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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원회의 역사철학>
 
변호사라는 직업은 더러는 ‘다르게’ 더러는 ‘거꾸로’ 본다. 죄는 미워해야겠지만 죄인의 입장에 서서 그를 변호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죄인으로 지목된 사람들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면의 상황과 그렇게 된 인간 내면의 고뇌를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여론이 모두 좌향좌 할 때 혼자 우향우 하는 직업이기도 했다. 그게 자유민주국가의 변호사의 소명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간음(姦淫)하는 여인을 돌로 치는 현장에 서 있던 예수가 떠오르기도 했다.

탈주범 신창원(申昌源)을 변호할 때였다. 모임에서 만난 교회 권사라는 한 여인은 어떻게 그런 흉악범을 미화시킬 수 있느냐며 내게 공개적으로 따졌다. 그녀는 고정관념과 편견이라는 외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에게 신창원의 탈주죄보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교만죄가 훨씬 무겁다고 생각한다고 말해 준 적이 있었다. 우리 세대는 국가에서 심어둔 수신기만 하나씩 달고 살아야 했던 불행한 시절이었다. 그때그때 시대의 주도세력이 보내는 일방 통행적 메시지로 뇌가 물들어야 했다. 역사도 선별해 제공해 주는 사실과 해석만 앵무새처럼 외우곤 했다.

나는 변호사였다. 업무를 맡는 동안은 일단 선입견을 배제할 필요가 있었다. 생생한 현장 속에 있는 다양한 시각과 해석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게 먼저였다. 대한변협 이사회의에서 한 보수적인 변호사가 외친 것처럼 세상을 들끓게 하는 중국의 문화혁명 같은 선동의 파도는 어떤 모습일까? 나는 컴퓨터의 검색창에서 ‘친일파’란 단어를 검색해 봤다. 모니터에 바로 음침한 흑백화면이 떠올랐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모습이 보이고 그 옆에 볼이 홀쭉한 메마른 인상의 군인이 나와 있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었다. 사진 아래 이런 글이 보였다. 

<미(美) 군정을 뒤에 업은 이승만은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친일파를 모두 흡수합니다. 친일파들의 살 길이 열렸습니다. 식민지 시대의 권력을 그대로 유지한 채 건국의 공로자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승만 독재시대에 승승장구하던 그들은 위기를 맞습니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난 것이지요. 그들은 두려움에 떱니다. 하지만 불과 1년 뒤 박정희(朴正熙)에 의해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납니다. 친일파들에게 다시 살 길이 열렸습니다. 따지고 보면 박정희 자신이 친일파입니다. 일본 육사 졸업하며 천황한테 혈서 쓰고 자랑스러운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 공인받은 자이니까요.
박정희는 경호실장을 시켜 여대생들을 바꿔가며 밤 문화를 즐기다가 1979년 10월26일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친일파에게 다시 위기가 왔습니다. 그러나 또 구원투수가 등장합니다. 전두환(全斗煥)이 12·12쿠데타를 일으키며 정권을 장악한 겁니다. 친일파들은 이제 기꺼이 전두환의 품에 안깁니다. 이어서 친일파, 군사독재 세력과 손을 잡은 김영삼(金泳三)이 대통령이 됩니다.
그러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정권교체를 이뤄냅니다. 친일파가 대한민국 건국 이후 최초로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패닉에 빠진 그들은 열심히 김대중을 빨갱이라고 욕합니다. 이들이 살아남는 길은 무조건 상대방을 빨갱이라고 몰아붙이는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생각지도 않았던 노무현(盧武鉉)에게 또 패합니다. 다시 빨갱이라고 몰아붙입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친일파 명부를 만들고 진상을 조사하는 작업이 진행됩니다. 이번에 발표된 친일인사명단은 해방 이후 처음 시도된 대규모의 친일인사 선정 작업이라는 점에서 상당한 사회적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가 4776명의 명단을 발표한 후 두 달 동안 이의신청을 받은 결과 전체 대상자의 0.025퍼센트만 이의를 제기했고 그중 상당수는 소명자료가 첨부되지 않아 발표된 명단이 상당히 객관성을 띠고 있음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반론을 담은 글도 있었다. 그 내용 중 하나는 이랬다.

<민족연구니, 민족단체니 하고 특히 단체 이름 앞에 ‘민족’, ‘통일’ 등이 들어가는 단체는 1980년대 중후반에서 90년대 초중반까지 대규모로 확산된 운동권 계파 중에서도 소위 ‘주사파’ 계열은 김일성 주체사상으로 집단적 최면에 걸린 집단입니다. 80년대 후반 학번인 제 또래에도 여전히 그런 망령에 홀려 있는 이들이 적지 않고 열린우리당에 대거 들어가 활동하더군요. 주사파 맹종분자들이 권력에 어찌 그리 목을 매고 오로지 정치권이나 시민단체들만 가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김일성의 무장항일 투쟁만이 조국을 구했고 이승만은 미제 앞잡이에 불과한 반동분자이므로 한반도의 정통성은 무조건 북한 김일성에게 있다는 자기들이 학습한 주사파 이론을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그 외엔 아무것도 보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여전히 미제 식민지 치하에 고통 받는 처지라 믿으니 이승만 대통령이건 누구건 김일성 왕조에 맹종하지 않는 모든 자들은 미제 앞잡이로 저주와 증오의 대상일 뿐이죠. 김일성 세습 왕조의 온갖 살인 만행은 듣지도 보지도 않으려 하는 딱하고 불쌍한 자들입니다. 문제는 그런 편파적 세뇌에 빠진 자들이 정권을 잡고 정권 차원에서 밀어준 지난 10여년. 교육을 망치고 가치관을 망치고 역사를 자의적으로 왜곡한 그들이 저지른 폐해가 얼마나 길고 오래 갈지, 정말 우려됩니다. 하루빨리 이들이 뿌린 악폐(惡弊)를 걷어내야 한다는 생각이 새삼 드네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