 도달한 것이었다. 더 이상의 굴진은 포기했지만 산출시험을 포기하지 않았다. 최후의 최후 순간까지 밀고 나간뒤 결정을 하겠다는 태도였다. 한번 더 검층을 해 보겠다고 했다. 이 최종 검층이 끝나면 그 기록 테이프를 위성통신을 통해 최대한 빨리 덴버로 전송해 줄 것을 몇 번이나 당부했다. 도박사들은 아직 주사위를 던지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