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眞)민주화운동을 시작해야 한다
  
  李 長 春(명지대 초빙교수·전 외무부 대사)
  
  사실상 국고강탈(國庫强奪)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매수(買收)했던 남북정상회담의 불법 배경에 대한 '햇볕'게이트 수사를 포기해 국민적 지탄을 받은 검찰이 자체 인사소란(人事騷亂)으로 그 자화상을 꼴사납게 보였다.
  
  결국 '이번에 검찰을 꽉 쥐었다'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제왕(帝王)다운 장담은 국가폭력(國家暴力)으로부터의 자유(自由)를 위한 투쟁의 도정에서 한국민주주의(韓國民主主義)가 거쳐야할 이정표가 됨직하다. 그런 인사소란은 비단 검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한국의 관료조직 전반에 참(眞)민주화의 저해(沮害)요인으로 잠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민주주의에 불가피한 진통인 것이 분명하다.
  
  우리의 젊은 검사(檢事)들은 3월 9일 노 대통령과 가진 진기(珍奇)한 토론에서 검찰의 수사 독립과 정치적 중립을 위해 법무장관의 검찰인사 제청권을 검찰총장에게 넘길 것을 당당히 요구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권력기관인 검찰에 대한 문민통제(文民統制)를 위해 법무장관을 두는 것'이라고 응수하면서 그 요구를 일축했다.
  
  우리의 젊은 외교관(外交官)들이나 군의 장교(將校)들이 그런 토론을 대통령과 가졌더라도 비슷한 요구와 일축으로 끝날만한 해프닝이었다. 그 직후 재임 4개월의 김각영(金珏泳) 검찰총장은 '부정부패 척결이라는 본연의 임무를 수행해 가기가 어렵다고 판단해 사퇴하기로 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하여 한해 남짓 사이에 세 번째 검찰총장이 들어서게 됐다.
  
  이와 같은 일화는 한국민주주의의 척박한 수준(水準)과 어처구니없는 국가경영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나타내고 있다. 국가(國家)의 태생은 기본적으로 폭력(暴力)이고 넓은 의미의 경찰(警察)에 속하는 검찰은 그런 폭력의 화신이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발달로 선진국들은 통치권자(統治權者)가 전제적으로 행사하던 폭력을 제도적(制度的)으로 통제(統制)하고 있다. 개발도상권 국가 기준으로 '민주화'에 크게 성공한 한국이 검찰총장의 임기를 2년으로 법에 정해 놓은 것은 그런 맥락에서였다.
  
  그러나 그 같은 임기는 김대중 정부로 사실상 사문화됐다. 임기 5년 동안에 4명의 검찰총장을 임명했다. 그 전에는 장관이 더 높은 자리라고 백날도 되기 전에 법무장관으로 승진하기 위해 검찰총장이 자리를 떠난 적도 있다. 그런 식으로 목자르기와 자리 이동의 희롱(戱弄)이 반복된다면 검찰인사의 제청권이 검찰총장에게 넘겨진들 본질적으로 달라질 것이 무엇이겠는가?
  
   노 대통령은 검사들과의 토론에서 검찰을 권력기관이라고 말했고 법무장관을 검찰권에 대한 통제수단이라고 강조했다. 국민의 입장에서는 대통령·법무장관·검찰총장·검사 모두가 권력기관이다. 권력의 총수인 대통령이 그렇게 언급한 것은 권력이 권력을 불신(不信)하고 검찰권력 구조상의 폐단(弊端)을 에누리없이 자인한 것이나 다름없다.
  
  대통령 자신이 임명한 법무장관은 믿을 수 있으나 대통령 자신이 임명한 검찰총장은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검찰총장을 '문민통제' 하에 두어야 한다는 공언은 대단한 모순이다. 소위 문민통제(civilian control)란 민간인 출신 국방장관의 임명과 국방부 소속 직원의 문민화(文民化)로 군부에 대한 통제를 지칭해야 타당하다.
  
  군사정부로부터 민간정부로 갓 바뀐 것도 아니고 검찰청이 군인집단도 아닌데 소위 '참여정부'가 말하는 '문민통제'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인치(人治)의 극명한 신봉(信奉)으로 법치(法治)를 정면으로 기피(忌避)한 발언이 아니었는지 의아스럽다.
  
  노 대통령은 우리 법무부와 검찰처럼 구조가 잘 못 짜여지고 정치화된 준사법기관이 세계의 다른 민주국가에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미국 같은 유일 초강대국의 경우도 법무장관이 바로 검찰총장이다. 따로 둘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영국에는 법무장관이 없는 셈이나 확실하게 검찰총장은 있다.
  
  우리는 겉으로 일본식 같지만 일본과는 기실 전혀 딴 판이다. 일본식 내각제 하에서 법무장관 자리는 늘 정치의 몫으로 법조경력과 무관하다. 일본의 '검사총장(檢事總長)'은 법무장관으로 승진하는 일이 없고 검찰직업의 온전성(integrity)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다. 그 자리에서 물러나면 다른 자리로 가지 않고 영원히 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검찰의 수사권 독립과 중립을 지킬 수 있고 검찰이 현직 총리까지 구속할 수 있었다.
  
  그러니깐 정치권력의 일부인 법무장관과 법강행(law enforcement) 집단의 수장인 검찰총장은 서로가 일상적 인사 및 조직운용상의 문제로 불편과 마찰을 야기할 소지가 없다. 한국이 사시(司試) 출신 법무장관과 사시 출신 장관급 검찰총장을 따로 두고 있는 것은 제왕적(帝王的) 대통령을 위해서인가? 관료적 집단이기주의의 소산인가? 사법적 정의(正義)의 효과적 구현을 위해서인가?
  
  46세의 비교적 젊은 여성을 법무장관에 임명한 것에는 잘 못이 없다. 민주주의를 하자면 남녀가 동등한 기회를 향유하도록 해야 하며 앞으로 40대 여성(女性) 대통령도 나올 수 있는 판에 30대 장관이 못나올 이유가 없다. 그녀보다 훨씬 나이도 많고 사시도 선배인 자를 검찰총장이나 법무차관으로 발탁한 것도 문제가 안 된다. 문제는 여태껏 제왕(帝王)의 시녀(侍女)로 봉사해 온 관료조직을 선거로 득세한 점령군이 무리하게 겁탈(劫奪)하려는 데에서 나왔다.
  
  미국처럼 그녀가 검찰총장을 겸했더라면 장관급 검찰총장과의 인사협의 자체가 필요하지 않았다. 일본처럼도 아니었기 때문에 소란이 야기됐다. 세계에서 가장 공자적(孔子的) 사회로 남아있는 한국에서 특히 서열(序列)을 필요악(必要惡)으로 유지할 수밖에 없는 직업관료들은 사회의 '민주화' 물결 속에서 새 임자를 찾고 있다. 5년마다 바뀌는 제왕적 대통령이 그 임자가 될 수 없는 것은 물론 승자(勝者)의 엽관(獵官)('… to the victor belong the spoils of the enemy'--노획물은 이긴 자의 몫이다)을 무작정 용인하지 않으려는 그들의 추세는 민주적 저항(抵抗)의 시단으로 봐야 한다.
  
  한국민주주의를 위해 제왕적 대통령의 인사권(人事權)에 레드라인(red line)을 그어야 한다. 사무관으로부터 국무총리까지의 법령상 인사권이 대통령에 속한다고 그 전체(全體)가 대통령 맘대로 라는 생각은 전제(專制)군주의 전횡(專橫)을 답습하려는 발상이거나 전체주의적 독재(全體主義的 獨裁)의 유형이다. 선진 민주국가에서는 관료조직의 주요자리 전부를 정권의 전리품(戰利品)으로 여기던 시대가 끝난 지 오래다.
  
  한국도 정권의 대표로 각 부처에 파견된 장관(長官)은 소관 정책(政策)의 총수(總帥)가 되는 일방 차관(次官)은 관료(官僚)의 수장(首長)으로 직업공무원의 인사와 행정을 맡아 법 집행의 파행 및 낭비를 없애도록 해야 한다. 꼭 노사정(勞使政)간의 협조 같은 것은 아니지만 정관(政官)간의 상호 공존(共存)·분업(分業)관계를 유지해야만 특히 정책의 방황·유실을 막을 수 있다. 더욱이 행정부의 대(對)국회 관계 등 대의(代議)정치의 국민적 수요가 늘어나고 있음에 비추어 부처별로 적정수의 정무차관(政務次官)과 정무직(政務職) 쿼터를 도입해 전승(戰勝)공로를 배분해야 직업관료를 능욕(凌辱)하지 않게 될 것이다.
  
  장관이 바뀔 때마다 며칠 후에 차관이 거의 다 바뀌는 나라는 세계에서 한국뿐이다. 소위 '민주화'를 실현한 한국의 정부 부처는 권위주의시대보다 심한 무주공산(無主空山)에 가깝다. 각 부처에 주인은 없더라도 관리인(管理人)은 있어야 한다. 잦은 개각보다 국가경영에 치명적으로 나쁜 것은 차관의 잦은 교체다. 차관 인사를 대통령의 권한사항으로 계속 여기는 한 한국민주주의는 그 장래가 있을 수 없다.
  
  검찰권을 포함한 관료(官僚)의 중립(中立)과 전문화(專門化)는 민주주의에 필수적(必須的)이다. 차관이 장관으로 승진(昇進)하는 것이 관례로 되지 말아야만 관료가 정치화되지 않는다. 차관을 지금처럼 별정직으로 삼지 말고 일반직 공무원의 정상(頂上)으로 만들어 보수(報酬)도 경력에 따라 장관보다 높을 수 있게 책정해야 한다.
  
  정책문제에서는 차관이 장관의 부하이나 행정에서는 서로가 반드시 상하관계가 아닌 것이 선진 민주국가의 상례다. 우리 정부는 그 수립 때부터 장관(長官)과 차관(次官)의 책임 및 분업관계를 의식하지 못해 장관의 이름조차 잘 못 붙여 놓았다. 예를 들어 외무장관(minister of foreign affairs)이라야지 외무부(部)장관(minister of the ministry of foreign affairs)은 옳지 않다. 직업관료집단의 서식처인 부(ministry)의 장(長)은 차관이다.
  
  제왕적 대통령은 그 인사권을 자발적으로 순순히 양도(devolve)할 리 없다. 법에 대통령의 권한으로 규정되지 않은 자리를 제외하고는 모든 자리를 싹쓸이하고 언제라도 모조리 바꿀 수 있기 때문에 권력자산의 감정가격은 천정부지다. 국가에 속하는 '권력자리'-검찰청·경찰청·국세청·정보원·금감원 등-는 말할 나위도 없고 사회에 속하는 '권력자리'-방송언론매체와 금융기관 등-도 그 사정권 안에 들어간다.
  
  '햇볕'게이트에 대한 검찰수사 포기로 반역죄(反逆罪)를 묵과하고 TV 등 전파매체의 독점으로 국민의 눈과 귀를 흐리게 하는 것은 물론 각종 금융관련 게이트의 배후실세가 되기도 한다. 폭력의 방패로 무차별한 엽관 수단으로 여론조작의 도구로 또한 금력의 축적 다리로 그 위력을 계속 발휘하도록 방치할 것인가?
  
  한국민주주의의 당면 목표는 제왕적 대통령을 민주적 대통령으로 개종시키는데 두어야 한다. 종래의 소위 '민주화운동'은 왕(王)에 가까운 대통령을 국민의 소리(vox populi)로 쫓아내고 민주적으로 뽑는 데만 기여했고 민주적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는 실패했다. 이제 제왕적 대통령의 잡식욕(雜植慾)을 억제하기 위해 그의 인사권에 울타리를 치는 참(眞)민주화 운동이 필요하다. 그의 독선·독단·독점·독식에 허여(許與)된 독재적 악(惡)을 뽑아내는 국민의 장정(長征)을 시작할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