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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민민주주의 세상입니까?>

2008년 여름경이다. 장대비가 퍼붓고 비 사이에 푹푹 찌는 날씨가 계속되고 있었다. 저녁 텔레비전 뉴스에서 연일 위원회에서 결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발표되고 있었다. 동인(東仁)문학상의 근원이 되는 소설가 김동인(金東仁)이 친일반민족행위자였다는 보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교과서에 나왔던 그의 작품 ‘감자’를 읽었던 생각이 떠올랐다. 일제시대 가난한 빈민의 삶을 고발한 문학작품이었다. 그가 쓴 ‘운현궁의 봄’도 중학생 시절 소설집에서 읽었다. 대원군을 조선의 메시아로 형상화한 좋은 작품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나의 머릿속에는 그의 ‘광염소나타’나 ‘광화사’도 들어있었다. 예술을 위해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넘나들며 목숨을 바치는 치열한 예술가의 삶을 제시하는 작품이었다.

자유로운 영혼이라면 그 소신에 따라 일본의 주장에 동조하는 부분도 있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말하는 ‘일본’이라는 단어는 추상이다. 온갖 잡다한 색깔의 이념과 사상이 그 안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일본공산당도 있고 전쟁의 원인인 군부정권도 들어있었다. 동시에 그들 중에는 자유사상가도 있었고 올곧은 철학자도 있었다.

1998년 2월 김대중(金大中) 정부가 발족한 다음달 3월13일 552만 명에 이르는 사면을 단행했다. 전에 빨갱이로 단죄된 사람들이 그 멍에를 벗었다. 노무현(盧武鉉) 정권이 이어지면서 친일파를 처단하자는 폭풍이 불었다. 특별법이 만들어지고 위원회가 탄생했다. 위원회에서 민족반역자로 결정이 나면 그들의 재산이 국고로 환수되고 있었다. 극우정권은 적을 빨갱이로 이름 짓고 좌파는 반동분자를 친일파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 

오후 2시경이다. 서초동의 변호사회관 지하 회의실에서 열린 대한변호사협회 이사 회의에 참석했다. 지하 회의장의 열기는 달아오를 듯 뜨거웠다. 오십대 말의 중견 변호사 한 사람이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변호사를 하던 그는 아버지가 남긴 중소기업을 운영하다가 학을 뗐다고 내게 얘기한 적이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중소기업 경영이라고 했다. 대기업 임원에게 머리를 굽실거리는 것도 힘들고 자체 노무관리도 고통이라고 했었다. 그가 흥분을 했는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발언권을 얻은 그가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저는 요즈음 민주주의를 말하면 먼저 어떤 민주주의냐고 묻습니다. 그러니까 조선인민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인지 소비에트식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유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인지 분명히 해달라고 합니다. 저는 자유민주주의만이 우리가 지켜야 하는 법치를 본질로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대의 급류가 우리의 삶을 관통하고 있는 것 같았다. 변호사들이 좌파와 우파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었다. 판사들도 정치적 성향에 따라 집단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우익적 성향의 대한변호사협회가 좌파 판사들의 집단적 조직적인 움직임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기 위해 소집된 회의였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지금 상황을 보면 법치주의가 무시되고 중국의 문화혁명(文化革命) 당시같이 무조건 낙인찍고 단죄하는 분위기가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습니다. 좌파정권의 위원회에서 친일파(親日派)로 낙인을 찍으면 역적이 되고 재산을 몰수당하는 세상입니다. 좌파 판사들은 그런 위원회의 결정을 무조건 기계적으로 지지하는 판결을 내놓고 있습니다. 이미 오래 전 법에 근거해 간첩죄로 선고된 죄인을 위원회가 민주화 인사로 결정해 버리는 세상 아닙니까?”

그의 목소리는 분노에 차 있었다. 독재정권 시절의 중앙정보부에서 조작해 간첩 누명을 씌운 사람들도 많았다. 권력의 시녀가 된 판사들 중에는 기계적으로 정보부의 명령에 따라 간첩으로 판결을 선고한 경우도 있었다. 그건 법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 법이라는 포장만 씌웠을 뿐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민주화 인사로 둔갑한 사람들 중에는 진짜 공산주의자도 대한민국보다는 조선인민민주주의 공화국의 깃발을 들고 싶은 사람도 많이 섞여 있을 것 같았다. 이어서 여러 변호사들의 의견 표명들이 있었다. 마지막에 대한변호사협회장 김평우(金平祐) 변호사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사법부의 판사들도 좌파와 우파로 갈리고 있습니다. 일부 판사들이 모임을 가지고 대법원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부장판사라는 사람이 언론에 익명으로 법원 내부의 문제를 보내 그대로 보도되게 함으로써 사법부를 흔들고 있습니다. 법원 내부마저 좌우로 분열되면 사법부는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대한변협은 성명을 내기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나는 삼십대 초부터 법원 뒷골목에서 개인법률사무소를 하며 세상을 살아왔다. 어린 시절 서민인 부모나 나는 험한 시대의 폭풍 속에서 허리를 굽힌 풀처럼 살아왔다. 국가에서 머릿속에 심어준 수신기에 권력층이 보내주는 일방적 메시지로만 세뇌되어야만 살 수 있는 시절이었다. 다른 생각을 가진다는 자체가 용납되지 않았다. ‘빨갱이’나 ‘친일파’는 마귀보다 더 나쁜 존재라고 인식했다. 반공포스터를 만들라고 하면 털이 부스스한 붉은 마귀의 손을 그려냈다. 친일파라고 하면 머슴을 괴롭히는 배뚱뚱이 지주(地主)영감이 떠오르곤 했다. 그래도 중학교 시절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잠시 배웠다. 그런데 현실은 숨 막힐 것 같은 독재정권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인 1972년 10월경이었다. 오후 역사시간에 국사를 공부하고 있는데 유신(維新)이 선언됐다. 갑자기 교실이 진공상태가 된 듯 조용해졌다. 순간 머리가 반백(半白)인 선생님의 씁쓸한 냉소는 지금도 기억 속에 낙인같이 찍혀있다. 선생은 아이들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었다. 자유민주주의는 잠시 책 속에서만 언급되던 화려한 장식품이었다. 북한도 김일성(金日成)의 세습독재정권이었다. 그들은 김일성을 민족의 태양인 어버이 김일성 수령님이라고 했다. 김일성은 북한 주민들에게 하나님쯤 됐고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세종대왕쯤 되는 임금님이었다. 유신을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인식하라고 해서 앵무새처럼 헌법조문을 외워야 했다.  영혼이 없는 좀비로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