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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혼(再婚)

김동인(金東仁)은 평양의 어머니에게로 돌아왔다.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아이들을 2년 동안 키웠다. 아침이면 남매를 세수 시키고 옷을 입혀 학교에 보냈다. 학교에서 돌아온 남매에게 복습과 예습을 시켰다. 처음으로 아이들의 자상한 아버지가 된 것이다. 저녁이면 아이들에게 여러 가지 옛날 이야기들을 해 주었다. 아들 일환(日煥)은 12세 딸 옥환(玉煥)은 9세였다. 저녁이면 밤하늘에 빛나는 별을 보면서 김동인은 아이들에게 이런 얘기를 해 주었다.

<아버지가 어렸을 때 일이다. 변소 옆에 대추나무들이 가지런히 서 있었다. 그 대추나무는 할아버지가 손수 심고 가꾸시던 나무였다. 봄이 되면 파란 꽃이 피었다. 거기 다닥다닥 열린 대추알은 가을이 되면 그 나무를 온통 붉게 물들이곤 했다. 그때 한창 장난꾸러기 열댓 살 되던 너의 아버지는 형과 함께 대추를 따려고 하다가 나무를 부러뜨리고 말았다. 형제는 아버지에게 혼이 날 것이 무서워 모른 체하기로 약속했다. 저녁이 되자 할아버지가 돌아오셨다. 아버지 형제는 모른 체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변소에 갔다 오시더니 우리를 부르셨다.
 “대추나무를 너희들이 꺾었느냐?”
 “모르겠는데요. 대추나무가 부러졌어요?”
우리 형제는 능청을 떨었다. 할아버지가 형제를 살피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거짓말하면 못쓴다. 대추나무를 꺾은 것은 실수에 지나지 못하나 거짓말은 죄가 된단다.”
그 말에도 우리 형제는 딱 잡아떼었다. 할아버지는 한참을 생각하시는 얼굴이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단다.
 “얘들아 내가 미국의 워싱턴 대통령의 어렸을 때 얘기를 하나 해주마. 워싱턴이 어렸을 때 예쁜 도끼가 한 자루 있었다. 그 도끼를 너무 써보고 싶어서 자기 아버지가 애지중지하는 앵두나무를 찍었다. 워싱턴의 아버지는 누가 찍었느냐고 물었다. 그러니까 워싱턴은 정직하게 자기가 찍었다고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정직했기 때문에 워싱턴은 미국의 대통령이 된 거란다.”
할아버지는 얘기를 들려주신 후에 우리 형제에게 또 다시 물으셨다. 
 “자 이제 다시 물을게 대답하거라. 대추나무가 부러진 걸 너희는 모르느냐?”
나는 그 말씀에 감동되어 우리가 꺾었다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용기가 없어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고지식하고 정직한 형은 울먹거리면서 “우리가 꺾었어요”라고 자백을 했다. 너의 삼촌은 곧 자백을 한 덕으로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더 큰 꾸중을 들었다. 할아버지의 그 말씀들은 아버지의 뇌수(腦髓)에 깊이깊이 새기어졌다. 이렇게 아버지의 마음에는 할아버지가 뿌려준 정직(正直)의 씨가 차차 크게 자라난 것이다.
그러나 그 뒤 아버지가 성장하면서 이 세상에서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어린 너에게 이런 말을 하기에 아버지의 마음은 너무 쓰리다. 아버지가 이 세상에서 본 바는 너무도 많은 영리함과 너무도 많은 부정직함과 너무도 많은 속임수였다. 영리하고 남을 속이는 사람은 성공하는 것 같았다. 고지식하고 정직한 사람은 실패하는 것을 보았다. 그런 모순들을 보면서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가르친 정직을 속으로 원망했다. 할아버지의 교훈 때문에 고지식하고 정직하게 살려던 아버지가 점점 쇠락해 가는 걸 느끼고는 할아버지를 원망했었다. 아버지도 약삭빨라질까 생각도 해보았다. 다른 사람들이 아버지를 순진하다고 하면서 은근히 비웃기도 했다. 그러나 일환(日煥)아 아버지는 살아가면서 이제 진짜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생각했다. 비록 실패해도 좋다. 남들이 모자란다고 비웃어도 좋다. 그래도 마음이 고지식하고 정직한 동안은 마음에 근심이 없다는 걸 알았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느니라’
한때의 흥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마음의 천국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만 열리는 것이란다.>

사월 초파일 그는 딸에게 이런 얘기를 해 주었다.
“옥환(玉煥)아. 어느덧 사월 초파일이다. 대동강의 불놀이로 알려져 있는 이 사월파일이 무슨 날인지 너는 아느냐? 너 같은 어린아이들은 대동강에 흐느적거리는 굉장한 불놀이를 구경하려고 어서 사월파일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지? 강물 위를 조용히 미끄러지지는 배의 노 젓는 소리와 조용히 들리던 수심가(愁心歌)가 그날이면 불 천지가 되고 좌우 언덕은 엄청나게 사람들이 구경을 하기 위해 모여든단다. 그러면 그 날은 무슨 날이길래 이렇듯 만인(萬人)이 축하를 하며 기뻐하는지 아느냐?
 지금으로부터 이천오백 년 전에 인도 땅에서 한 훌륭한 인물이 탄생한 날이다. 우리가 시골에 길을 다닐 때 거기 아름다운 시내가 있고 아름다운 산이 있으면 울창한 소나무와 혹은 느티나무를 넘어서 이끼로 덮인 높은 지붕이 바라보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솔밭새로 길을 더 더듬어서 아까 보이던 그 지붕을 찾아가면 거기는 단청으로 장식한 커다란 집이 맑은 공기 가운데 쑥 솟아오를 것이다. 그 안을 찾아 들어가면 회색 법의(法衣)를 입은 늙은 중이 부처의 앞에 합장을 하고 서서 사람이 오는지 가는지도 모르고 경(經)을 외고 있을 것이다.
한 개의 사람의 힘. 그것은 지극히 약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약한 힘도 그것을 자기를 위해 쓰지 않고 세상을 향해 바치면 이전에는 약하던 그 힘도 문득 강하게 돼서 천만 사람으로도 능히 꺾을 수 없게 되고 천만년 뒤에도 사라지지 않게 된다. 지금 세계에 퍼져 있는 불교세력도 그 근본을 캐자면 결국 부처라는 한 사람에게서 나온 걸 볼 때 우리는 한 사람의 힘이 약하다고 비웃을 수 있겠니? 석가가 왕자로서의 모든 것을 버리고 길거리에서 얻어입은 낡은 옷을 입고 고행(苦行)을 위해 설산(雪山)을 찾아갔다. 사철 하얀 봉우리가 보이는 히말라야 그곳이 바로 설산이란다.
 예수가 광야(曠野)에서 사십 일을 금식하던 것 너도 알고 있지? 석가도 왕자로서의 부귀와 영화를 버리고 설산으로 들어가셔서 수십 년간 고생하시면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쓰셨다. 인생을 구원하려던 옛날 성인(聖人)들은 모두 한결 같이 몸소 사람의 가장 괴롭고 아픈 일을 맛보신 것이다. 몸이 왕자로 태어난 석가는 뜻만 있으면 무슨 호강인들 못하셨겠니? 그렇지만 석가는 그 부귀영화를 모두 버리고 좀더 큰 인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행의 길을 떠나셨으니 예수께서 솔로몬의 영화(榮華)를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져버리는 한 떨기의 들꽃만도 못하다’고 차버리신 일과 좋은 한 쌍의 일이 아니냐?
 그로부터 수십 년 별별 고생을 다하시며 인생문제며 우주문제를 연구하시고 또 연구하신 끝에 드디어 크게 깨달으시사 창도(唱道)하신 것이 지금 이 세계의 어느 곳이라도 안 퍼진 곳이 없는 불교란다. 만약 왕자였던 석가가 세상의 보통 사람으로 자기 앞의 영화에 취해 거기 만족했으면 그의 이름이 지금까지 어떻게 남아 있었겠니? 한때의 부귀와 영화가 그것이 무엇이냐. 만대(萬代)까지 전할 이름 그것이 귀한 거란다. 일환(日煥)아. 이번에는 사람의 관찰의 힘에 대해 가르치겠다. 세밀한 주의로 관찰하는 것 이것은 사람의 온갖 지혜와 지식의 근원이로구나.
 한 사람이 의자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끈으로 매어단 등(燈)이 늘어져 있었다. 그 사람은 손을 들어서 등을 툭 밀쳐 보았다. 끈에 늘어져 있던 등은 밀치는 바람에 휙 저편으로 갔다. 그 편으로 갔던 등은 도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 등은 제자리에서 멎지 않고 아까 갔던 방향과 반대의 방향으로 획 왔다. 왔던 등은 다시 갔다. 갔던 등은 다시 왔다. 여기서 그 사람은 타력(惰力)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힘에다가 조금 다른 힘을 가하면 그 늘어진 등을 영구히 좌우편으로 흔들흔들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걸 이용해서 시계라는 것을 만들었다. 평범한 일이라도 그것을 관찰할 때 거기서 귀중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단다. 사과나무 아래서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이 있다. 난로 위 주전자에서 뚜껑이 들썩이는 걸 보고 증기기관이 발명됐다.
 ‘관(觀)하는 사람은 견(見)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단다. 이 세상의 많고 많은 사물 그 가운데는 아직 우리 인생이 그 문조차 두드려 보지 못한 귀한 진리며 법칙들이 수없이 많을 것이다. 그 모든 법칙이며 진리의 문은 오직 관(觀)하는 사람에게만 열리는 것이다. 눈을 가진 사람은 다 견(見)하는 것이다. 그것을 견한 뒤에 관까지 하여야만 진리의 귀중한 문은 비로소 열리는 것이다.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은 견이요 견한 바를 다시 마음의 눈으로 보고 생각하는 것이 관이다. 예수가 광야에서 사십 일을 금식하실 때 온갖 잡념이 그를 괴롭게 했다. 부귀와 영화가 명예가 그를 유혹하려 했다. 그러나 그때 예수는 그런 달가운 일들을 모두 물리치셨기에 능히 뒤에 위대한 사업을 성취하지 않았느냐. 이런 얘기들을 너희의 가슴에 새기어서 결코 잊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는 부디부디 아름다운 품성과 아름다운 성격과 아름다운 행동의 주인이 되어라.”

남자 혼자 아이들을 키우기에는 너무 벅찼다. 그는 재혼을 생각해 보았다. 결혼의 실패는 쓰리고 아팠다. 철없던 열아홉 살, 호기심에 결혼을 했다. 그리고 그 결혼이 끝을 맺는 날까지 십여 년의 세월을 외롭게 지냈다. 아내가 그의 무능에 진저리를 치고 집을 나가는 것을 봤다. 그 뒤 3년의 세월을 어린 두 자식을 키우며 지냈다. 이제 남은 것은 가난과 자식들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럴수록 재혼을 하라고 친구들이 권했다. 염상섭(廉想涉)은 이왕이면 경기도 출신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이라고 했다. 경기도의 어휘가 소설제작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