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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수임>

정부의 법제처장실이라면서 전화가 왔다.
“엄상익(嚴相益) 변호사님이시죠?”
여성 비서의 부드럽고 세련된 목소리였다.
“그렇습니다.”
“처장님과 연결하겠습니다.”

이상했다. 인권변호사 출신인 법제처장과는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 다만 그의 독특한 행동은 얘기를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청와대에서 차관들에 대한 임명장을 수여할 때였다. 대부분의 차관 부부들이 청와대 비서실의 지시에 따라 새벽부터 가서 기다리고 있었다. 고위관직이 소망이었던 그들에게는 일생의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들인지도 모른다. 대통령 비서실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그런데 법제처장 예정자인 이석연(李石淵) 변호사만 아홉시에 혼자 느긋하게 오더라는 것이다. 청와대의 업무시작이 아홉시면 그때 오면 되는데 왜 일찍 불러 군기(軍紀)를 잡느냐는 게 그의 뜻이었다고 한다. 그는 국회나 언론에 대해서도 거침이 없었다. 소신과 입장을 자유롭게 내뱉는 자유인이었다. 잠시 후 전화 저쪽에서 법제처장이 나왔다.  

“엄 변호사님 안녕하세요, 월간조선(月刊朝鮮)에 쓰시는 글을 종종 읽고 친숙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한번 저녁시간을 내 주시죠.”

혼자 법률사무소를 하면서 나는 이따금씩 세상에 나의 의견을 내보내기도 했다. 사건을 처리하면서 세상이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때 그 내용을 글로 적어 시사 잡지나 주간지 일간지 등에 기고해 왔다. 그때그때 법정에서 또 세상에 대해 말과 글로 참여하는 것이 시민의 의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며칠 후 삼청동 뒷골목의 소박한 한옥의 밥집 건넌방에서 법제처장을 만났다. 깡마른 작은 체구에 강인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것 같은 태도로 마음의 창을 활짝 열어 젖혔다.

“저는 1981년 행시(行試)에 합격하고 법제처 사무관으로 있다가 보병 5사단 정훈장교로 갔었어요. 하루는 번쩍거리는 붉은 별판을 단 장군차가 지나가는데 경례를 하지 않았죠. 그게 괘씸죄로 걸려서 영창에 갈 뻔했어요. 군인들이 득세하던 시대였죠. 저는 군에 있으면서 다시 사법시험을 준비해서 합격했죠. 제대하고 뒤늦게 사법연수원을 마치고 다시 법제처 사무관으로 갔어요.”

그의 말을 들으면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절 사법고시에 합격하면 대개 판사가 됐다. 판사의 대우는 인기 없는 법제처 사무관보다 훨씬 좋았다. 행정부 엘리트 사무관들은 대부분 경제기획원에 모여 있을 때였다.

“왜 판사를 하지 않고 사무관으로 갔어요?”
내가 물었다. 그것도 독특한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판사를 하기 싫었어요. 그래서 법제처로 돌아와 거기서 다시 5급 공무원으로 일했죠.”
그는 뭔가 달랐다. 남들이 추구하는 자리를 거절했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종업원이 소주와 술안주를 내왔다. 담백한 몇 가지 나물과 두부와 김치 그리고 얇게 저민 홍어회가 접시에 놓여나왔다. 그가 작은 소주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그가 소주잔을 입에 털어 넣고 젓가락으로 홍어 한 점을 집어 씹은 후 말을 계속했다.  

“엄 변호사님, 소설가 김동인(金東仁)을 아시죠?”
“알죠, 대한민국의 문학을 일군 분 아닌가요?”
“그 분이 친일파로 몰리고 있는 것도 아시죠? 그 분이 일제시대 말에 신문에 기고한 글 때문에 친일파로 된 것 같아요. 제가 그 분의 아들하고 친한데 그 투쟁에는 엄 변호사가 적격이라고 소개했습니다. 한번 맡아서 해보세요.”
그가 사건을 소개했다. 처음 보는 그가 그것도 정부의 고위관료가 밥까지 사면서 노골적으로 사건을 소개하는 것도 파격이었다. 

며칠 후 사무실로 육십대 말쯤 되어 보이는 노신사(老紳士)가 들어왔다. 선이 고운 학자풍의 얼굴에 부드러운 눈빛이었다. 그의 손에는 서류가 들어있는 것 같은 두툼한 가방이 들려있었다.
“소설가 김동인의 아들이 되는 사람입니다. 법제처장이 소개해서 왔습니다.”
그가 소설가 김동인의 아들 김광명(金光明) 박사였다. 나는 그에게 맞은편의 소파를 권했다. 그가 바로 본론을 꺼냈다.
“아버지는 평생 문학을 하셨지만 저는 오십 년을 신경외과 의사로 살아왔습니다.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에서 아버지를 친일파로 결정하기에 두 차례나 이의신청을 했는데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소송으로 법에 호소해 보려고 왔습니다.”

“왜 굳이 저를 선택하셨나요?”
내가 되물었다. 법제처장의 소개라지만 나 같은 뒷골목 개인변호사에게 찾아온 이유가 더 궁금했다.
“제가 잘 아는 대법관 출신 변호사가 계십니다. 그 분에게 찾아가 소송을 부탁했더니 이렇게 세상에 거세게 바람이 불 때는 그저 가만히 있으라는 겁니다. 싸우는 것보다 위원장을 찾아가 납작 엎드려 비는 편이 훨씬 더 낫다는 거죠.”
현실 권력에 민감한 그런 종류의 대법관들이 많았다. 권력에 머리를 숙이지 않는 사람은 대법관이 되기 힘든 세상이기도 했다.
“사건을 맡겠다고 하던가요?”
내가 되물었다.
“아니요 그 분은 이런 사건을 맡으면 곤란하다면서 사건을 거절했습니다.”
한 자리 얻기를 염두에 둔 사람들은 자기관리에 철저했다.

“아버님 김동인 선생이 왜 친일 반민족행위자라는 거죠?”
“아버지의 소설 ‘백마강’이 친일작품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일제 말 매일신보에 글을 쓰셨는데 그게 친일로 걸렸습니다. 그런데 소설 백마강은 저도 읽어봤는데 내가 받은 인상은 그냥 재미있는 소설일 뿐이었습니다. 저는 의사라 잘 모르지만 아버지의 작품 ‘감자’는 자연주의 경향이고 ‘광염소나타’나 ‘광화사’ 같은 건 예술 지상주의 쪽인 탐미(眈美)주의 유미(唯美)주의 쪽이라고 그러더군요. 아버지는 정치나 사상 쪽하고는 거의 관계없던 분입니다. 오히려 아버지는 일제 말 일장기(日章旗)를 집집마다 정성스럽게 모시던 시절 그걸 뚤뚤 말아서 광 속에 던져두는 분이었어요. 그리고 누님에게 한글을 직접 가르쳐 주면서 한글이 필요한 날이 올 수가 있다고 하셨죠. 집안에서의 그런 행동을 보면 아버지는 친일반민족과는 거리가 있었던 분 같아요. 더구나 일제 말에 아버지는 천황(天皇)을 모독한 죄로 징역까지 산 분이니까요.”

“아버님에 대해 연구한 논문들이 수백 편이 되는 걸로 아는데 그 내용들이 사실인가요?”
대학 1학년 교양학부 시절 교수는 김동인에 대한 연구논문들을 소개했었다. 논문들을 보면 김동인은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서 술과 여자로 재산을 탕진한 사치한 예술가라는 평가도 많았다.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아버님에 대해 간접적으로 말만 전해 듣고 한 사람이 쓴 걸 다른 사람이 인용하고 그렇게 해서 여러 논문이 만들어졌죠. 우리 아버지가 부잣집 아들로 흥청망청 산 걸로 매도하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 아버지가 그 시절 얼마나 처절하게 산지 압니까? 아버지 밑에서 6남매가 컸는데 아버지는 원고료 이외에는 수입이 전혀 없었어요. 황순원(黃順元) 씨는 그래도 땅이라도 있었어요. 또 이광수(李光洙) 씨 댁은 부인 허영숙(許英肅) 씨가 산부인과 의사라 경제적 능력이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 집은 아무것도 없었죠.

전업(專業) 작가였던 아버지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글을 썼습니다. 그냥 단순히 원고료 몇 푼을 위해 글을 썼던 적도 있었죠. 아버지는 재산을 낭비한 게 아니라 유산을 돈이 안 되는 문학잡지에 투자해서 빈털터리가 된 사람입니다. 그 시절 대외적으로 아버지는 한국문단의 최고봉이지만 원고료로 일곱 식구를 먹여 살려야 하는 처절한 가장(家長)이었죠. 행촌동 19평 조선기와집은 방이 셋인데 돈이 없어 그중 하나는 세를 줬어요. 그런데도 그 세 사는 사람한테조차 돈을 꾸기도 했다니까요. 아버지가 천황모독죄로 감옥에 있을 때 어머니가 동네 사람들에게 돈을 꿔서 생활하고 면회도 가고 그랬죠. 모든 작가들에게 전쟁과 친일을 강요하는 작품을 쓰라고 강요하는 상황에서 문학계를 대표하는 아버지에게 오는 압박은 상상할 수 없었어요.
아버지는 황군위문단(皇軍慰問團)으로 마지못해 중국으로 갔다 온 후 기억이 전혀 없다면서 글을 쓰지 않으셨어요. 아버지가 마음만 먹으면 주변 사람들한테 물어서라도 쓰셨을 텐데 그렇지 않으셨죠. 그게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저항이었어요. 좌담회에서도 한 말씀도 없으셨어요. 엉뚱하게 초콜릿을 가지고 갔다는 한 마디만 남아있죠. 사실 아버지는 1919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서 1939년경은 왕성하게 작품을 남길 무렵이었어요. 더 많이 글을 써야 할 기간에 아버지가 쓴 글이 전체의 7퍼센트밖에 되지 않았어요. 사실상 절필(絶筆) 선언입니다.

매일신보(每日新報)에 나중에 쓴 글들도 전업작가이다 보니까 솔직히 먹고 살려고 쓴 면도 있어요. 일제 말에 조선일보(朝鮮日報)나 동아일보(東亞日報)가 폐간이 되고 작가들이 쓸 지면이 점점 없어졌죠. 잡지도 조광(朝光)만 남았을 거예요. 그 지면이 우리 식구들의 생존 터전인데 검열에서 친일이 아니면 통과되지 않았거든요. 아버지가 천황모독죄로 감옥에서 여덟 달을 살다 나오셨는데 그 후에는 거의 모든 글들이 검열에 걸려 출판되기 힘든 상황이었어요. 집안의 궁핍은 말할 수 없는 거죠. 전부 빚이었으니까요. 일제(日帝) 말은 검열이 심했어요. 아버지가 원고를 보냈다가 그게 검열에 걸려 퇴짜를 맞으면 그걸 도로 가지고 오는 건 어머니였어요. 아버지는 원고가 돌아오는 걸 아주 싫어했었죠. 그렇게 살았어요.

그나마 해방 직전에 돈이 없어 그 집마저 팔고 왕십리로 이사를 갔죠. 아버지가 돌아가신 집이죠. 우리 아버지는 가난하지만 비굴하게 살지는 않았어요. 그렇게 사는 자체를 싫어했어요. 중학교 시절 아버지의 유고(遺稿)를 제가 누님과 함께 하나하나 손으로 필사(筆寫) 했어요. 그리고 그걸 모아서 김동인(金東仁) 전집(全集)을 만들었죠. 그때 아버지 작품들을 읽었어요. 아버지 작품 중에서 ‘배따라기’가 제일 아버지를 잘 드러낸 작품으로 볼 수 있고 문단 30년사를 쓰셨는데 거기 보면 너무 정직하게 쓰셨어요. 아버지의 모습이 그대로 잘 드러나 있죠.”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