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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원회>

오후 2시경이다. 8월의 강렬한 태양이 빌딩들을 후끈 달아오르게 했다. 빌딩들이 내뿜는 열기에 거리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나는 광화문 네거리 동아일보 뒤쪽에 있는 ‘청계 11빌딩’ 안으로 들어섰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진상규명위원회가 있는 건물이었다. 붉은 화강암이 깔려있는 로비에는 경찰 두 명이 지키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서 내렸다. 어둠침침한 복도 맞은편에 두꺼운 유리문이 보였다. 민원인은 왼쪽으로 가라고 화살표시가 된 안내문이 그 위에 붙어 있었다.

문 옆의 벽에 붙인 공고판에는 두툼한 서류뭉치가 걸려 있었다. 위원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한 명단이었다. 호기심에 명단을 들추어보았다. ‘진학문, 모윤숙, 노천명’ 등 낯익은 이름들이 보였다. 진학문(秦學文)은 일제시대 타고르를 만나 한국을 위한 시를 써달라고 조르던 문학청년이었다. 노천명(盧天命) 시인의 시 ‘사슴’을 고교 시절 국어교과서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노천명 시인의 죽음의 모습을 사도법관(使徒法官)이라고 불리던 김홍섭(金洪燮) 판사의 낡은 수필집에서 봤었다. 천주교 신도였던 김홍섭 판사가 어느 날 성당에 갔다. 신부가 서대문 언덕 위의 판잣집에 외롭게 살던 여자가 지난밤 죽었으니까 가서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어려웠던 시절 혼자 쓸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김홍섭 판사는 미로 같은 산동네를 올라가 판잣집 함석 문을 열고 들어갔다. 쪽마루를 가운데로 하고 작은 방 두 개가 마주보고 있는 가건물이었다. 구석의 작은 창살문을 열었다. 햇볕이 들지 않는 어두운 방구석의 얇은 요 위에 영혼이 떠나간 한 여자의 작은 시신(屍身)이 보였다. 조악한 벽지를 붙인 바라크 벽에 아래는 앉은뱅이책상이 붙어 있었다. 책상 위에는 시집 몇 권이 놓여 있었다. 죽은 여자의 시집인 것 같았다. 김홍섭 판사는 그 시집의 표지 뒤에 있는 사진을 보고서 죽은 여자가 노천명 시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게 노천명은 외롭고 쓸쓸하게 죽었다.

죽은 노천명의 장사(葬事)를 치러준 김홍섭 판사도 죽었다. 그의 수필집이 청계천 헌책방 바닥에 노랗게 변색된 채 뒹굴다가 나의 눈에 띈 것이다. 학교 선생님들이 가르친 시나 글의 주인공들의 이름이 적힌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이 목 맨 시체처럼 공고판 위에서 줄에 매달려 있었다. 복도 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엘리베이터 쪽에서 몇 사람이 떠들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요즈음 친일파(親日派)들이 더 할 말이 많아요. 개뿔.”
걸어오던 오십대 중반쯤의 남자가 나를 보자 멈칫하며 조심하는 표정으로 바뀌면서 물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위원회에 물어볼 게 있어 왔습니다.”
그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따라 오시죠.”

그의 얼굴에 귀찮다는 표정이 얼핏 스쳤다. 그들을 따라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구석에  ‘민원실’이라는 아크릴 팻말이 붙은 방이 있었다. 그 방으로 안내되어 들어갔다. 이름은 민원실이지만 사실상 창고로 사용되는 것 같았다. 골판지 박스가 가득 쌓여 있었다. 방 가운데에 작은 탁자가 놓여 있었다. 
“앉으시죠.”
그가 자리를 권하고 주머니에서 녹음기를 꺼내 탁자 위에 놓으면서 맞은편에 앉았다. 
“대상자가 누구죠?”
녹음기에서 빨간 불이 깜박거렸다.
“소설가 김동인(金東仁)입니다.”
그가 자신의 업무수첩을 뒤져 이름을 찾아보고 있었다. 

“담당조사관님을 볼 수 있을까요?”
내가 물었다.
“그건 안 됩니다. 비밀입니다.”
“그러면 지금 말을 나누는 분은 누구십니까?”
“제가 누구인지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들이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정부기관인지가 의심스러웠다.

“위원회 입구 게시판에 보니까 모윤숙, 노천명 등 쟁쟁한 문학인들이 친일파로 매달려 계시던데요?”
내가 화제를 바꾸었다.
“그 사람들은 친일파라는 통지를 받을 후손조차 이 땅에 없어요. 후손들 대부분이 미국으로 건너가서 미국 시민권자가 됐죠. 그래서 그렇게 공고하는 겁니다. 그런데 왜 오셨습니까?”
“이의를 제기하려고 왔습니다. 이번에 만들어진 법은 일제에 ‘적극협력’한 걸 요건으로 하고 있어요. 저는 소설가 김동인의 행위를 고의가 없는 소극적 행위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글을 썼다는 자체를 적극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위원회의 판정 기준인 것 같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