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여름 월드컵 열기로 가득찼던 시청 앞 광장이 3월1일은 反核 反金 구호로 가득찼다. 지난해 여름이 밝고 활기찼다면, 3월1일은 반데라스의 음악이라도 깔린 듯 비장감이 넘쳤다.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다는, 이젠 행동하겠다는 각오가 그득한 현장이었다. 워낙 60代 이상 어르신들이 많이 오셔서인지 상당히 많이 참석한 청장년이 눈에 띄지 않을 지경이었다. 군복과 베레모, 훈장으로 단장한 주름진 얼굴의 어른들은 '애국가'와 '전우야 잘자라'를 부를 때 마치 전장에 출장이라도 하듯 결연한 표정이었다.
  
  '전우야 잘자라'를 부를 때 많은 어르신들이 눈시울을 적셨는데, '꽃잎처럼 떨어져간 전우야 잘자라,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 노들강변 언덕 위에 잠들은 전우야, 떠오른다 네 얼굴이 꽃같이 별같이'라는 가사에 목울대가 얼얼해졌다. 나의 아버지도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분이다. 529고지를 사수하던 22연대가 전멸한 뒤 23연대가 투입되었을 때 아버지와 함께 529고지 전투에 참여한 군인은 모두 274명이었다. 6개월 후 고지를 사수하고 전쟁이 끝났을 때 23연대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고작 47명이었다.
  
  나는 시청 앞 광장을 한바퀴 돈 다음 뒤쪽에 서 있었는데, 군중이 점차 차선을 점령해가다가 12시 35분 경 완전히 시청 앞 도로가 차단되었다. 경찰이 저지에 나서자 몇몇 어르신들이 외쳤다.
  '젊은 녀석들만 데모하고 도로 점령하는 줄 알면 오산이야. 우리가 못할 거 같아? 이제 우리가 나라 살리는 데모 할거야.'
  예전에 도로를 점령하고 구호를 외치는 젊은이들을 향해 혀를 끌끌차던 어른들이 이제 '우리가 한다'며 나선 것이다.
  
  국민대회의 비장감은 격렬한 구호가 그대로 증명하고 있었다. 국민대회에서 특별히 내 눈길을 끈 것은 전직 대통령과 현직 대통령의 이름이 담긴 피켓이었다. '북한핵 개발 지원한 김대중을 처단하자''대통령 인수위에 고정간첩 웬말이냐''테러주의자 김정일, 후원자 김대중, 후계자 노무현' 같은 것이었다. 불과 며칠 전에 임기를 마친 전임 대통령과 이제 막 시작한 현직 대통령, 그들을 김정일과 한꺼번에 묶은 구호를 보니 마음이 착잡했다. 어른들은 뒤쪽에서 잠깐씩 '현찰을 줘서 핵무기 만들게 한 일을 절대로 용서 못해. 그냥 둬선 안돼'라며 목청높여 난상토론을 벌였다.
  
  기독교가 주관한 1,2차 평화기도회에 대해 많은 언론이 '극우 수구세력의 한풀이'한바탕 지나가는 넋두리' 정도로 치부해 제대로 조명도 하지 않았다. 1,2차 기도회에 자극받아 열린 국민대회를 보면서 더 이상 보수 우파의 도도한 움직임을 '새 패러다임에 적응하지 못하는 구세대의 몸부림' '솥뚜껑보고 놀란 가슴들의 엄살' 정도로 치부해서는 안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차례 지나가는 바람 정도로 생각하기에는 사람들의 노기가 쉽게 진정될 것 같지 않았다.
  
  대회가 열리던 날 새벽에 동대문 시장으로 취재를 나갔었다. 핏기 없는 얼굴의 20代 상인들은 몇 달째 장사가 안된다며 '최악의 상황이다. 도무지 희망이 없다. 정권이 바뀐 게 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냐. 투표도 하지 않았다'고 얘기했다. 국민대회에 모인 비장한 어른들의 얼굴에, 마음이 뒤숭숭하고 살맛이 안 난다는 젊은 상인들의 얼굴이 오버랩 되었다. 때마침 서강대 총장을 지낸 박홍 신부가 노무현 대통령에게 '한쪽만 참여시키는 정부가 되지 않기 바란다'는 연설을 했다. 북한 핵문제를 놓고 상반된 의견이 나오고, 정부의 對北정책에 대해서도 엇갈리는 반응이 나타나는 상황에서, 참여정부의 '참여폭'을 다시금 떠올려봤다.
  
  참여정부의 대통령은 많은 사람들이 보는 오프라인 신문에는 눈길한번 주지 않고, 어르신들은 도무지 보지 않는 온라인 신문과 인터뷰를 했다. 인터넷을 모르는 세대는 어쩌라고, 컴퓨터 화면을 오래보면 눈이 아픈 사람은 어떡하라고, 줄줄이 사탕처럼 올라오는 욕을 섞은 엄청난 비난을 읽으면 구토가 나는 사람은 또 어쩌라고... 대통령이 외면하는 신문을 보는 사람들이 '관리받지 못하는 국민'이라는 자괴감을 느낄지도 모른다는 생각, 안 해보셨는지. '참여정부가 전 국민을 참여시키는 정부가 되기 바란다'는 박홍 신부의 말끝에 잠깐 생각해보았다.
  
  파커를 둘둘 감고 갔지만 시청 시계가 두시를 넘어서자 으슬으슬 춥기 시작했다. 어르신들은 아랑곳없이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목놓아 구호를 외쳤다. 국민대회가 끝난 뒤 여의도 한강 둔치에서 열린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주최 '나라와 민족을 위한 구국금식기도회'에 가보았다. 10만명이 넘는 기독교인들이 '북한인권 개선과 탈북난민 인정을 위하여'미군철수 반대와 북한 핵포기를 위하여'평화통일과 민족복음화를 위하여' 목놓아 기도하고 있었다. 기독교인들은 '한반도의 전쟁은 절대 안 된다. 북한은 핵개발을 즉시 포기하라''미국은 우방이다. 평화와 안보를 위해 미군철수 반대한다'는 구호를 크게 외쳤다.
  
  국민대회와 구국기도회를 보면서 뒤숭숭한 마음이 다소 안정되었다. '기도하는 백성은 망하지 않는다'는 어느 목사님의 말씀이 많은 위로가 되었다. 그동안 대규모 집회는 소위 진보 세력들의 전유물처럼 생각되었다. 이제 안정적인 발전과 '한반도에 전쟁은 안된다'고 생각하는 보수 성향의 사람들이 계속 외치겠다는 각오를 다지는 중이다. 최악의 불황을 맞아 먹고살기도 힘든 세상, 북핵을 저지하고 국익에 반하는 미군철수 반대까지 외치려니 피곤하기만 하다. 피곤한 일을 안 해도 되는 날이 빨리 오도록, 만사가 잘 해결되길 바라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