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래 변호사를 추모하는 모임이 엮은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
  
  깊고 넓은 그의 그릇과 아름답고 애잔하던 그의 분위기, 상대방을 마음 편하게 해주면서 늘 인간과 자연의 동양적인 조화를 자신의 인격으로 소화한 것 같았던 그의 모습은 사라졌으나 이 유고집에서 우리는 그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 권인숙 씨는 그를 추도하는 글을 이렇게 끝맺은 바 있다. '길지 않은 삶이었지만 훌륭히 사셨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그동안 너무 감사했습니다.' 지난 십이월 십이일에 서울 명동의 와이더블류시엠 강당에서 있었던 그의 일 주기 행사 때의 장례식 때 모였던 사람들만큼이나 많은 이들이 모여 유고집의 출간을 기념하였다. 죽어서도 끊임없이 화제를 낳고 그리하여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서 살아 숨쉬는 이가 조영래 변호사인 것이다.
  
  <1992년 1월 샘이 깊은 물>
  
  구십년 십이월 십이일 마흔세살의 나이로 저 세상으로 간 조영래 변호사는 샘이깊은물 팔십육년 십일월호에 「당돌한 도전의 기록」이란 제목의 서평을 쓴 적이 있었다. 그 서평은 내가 쓴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란 책을 다룬 것이었다. 그 뒤 오년이 흘러 이제는 내가 그의 책을 두고 서평을 쓰게 되었는데 문제는 그 책이 유고집이란 점이다.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를 쓰면서 조영래 변호사와 밤을 새워가며 사형문제를 두고 토론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열렬한 사형폐지론자였던 그는 감방 생활을 하는 동안에 만났던 사형수들 이야기를 해주면서 나의 취재를 도와 주었고, 서평을 쓸 때는 '적당히 쓰지' 하는 나의 권유를 무시하고 일주일을 갖고 다니면서 다 읽고 난 다음에 비로소 평을 쓰는 그 특유의 철저함을 보였다.
  
  '조영래 변호사 추모를 위한 모임'에서 엮어낸 「조영래변호사가 남긴 글 모음-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둘 수는 없습니다」는 아주 재미있게 읽히는 책이다. 조 변호사가 생전에 남긴 글은 정확히 단행본 한권 분량으로서 그의 짧은 생애를 말해준다. '제일부 논설, 칼럼, 변론문'은 그의 사회적 활동을 보여주는 공적인 글이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조 변호사의 이미지를 그대로 반영하는 심각하고 뜨거운 글들이다. 그의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긴 무장은 구십년 칠월 십삼일 '동아일보'에 쓴 칼럼의 끝맺음이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하는 평범한 한 마디가 통일의 구십년대를 걸어나갈 우리의 좌우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공적인 글이 쓰여진 기간은 팔십오년부터이고 거의 구십 퍼센트는 팔십육년에서 팔십팔년 사이에 쓰여졌다. 이 세 해 동안 나는 조 변호사와 자주 만나면서 굽이치는 격동의 현장들을 같이 쏘다니곤 하였다. 최루탄 가스 자욱한 거리, 함석 가득한 광장에서 그때 조변호사와 함께 나누었던 분노, 희망, 그리고 좌절의 그림자를 그의 글에서 더러 발견하곤 한다. 연대순으로 배열된 그의 글은 그때그때 중요한 시국 사건들과 맞물려 있어 마치 현장의 역사책을 읽는 듯한 시각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한 시대의 문제와 온 몸으로 대결하면서 살았던 지식인의 기쁨과 고뇌가 여기에 있다. 나로서는 조 변호사의 생각이 변해간 과정을 그 글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어 신기하기도 하였다.
  
  팔십구년 초에 소련 여행을 하고 돌아왔던 조영래 변호사는 이런 글을 썼다.
  
  '소련 정부 관리 한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당신들은 어떻게 해서 뻬레스뜨로이까를 시작하게 되었는가.' 그 관리는 놀랍게도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중국이…한국이 또 좋은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우리의 뻬리스뜨로이까를 촉진했던 것이다.' 순간적으로 내 귀를 의심하면서 관리에게 되물었다. 한국이 대체 당신네 나라에게 어떤 모범을 보여 주었는가…우리나라가 소련 사회를 온통 흔들고 있는 저 엄청난 변혁에 무언가 영향을 주었다니, 참으로 충격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이 무렵에 조 변호사는 사석에서도 소련 이야기를 자주 꺼내 사회주의가 희망없는 제도임을 힘주어 말하곤 하였다. 그러나 조 변호사는 그런 생각을 공식적인 자리에서 솔직히 털어놓기가 힘든 인간관계에 놓여 있었고,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행동 범위 사이의 모순 때문에 적잖은 갈등을 겪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 유고집이 재미있게 읽히는 까닭은 그의 인간됨을 엿보게 하는 여러 가지 형식의 글들이 모여 있어 '인간 조영래'가 입체감을 갖고 나타난다는 점이다. '제이부 일기, 편지, 시', '제삼부 조영래에 관한 기사', 제사부 추모의 글, 추모 좌담'들은 영래의 공적인 모습에 익숙해진 사람들한테는 그의 사적인 모습, 어떻게 보면 그의 참모습에 더 가까운 얼굴을 아주 인간적으로 보여준다. 그가 복권된 뒤에 사법 연수원에 재입학하여 검찰청에서 사법관 시보로 일할 때에 쓴 일기에는 이런 대목이 있었다.
  
  '지금까지 충분한 실천은 못하였으나 사개월 동안 내가 준행하려고 하는 제일보는 피의자 또는 참고인, 가족들에게 친절히 대하는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라도 친절한 자세를 흐트리지 않도록. 어떤 경우에도 권력을 가진 자의 우월감을 나타내거나 상대방을 위축시키거나 비굴하게 만드는 일이 없도록.'
  
  이 작은 성실성이야말로 인간 조영래란 한 시대의 큰 나무를 키운 토양이었다. 그가 그런 다짐을 자신의 자연스러운 언행 습관으로 수양시키는 데에 성공하였음을 나는 한 목격자로서 증언할 수 있다. 조 변호사는 작은 절, 이름 없는 무덤, 잔잔히 흐르는 시냇물 같은 것들을 좋아하였다. 소담한 자연과 약한 인간에 대한 그의 애잔한 사랑은 유별났다. 이제 돌이켜 생각해 보면 자신의 생애에 대한 그 어떤 본능적인 예감도 있었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그의 시, 편지, 일기에서는 가끔 허전함과 스산함, 대로는 한 같은 것이 느껴진다.
  구십년 삼월에 미국에서 쓴 일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오늘 새벽 잠이 깨어서는… 사람들과의 인연을 생각하고, 지나온 일을 생각했다…. 대학 시절 문리대 도서관에서 책을 보던 무렵서부터 얼마나 긴 시간을 빼앗기고 이제 여기에 온 것인가. 공부를 할 기회를 얻기 위해 발버둥치던 일이 새삼 쓰라렸고, 아직 내 가슴 깊은 곳에 이런 한 같은 것이 응어리져 있구나 하는 자각. 유학이 아니라 마치 무슨 망명을 오듯 허겁지겁 사무실도 팽개치고 식구들과도 단절하고 떠나온 것이, 바로 이런 한에서였구나 하는 것을 새삼 선명하게 보게 된다. 내 마음이 그토록 바빴던가 하는 것도 알 듯 싶다.'
  
  조 변호사는 말년에 가서 시간을 넉넉하게 잡고 공부를 하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고 있던 것 같다. 이런 생각은, 사회의 현상에 깊이 개입하여 자신을 몰입시켜 나가는 일이 그 전처럼 마음 내키지 않게 된 것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맨 끝에 실린 추모 좌담은 조 변호사가 그려간 삶의 궤적과 인간됨, 그리고 그 비범한 삶의 의미를 아주 흥미있게, 그러면서도 본질적으로 드러내 주는 뛰어난 글로서 조영래를 종합적으로, 또 결론적으로 평가해주고 있다.
  
  좌담 참석자 네 사람은 조 변호사의 선배이자 인권 활동의 동반자였던 홍성우 변호사, 허물없는 친구이자 고교와 대학 동기생인 손학규 교수(서강대학교 정치학과), 학생 운동의 동지 장 기표 민중당 정책위원장, 그리고 사회자 역을 맡은 한양대학교 양건 교수로서 이들은 평소에 조 변호사와 가깝게 지낸 체험을 바탕으로 아주 실감 있는 인물 평가를 하고 있다.
  
  '이 모든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도 높이 사주고 싶은 것은 조변호사가 가지고 있던 인간적인 아름다움, 인간적인 멋이라고 생각합니다. 친구이지만 자랑스럽고 항상 경외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러면서도 늘 소탈하게 어울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주변의 삶에 대한 사랑 대문이었다고 봅니다. 조 변호사의 친구들을 보면 운동과는 전혀 상관 없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삶을 가장 평이하게 사는 사람들, 그런 친구들을 만날 대 마음이 편했다고 할까요. 어떤 자연스러운 삶 그 자체가 목표이고, 보람이라 느낀 듯했습니다.'(손학규)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어디에서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이. 조 변호사도 그런 사람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사람을 대하는 데 분노 같은 감정을 나타내지 않고 대할 수가 있는지 아주 대단한 경지인 것 같았어요… 그래서 참 대단한 친구구나 하면서도 조 변호사가 지금 세상을 뜨고 보니 이래저래 참고 참아서 쌓인 스트레스가 너무 많아서 암이 된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사람이 감정날 때는 욕도 좀 하고 성질도 부리며 사는 게 오래 사는 방법이다 싶고.'(홍성우)
  
  조영래는 지켜야 할 비밀을 무덤까지 가져간 사람이기도 하다. 「전태일 평전」의 숨은 지은이가 조영래이고 '김지하의 양심 선언'도 그가 쓴 것이라는 사실은 그가 죽은 뒤에 장기표 씨와 김지하 씨가 밝히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보통 사람이면 '자기 것'이라고 자랑함직도 한데 그는 전태일과 김지하의 이야기를 자주 꺼내면서도 전혀 어떤 내색도 하지 않았었다.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 역사에 손꼽히는 문헌 세 건(나머지 하나는 부천서 사건 권인숙 양 변론문)이 조영래의 작품이다. 시도 쓰고 한문에 밝으며 노래는 명창이고 육년의 도피 생활 중에는 '환경 공해 기능사 자격증'과 '보일러 기능사 자격증'을 따기도 했던 이 천재는 이 유고집을 통해서 우리들의 심금을 울린 명문장가로 떠오른다.
  
  깊고 넓은 그의 그릇과 아름답고 애잔하던 그의 분위기, 상대방을 마음 편하게 해주면서 늘 인간과 자연의 동양적인 조화를 자신의 인격으로 소화한 것 같았던 그의 모습은 사라졌으나 이 유고집에서 우리는 그가 남긴 향기를 맡을 수 있다.
  
  '향기 있는 인간' 조영래를 두고 권인숙 씨는 이런 말로서 추도사를 끝맺은 바 있었다.
  '길지 않은 삶이었지만 훌륭히 사셨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정말 그동안 너무 감사했습니다.
  
  지난 십이월 십이일 서울 명동의 와이더블류시에이 강당에서 있었던 그의 일 주기 행사 때는 장례식 때 모였던 사람들만큼이나 많은 이들이 모여 유고집의 출간을 기념하였다. 죽어서도 끊임없이 화제를 낳고 그리하여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서 살아 숨쉬는 이가 조영래 변호사인 것이다.
  <1992년 1월 샘이 깊은 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