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세계사가 더 이상 황제들의 機動 연습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역 회의라든가 채권자 회의 같은 것으로 되어 나가는 것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학교의 교과서에서 배운 서사시를 잊을 수 없다. 이들은 세계사가 그 위대한 步武로 나아갈 때 반드시 마차의 음악이 울리고, 악대의 북을 치고, 대포의 포성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 민족에게 있어서 그들의 지도자의 서사시적 역사관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조용한 개혁가, 데 가스페리-
  
  독일의 법학자 구스타프 라드브루흐가 이런 말을 한 지도 벌써 60여 년이 흘렀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서도 사람들이 「역사적인 인물」로 기억하는 지도자들은 대부분 「서사시적」 역사관을 가지고 나라를 이끌어간 사람들인 것 같다. 레닌·히틀러·무솔리니·처칠·맥아더·드골·수카르노·모택동·체 게바라 등….
  
  「감사역 회의」라든가, 「채권자 회의」처럼 나라와 역사를 이끌어 간 지도자들은 많은 경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쉽게 잊혀진다. 그런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 1945∼1953년 이탈리아의 수상을 지냈던 알치데 데 가스페리(1881∼1954)다.
  
   1881년 오스트리아領 트렌토에서 태어난 데 가스페리는 젊은 시절 오스트리아 의회에서 다른 이탈리아系 의원들과 함께 트렌토 지방의 이탈리아 편입을 위해 투쟁하는 것으로 그의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트렌토가 이탈리아로 편입되자, 그는 1919년 이탈리아 인민당 창당에 참가했고, 1921년에는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의 정치 활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1922년 무솔리니가 정권을 잡았기 때문이다.
  데 가스페리는 무솔리니의 독재에 반대하다가 1927년 체포되어 4년간 투옥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그는 인민당을 이탈리아기독교민주당으로 재건하여 반파시스트 투쟁을 벌였다.
  
  1945년 그가 수상이 되었을 때, 이탈리아는 한 마디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21년간의 무솔리니의 독재와 제2차 세계대전이 남긴 후유증을 치유하고, 전후의 혼란과 가난을 수습할 책임이 모두 그의 어깨에 떨어졌다. 어떤 의미에서는 (주권의 제약이 뒤따르기는 했지만) 필요할 때면 점령군 당국에 의지할 수도 있었던 독일의 아데나워 수상이나 일본의 요시다 수상은 가스페리에 비하면 차라리 행복한 편이었다.
  
   데 가스페리는 대학교수를 연상케 하는 학구적이고, 온화하며, 조용한 인물이었다. 내성적인 그는 정열적인 이탈리아인들의 정서에 부합하는 지도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무솔리니의 화려한 언변과 요란한 제스처, 넘치는 카리스마에 질렸기 때문일까? 이탈리아 국민들은 그에게 전후 자신들의 운명을 맡겼다. 그리고 그 선택은 올바른 선택이었음이 입증되었다.
  
  데 가스페리는 요란하게 과거 청산과 개혁을 떠들어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王政 폐지 및 공화국 수립, 신헌법 제정, 연합국과의 평화조약 체결, 유럽연합(EU)의 先驅인 서유럽 동맹 가입 등 이탈리아 역사상 그 누구 못지 않은 청산과 개혁을 이루어냈다.
  
  물론 데 가스페리 혼자서 이 업적들을 이룩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선량한 관리자」로서 최선을 다한 데 가스페리 덕분에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무리없이 진행될 수 있었던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데 가스페리는 처음 수상에 취임했을 때 새 양복을 마련하기 위해 첫 봉급을 가불해야 할 정도로 가난했지만, 黨權이나 권력을 이용해 致富하지 않았던 정직한 지도자였다. 그는 또 원칙의 지도자이기도 했다. 기독교민주당의 가장 큰 후원자였던 교황 비오 12세가 공산주의의 대두를 막기 위해 데 가스페리에게 신파시스트 정당들과 연대할 것을 권유했을 때, 그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善人도 지도자가 될 수 있다-
  
  근대 민주주의를 제대로 경험해 본 적이 없었고,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가난과 혼란으로 인해 공산주의의 침투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던 이탈리아인들은 정직하고 원칙을 고수할 줄 아는 데 가스페리를 통해 자유민주주의를 긍정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데 가스페리는 정치·경제적으로 유럽의 후진국 가운데 하나였던 이탈리아가 오늘날 선진7개국(G7)의 일원으로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닦은 것이다.
  
  닉슨 前 미국대통령은 데 가스페리를 이렇게 평가했다.
  『데 가스페리는 영웅처럼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전후 세계의 영웅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정치가가 허풍과 웅변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입증했다. 즉 지도자는 천둥처럼 떠들지 않고도 조용하게 지도할 수 있으며, 善人도 지도자가 될 수 있음을 입증했던 것이다』
  
   허풍과 웅변을 가지지 않고, 천둥처럼 떠들지 않으면서, 말없는 가운데 착실하게 개혁을 실천하는 지도자- 이 밤 문득 데 가스페리와 같은 지도자가 생각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