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민주주의에서 생활민주주의로
  
  1. 우리나라는 1948년에 자유민주주의를 간판으로 내걸고 국민국가를 만든 이후 민주화의 대장정을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지금 선거를 통해서 정권 담당자를 선택하는 규칙을 확보했다. 총선이든 대선이든 선거는 대체적으로 공정하게 치러지고 있으며 그 결과에 승복하는 전통이 확립되고 있다. 선거를 통해서 정부를 선택한다는 것, 즉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 이런 것이 정치전통으로 확립된다는 것은 거대한 진보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다.
  
  2. 이제부터는 민주주의가 우리의 생활양식으로 정착되어야 한다. 그 생활의 기준은 권력이 아니라 법이 되어야 한다. 민주적으로 법을 만들고 일단 만들어진 법은 준수되어야 한다. 법을 통한 규제는 최소한으로 하고 많은 부분은 국민들의 자율圈에 맡겨두어야 한다. 예컨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영어 새 표기법 같은 것이다. 정부가 단시간에 말도 되지 않는 표기법을 멋대로 만들어놓고 국민들에게 지켜라고 지시하는 식의 독재적 행정을 민주적인 행정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3. 이를 위해서는 정치권력을 보는 시각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정치는 법을 만들지만 법치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권력이 개인의 사생활과 사유재산에 간섭해선 안된다. 민주나 평등, 또는 민족이나 통일의 이름으로 법치를 약화시키는 선동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법보다 앞서는 것은 없다. 인기영합과 도덕주의를 앞세운 선동을 거부해야 한다. 법치의 根幹이 되는 헌법을 대중인기주의나 선동주의로 무력화시키는 행동은 군사력을 동원한 헌정중단과 똑 같은 쿠데타란 인식을 가져야 한다.
  
  4. 법치의 기본정신은 개인에 대한 충성이 아닌 제도(즉 헌법과 규범 등)에 대한 충성에 기초하고 있다. 제도에 대한 충성은 공익적인 충성이고 개인에 대한 충성은 사적인 충성이다. 모든 제도는 우리 헌법이 정한 자유민주적긴 기본질서를 해치지 않아야 정당성을 가진다. 자유민주적인 기본질서에 기초하지 않는 정책과 정강은 反헌법적이고 反국가적이며 反민주적이다.
  
  5. 자유민주적인 기본질서의 핵심은 개인의 자유이다. 정치적 자유, 언론자유, 경제적 자유, 사유재산의 자유 등등. 이들 개인의 자유는 무한대의 자유가 아니라 국가의 자유와 조화되는 자유이어야 한다. 개인의 자유가 모여서 더 큰 국가의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 자유가 그것이다. 개인의 자유를 모을 때 국가를 파괴하고 공동체에 피해를 주는 식의 자유라면 그런 자유는 국가의 자유와 공존공영하는 식으로 수정되지 않으면 안된다. 거꾸로 국가의 자유를 확장하다가 개인의 자유를 축소시키기만 해선 안된다. 국가와 개인의 자유가 상호보완하고 상호격려, 상호 존중, 상호 보호하면서 견제하고 경쟁할 때 두 가지 자유는 상호 긴장의 분위기 속에서 구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정의인데 정의는 선동이나 침묵이 아니라 견제와 경쟁, 그리고 타협속에서 구현되는 생물체이다.
  
  6. 남북통일은 이런 자유민주적인 기본질서를 기본 틀로 하여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통일은 자유민주적인 기본질서를 덮어놓고 무시하면서 이루어도 되는 절대선이 아니다. 통일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자유민주적 가치관이다. 즉, 자유는 민족보다도 통일보다도 더 중요한 명제이다. 자유는 없었지만 통일은 있었던 일제시대보다도 통일은 없지만 자유는 있는 오늘이 더 좋은 이유가 그것이다. 물론 자유도, 통일도 있는 상태가 최선이고 우리는 그곳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7. 근대국민국가에서 자유란 무엇인가. 안전, 복지, 그리고 정치적인 자유의 합성물이다. 대한민국 인구의 반이 북한군의 장거리포 사정권 안에 들어 있는 한 우리의 자유는 완전하지 않다. 굶어죽는 사람이 있는 나라에서 자유는 완전하지 않다. 정치수 수용소가 있는 곳에서 자유는 완전하지 않다.
  
  8. 안보, 복지, 자유가 전제되지 않는 통일은 위험하다. 통일을 위해서 안보, 복지, 자유가 희생되어도 좋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악마의 유혹을 하고 있는 것이다. 통일은 남북한 7천만 민족 전체의 안보, 복지, 자유를 전진시키는 방향이라야지 소수 지배층의 안보와 복지와 자유를 위하는 것이어선 안된다.
  
  9. 따라서 김정일 정권이 자유민주적인 기본질서를 받아들이도록 압력을 넣고 교류하고 인내하며 교육하는 자세를 우리는 견지하여야 한다. 그의 과거가 아무리 악마적인 악행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그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자유민주적인 가치관을 수용하는 자세를 취한다고 한다면, 그리고 그런 자세변화가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난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를 용서하고 포용할 수 있다.
  
  10. 김정일 정권이 그런 행동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음을 검증할 때까지는 우리는 북한주민들만을 통일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그런 통일은 기본적으로 북한주민들을 전제군주로부터 해방시켜 민주화의 길에 동참하도록 만드는 길이다. 대한민국의 정부와 국민과 북한주민들이 이런 민주화의 길에 손잡고 나갈 때 김정일 정권이 합류한다면 좋고 합류하지 않는다면 역사의 낙오자로서 남겨두고 우리는 떠나야 한다. 우리 민족사에서 두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기회를 게으름뱅이나 무뇌아 때문에 놓쳐선 안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