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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길을 나선 문학청년>   

1918년 12월 25일 밤. 일본 동경 본향(本鄕)에 있는 하숙집 방에서 김동인(金東仁)과 주요한(朱耀翰)이 화로를 끼고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조선 유학생들이 많이 하숙을 하는 동네였다. 주요한과 김동인은 그날 저녁 청년회관에서 있었던 조선 유학생 모임에서 돌아오는 길에 찻집 ‘파우리스타’에 들러서 커피시럽을 한 병 사가지고 돌아왔다. 커피시럽은 농축된 커피액으로 김동인이 밤에 글을 쓸 때 잠을 자지 않기 위해 애용했다.

그날 저녁 동경의 청년회관에서 조선 유학생들이 열띤 토론이 있었다. 유학생들은 조선의 독립을 위한 행동을 하기로 결의했다. 그 집회에서 사회를 맡았던 서춘(徐椿)은 김동인에게 독립선언문을 기초해달라고 부탁했다. 와세다대학 철학과의 이광수(李光洙)가 그 일을 자신이 맡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다. 이광수는 김동인이 부러워하는 존재였다. 매일신보에 연재되는 이광수의 소설 ‘무정(無情)’이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었다. 매일신보는 1917년 1월 1일부터 이광수의 소설을 연재하고 있었다. 이광수가 써서 보내는 작품이었다. 시대의 대표적인 지식인을 상징하는 영어교사 이형식과 두 여인의 자유연애 삼각관계를 그린 작품이었다.

보수주의가 지배하던 당시 이광수의 소설은 조선의 도덕률을 파괴한다는 비난도 들끓었다. 양반들 20명은 진정서를 보내 연재소설의 중단을 요구하기도 했다. 여학생들은 소설 속에서 기생이 된 여주인공 영채가 너무 불쌍하다고 항의를 하기도 했다. 이광수의 소설이 화제가 되면서 ‘무정’의 인기가 올라갔고 신문사는 당초 학비보조금으로 이광수에게 매달 5원씩 주던 돈을 10원으로 올리기도 했다.

이광수는 조선 젊은 세대의 우상(偶像)이었다. 그가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반대가 있을 리 없었다. 모임에서 운동을 진행시킬 위원을 선출하고 동경과 서울을 연락할 방도를 토의하고 헤어졌다. 하숙집에서 커피시럽을 물에 타서 마시며 얘기하는 두 사람의 마음에는 아직도 흥분이 잔잔하게 남아있었다.

“정치 운동은 그 방면 사람에게 맡기고 우리는 문학으로 우리 민족에 봉사하면 어떨까.”
김동인(金東仁)의 말이었다. 그는 문학의 역할에 대해 생각을 해 봤다. 깃발을 들고 거리에 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골방에 앉아 글을 쓰는 것도 소명일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우리 민족의 역사는 4000년이지만 상속된 문학은 한문학이 아닌가? 한문이 우리 민족의 글로 통용되고 한문학의 모방으로 민족의 문학적 욕구를 땜질해 오던 우리 민족에게 순전히 한글로 우리 문학을 만들어 내는 바로 그 일 말이야. 우리말로 된 문학잡지를 만들어 내는 거야. 거기에 시(詩)도 싣고 소설도 싣고 말이지. 문학을 통해 우리 민족의 영혼이 눈을 뜨게 하는 거야.”

김동인은 중국사람 노신(魯迅)이 중국에 돌아가서 잡지를 통해 중국 민족의 정신을 일깨우는 사실을 전해 듣고 있었다.
“잡지를 하려면 비용이 많이 들 텐데?”
주요한이 현실적인 걱정을 나타냈다.
“내가 계산을 해 봤어. 200원이면 창간호를 낼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매호 100원씩만 들이면 계속 발간할 수 있어. 아버지한테 상속받은 돈이 있어. 그 돈이면 잡지를 만들 수 있어.”

일 년 전 김동인의 아버지 김대윤(金大潤)이 세상을 떠났다. 평양으로 돌아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얼마 동안 대동강에서 낚시를 하거나 산책을 하고 책을 읽었다. 어머니가 결혼하라고 했다. 평양의 수산물 상인집의 딸한테서 중매가 들어왔다. 1918년 4월 열여덟 살의 김동인은 결혼식을 올렸다. 아내는 성격이 괄괄한 김혜인(金惠仁)이었다. 금강산으로 신혼여행으로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니 평양에서 관등놀이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수십 년 동안 이어져 온 호화로운 축제였다. 처갓집에서는 사위를 맞이하는 축하로 큰 배를 한 척 빌려 잔치를 벌였었다. 아버지한테 받은 유산이 제법 됐다. 그 돈으로 문학지를 하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동인이 주요한에게 말했다.
“문제는 원고를 써 줄 동인(同人)들이 있어야 한다는 거지. 내가 잡지의 이름을 전부터 생각해 봤는데 ‘창조(創造)’가 어떨까? 조선의 문학에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거니까.”
“그 이름이 좋으네. 이 동경 유학생 중에도 문학을 지망하는 사람이 많지. 전영택(田榮澤), 김환(金煥), 최승만(崔承萬), 이광수(李光洙)가 적격일 것 같아. 해 봤으니까 편집은 내가 맡으면 되고 말이야.”
주요한이 맞장구를 쳤다. 어느덧 밖에서 새벽 우유배달을 하는 구루마 소리가 얇은 유리창을 미미하게 흔들고 있었다. 벽에 걸린 괘종시계가 새벽 다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다음날 오전 김동인(金東仁)은 우편국으로 가서 평양의 어머님께 전보로 200원을 급히 보내달라고 했다. 오후에는 문학적 동지들을 찾아 나섰다. 아오야마에서 하숙하는 전영택을 만나고 이어서 김환과 최승만을 만났다. 모두 호쾌하게 승낙했다. 주요한, 전영택, 김동인 셋이서 아오야마 근처 길가의 덮밥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들이 흥분해서 떠드는 소리에 다른 일본인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김동인은 소설을 주요한은 시를 쓰기로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