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기자는 틈나는 대로 시내에 있는 한 재고도서할인매장에 들려 타임-라이프社에서 나온 < 라이프 제2차세계대전> 시리즈를 사들이고 있다.
   모두 30권으로 된 이 책들은 유럽전과 태평양 전쟁에 대해 다각도로 쉽고 재미있게 서술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풍부한 사진자료는 이 책의 커다란 매력이다. 대학시절 학교도서관에서 이 책들을 재미있게 읽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책이 절판된 것이 늘 아쉬웠는데, 우연히 그 책들이 할인매장에 나와 있는 것을 보고는 눈이 뒤집혀(?) 퇴근길에 몇 권씩 사들고 귀가하고 있다.
  
   기자가 이 시리즈에서 가장 인상깊게 읽은 부분은 패전을 앞둔 상황에서 독일군 장병들의 용전분투를 다룬 부분이다. 물론 히틀러의 침략전쟁에 동원되어 독일군들이 저지른 악행들은 부인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시기 독일군 장병들의 용전은 전우애란 무엇인지, 그리고 軍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고 싸워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1945년 1월 23일 소련군이 독일領 東프로이센으로 진입했다. 1942년 6월 22일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한지 2년 7개월만에 드디어 戰火가 독일 땅으로 옮겨 붙은 것이다. 독일 땅으로 진입하면서부터 소련군은 獨蘇전쟁 개전 이래 희생된 2천만 명의 소련 軍民을 대신하여 피의 복수에 나섰다. 곳곳에서 학살·강간·약탈이 자행되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독일인들이 치뤄야 할 業報였다.
  
   공포에 질린 독일인들은 5세기 「훈족의 침입」을 떠올리며 서쪽으로 서쪽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이를 두고 「제2의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와중에서 수많은 인명들이 희생되었다. 발트해를 통해 서방으로 탈출을 시도하던 피난민들을 태운 배가 소련 해·공군의 공격을 받아 水漿(수장)되는 일도 非一非再했다. 작년 독일에서는 당시 9000여 명의 피난민이 수장된 빌헬름 구스틀로프호의 비극을 그린 귄터 그라스의 소설 「게걸음」이 베스트 셀러가 되기도 했다.
  
   제3 제국의 종말이 가까워졌다는 것이 분명해지면서 적지 않은 장병들이 군복을 벗어버리고 피난민 대열에 합류했다.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동부 전선의 독일군들 가운데는 히틀러가 자살하고 베를린이 함락되어도 한동안 총을 놓지 않는 장병들이 더 많았다.
  
   그들은 왜 그렇게 결사적으로 싸웠던 것일까?
  우리는 그 이유를 당시 전투에 참가했던 독일군 장교들의 말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다.
  『大敗를 맛보는 이 숙명적인 순간에 동부전선에다 전우를 남겨둔다는 것은 그 어느 지휘관도 생각할 수 없었다. 우리는 오로지 동부전선의 전우들이 영국군과 미군의 점령지 안으로 철수할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 싸워야만 했던 것이다』
   『우리가 단 일분이라도 더 버텨낼수록 더 많은 전우와 시민들이 서쪽의 영·미군 점령지역으로 탈출할 시간을 벌 수 있다』
  
   당시 독일군 장병들이나 독일 국민들은 영·미군의 수중에 떨어질 경우에는 그런대로 국제법에 합당한 처우를 기대할 수 있지만, 소련군의 포로가 될 경우에는 인간 이하의 잔혹한 대접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소련군에 대한 항전을 포기하지 않았던 독일군 장병들은 전우와 시민들이 살 길을 열어주기 위해 자신들의 생명을 걸었던 것이다.
  
   4월29일 자살한 히틀러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된 칼 되니츠 제독 역시 취임하자마자 『나에게 주어진 가장 큰 책임은 소련군이 가져올 대파멸로부터 단 한 사람의 독일인이라도 더 구출하는 일』이라고 선언했다. 되니츠는 해군을 동원하여 피난민들을 실어나르는 한편, 연합군과 講和(강화) 협상을 벌이면서는 지연전술을 구사하여 될 수 있는 한 많은 군인과 시민들을 영·미군 지역으로 탈출시킬 시간을 벌어보려 애썼다.
  
   「되니츠 정부」는 「殘骸(잔해) 정부」라는 별명에서 보듯 출범한지 불과 8일만에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을 했고, 그로부터 두 주 후 연합군에 의해 강제 해산된 껍데기뿐인 정부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국민의 생명 보호」라는 정부의 가장 기본적인 책임을 이행하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패망의 순간, 한 사람의 전우, 한 사람의 국민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처절한 몸부림을 쳤던 독일군 장병들과 되니츠 정부를 떠올릴 때마다 기자는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된다.
   『탈북자, 혹은 북한 人權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오늘날 한국 정부는 되니츠 정부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