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조선닷컴에서 가져온 것이다.
  제목은 여기서 바꾼 것이다.
  
  한국경제의 가장 큰 숙제는?
  
   ▲ 조선일보 김광현 부국장
  
  
  안녕하십니까. 김광현 부국장입니다. 지난 주에 저의 관심을 끌었던 경제뉴스는 「국내 대기업들이 국내투자는 사실상 동결하고 해외로 계속 눈을 돌린다」는 보도와, 이헌재 전 재경부장관의 한 CEO모임 연설내용이었습니다. 「국내·외 시장 참가자들이 신정부의 정책을 불투명하다고 느껴 불안해하고 있다. 정부가 경제부총리나 금감위원장 등에 온건파 인사들을 배치하기는 했지만 우려를 해소하기엔 충분치 않으며 철도노조 협상 과정에서 불안감은 오히려 강해졌다」고 한 연설 말입니다.
  이중 대기업들의 국내탈출로 인한 산업 공동화 우려는 새로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삼성전자 같은 초우량 대기업들까지 몇년전부터 내부적으로 검토한다는 소문이 흘러나올 정도였으니까요. 다만 이런 이야기는 워낙 민감한 사안이라 검토보도가 나와도 관련기업들은 극구부인하기가 일쑤였지요. 현재의 분위기로 볼 때 관련기업들은 설사 그런 마음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표출하기가 몹시 힘들겁니다. 그랬다가는 당장 벌떼같은 공격에 직면하게 될테니까요.
  
  제프리 존스 암참(AMCHAM) 명예회장 하면 여러분들도 잘 아시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그의 두가지 점에 정말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의 「가증스런」 한국어 실력입니다. 부인이 한국인이라서 그런지 그는 왠만한 한국인도 잘 모르는 속어, 비어까지 능숙하게 구사합니다. 두번째는 그가 한국경제인 못지않게 한국경제를 속속들이 꿰뚫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냥 단순히 꿰뚫고 있는 게 아니라 한국기업인들이 골프장 로비를 할 때 하는 은밀한 행위(?)들까지 자세히 알고 있더군요. 그런 그가 작년인가 어디에선가 했던 발언들을 우선 제가 그대로 한번 옮겨보겠습니다.
  
  『2~3년안에 한국의 주가를 3000 포인트대로 올릴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기업의 투명성강화이고, 두번째는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여야 합니다. 미안한 얘기지만 허위회계장부를 작성한 상장사 사장 몇 명은 구속시켜야 합니다. 한국의 2500여 상장및 등록기업중 진짜 믿을수 있는 회사는 5개도 안됩니다. 미국도 원래 투명한 경제가 아니었습니다. 1929년 대공황이후 증권관계법과 세법을 엄격집행하면서 그렇게 됐지요. 미국에선 한번 구속되면 10년은 삽니다. 그러나 한국에선 2~3개월안에 대개 풀려나더군요.』
  
  『미국에는 또 먼데이모닝 쿼터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풋볼 보고 다음날 이러쿵 저러쿵 비난하면서 왜 그 순간에 그런 선택을 했느냐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이것이 너무 심합니다. 제일은행 매각, 잘 된 일입니다. 그것으로 한국경제가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싸게 팔았느냐고 뒤로 손가락질을 합니다. 이것이 한국의 전문가들입니다. 한국언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사후비판 때문에 결정을 못하게 되고, 그러면 경제는 마비됩니다.』
  
  기업투명성 얘기나 한국인들의 「남 헐뜯기」는 그가 자주 언급하던 것이고,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것은 노사관련 언급입니다. 실제 그를 비롯한 외국기업인들을 사석에서 만나 한국경제의 가장 큰 숙제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한결같이 「노사관계」라고 거침없이 말합니다. (물론 공식 코멘트를 요구하면 단번에 「노사관계」는 빼달라고 요구합니다. 외국기업인들조차 이 문제는 공식언급이 두려운 민감한 문제이더군요.)
  
  물론 이런 식으로 한국의 노사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하면 당연히 엄청난 반발과 비난에 부닥치게 됩니다. 당장에 권기홍 노동부장관부터 지난주 한 모임에서 『지난 몇년간 강해졌다지만 그래도 아직은 전반적으로 볼때 노조가 약하다. 재계가 여전히 더 세다. 특히 중소기업은 노조가 약하다. 반면 대기업의 노조는 많이 강해졌다』는 식으로 논리를 펴더군요. 아직은 전반적으로 노조의 힘이 더 세질 필요가 있다는 논지였습니다.
  
  권 장관의 말이 그렇게 틀리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대기업 근로자들에 비해 중소기업이나 영세기업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의 삶은 아직도 비참한 구석들이 많은 게 사실이고, 이런 근로자들이나 영세서민들을 위한 정책은 계속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보건대 DJ정부 이후 강해지기 시작한 노조의 영향력과 발언권은 현정부 들어 더욱 강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인 것같습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미 역전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고도 평가하더군요. 그러나 기업도 언론도 이 문제는 거론조차 못하는 분위기입니다. 어느 언론이 요즘 세태에 노사문제를 정면거론할 수 있겠습니까. 그랬다가는 「수구보수」에 「친재벌」에 「반개혁」이라며 당장 매타작을 당하기 때문이지요.
  
  설령 아직 기업이 노조보다 더 세다고 하더라도 기업인들의 기업의욕이 최근 몇년간 현격하게 위축되고 있는 점은 진짜 심각한 문제로 보여집니다. 한 유명 벤처기업인은 『몇년 째 계속되어온 불황을 견디느라 가뜩이나 힘이 드는데, 요즘에는 기업하는 게 꼭 무슨 죄나 짓는 것 같다. 이는 현장 기업인들이 피부로 느끼는 체감경기가 심각하고, 자본시장과 실물경제의 앞날이 불안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반(反)기업 정서에 따른 기업인들의 의욕상실이 더 큰 요인인 것 같다』고 말하더군요.
  
  반(反)기업 분위기 확산, 능력을 넘어선 과도한 평등주의, 과도한 정부개입과 무늬뿐인 규제철폐, 정치권의 청탁은 물론 시민단체나 노조 등의 지나친 간여, 지방자치단체나 각종 자선단체로부터 쏟아지는 기부 찬조 요구, 이를 아주 당연시하는 사회분위기, 사회적으로 응분의 대우와 존경을 받지 못하면서 기부만을 강요당하는 풍토 등등...
  
  아무리 왕성한 의욕을 가진 기업인이라도 이 정도 되면 외국으로 도망가고 싶은 생각이 절로 나겠더군요. 회사돈을 쌈지돈으로 여기고 뇌물이나 갖다바쳐 일확천금을 꿈꾸는 그런 기업인들은 당연히 우리가 비판하고 도태시켜야 겠지만 건전한 상식을 가진 기업인들의 기(氣)마저 꺾어버린다면 우리 경제를 어디로 끌고 가자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몇년전부터 개인적으로 뚜렷이 느끼고 있는 건데, 지난 정부나 현 정부의 핵심관계자들 또는 국내 좌파-진보진영의 이론가란 사람들은 유럽 또는 독일식의 이른바 「사회적 시장경제체제」를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모델로 은근히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이들의 발언이나 정책들에서 그런 것이 뚜렷이 느껴집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합친 모델, 무조건적인 성장보다 인간적인 삶을 지향하며 복지와 분배와 평등을 보다 강조하는 모델입니다.
  
  저도 독일에 특파원으로 3년 있으면서 한때 이 모델에 심취(?)한 바 있습니다. 굳이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굶어죽을 걱정은 별로 없고, 한달이고 두달이고 1년에 한번씩 깊고 안락한(?) 휴가를 가고, 주5일제는 물론 하루 8시간이내 근로가 확실히 보장되고, 요람에서 무덤까지가 거의 대부분 보장되는 체제였기 때문입니다. 지구상에서 인류가 달성해놓은 천당에서 가장 가까운 체제로도 한때 보여지더군요. 독일의 좌파언론들이 미국과 영국경제를 「인간을 한없이 착취하는 체제」「천민자본주의의 전형」등으로 몰아부칠 때는 저도 같이 속으로 환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곧 얼마가지 않아 그 체제의 문제점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과도한 복지와 분배로 인해 경제와 사회전체의 비효율이 끝없이 극대화되는, 지금의 독일과 프랑스 경제처럼 계속 뒤 쳐지는 그런 모양 말입니다. 그래서 영국과 네덜란드는 물론 스웨덴 등까지 오래전부터 노선전환을 시작했습니다. 과도한 복지를 줄이고 효율을 보다 중시하는 그런 개혁입니다.
  
  그래도 이들 유럽각국은 국민소득이 이미 2만달러를 넘고, 경제수준이나 기술수준 모두 이미 선진국에 진입한 나라들입니다. 나눠줄 파이가 충분한 나라들이란 얘기죠. 그런 나라들인데도 일은 적게 하고 복지는 과도한데 따른 부담을 못이겨 개혁이란 이름으로 노선전환에 돌입한 겁니다.
  
  국민소득이 이제 1만불선에 간신히 턱걸이한 한국같은 나라가 벌써부터 이렇게 덜 일하고, 더 놀려고만 하고, 나눠줄 것만 요구한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심히 걱정된다는 얘기입니다. 국민의식이 그렇게 바뀌어 가더라도 「우리는 아직 그럴만한 수준이 아니니까 좀더 허리띠를 졸라매자. 그리고 어느 수준이 되고나면 보장해준다」고 국민들을 설득하고 달래야 하는것이 이른바 「지도자」들의 몫인데도 불구하고, 요즘 어느 지도자가 이런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물론 아직까지 우리경제는 적어도 외형상 괜찮아 보입니다. 반도체 조선 철강 정보통신 등 일부 분야에선 세계최고의 경쟁력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일본경제보다 훨씬 낫다는 칭찬도 들립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몇개 재벌, 몇개 대기업만 세계적 경쟁력을 갖고 있을 뿐이지 나머지 대부분의 업종이나 기업들은 취약하기 그지 없습니다. 세계시장에서 중국과의 경쟁에서 계속 밀린다는 보도도 연일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잘하고 있는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LG전자 같은 우량대기업들마저 이제는 「탈출」을 궁리하고 있다면 정말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노조의 힘이 계속 강해지고 있다면 그럼 근로자들은 잘 살게 되었을까요?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비정규직의 비중이 이미 일부에서 60%에 달했다고 주장할 만큼 모두의 일자리가 오히려 불안해지고 있습니다. 정부 경제부처의 한 핵심당국자는 이렇게도 말하더군요.
  
  『지난 91년부터 2001년까지 10년동안 제조업 취업자수는 오히려 83만명이나 줄었습니다. 임금이 오르고 노동조건이 까다로워지니 사람을 뽑지 않는거죠. 기업의 인건비는 10년전이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거의 같습니다.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도 모두들 정면거론을 하지 않을려고 해요. 』
  
  노동문제전문가인 단국대 김태기 분쟁해결연구센터소장의 견해도 들어볼까요. 『대체로 볼 때 1980년대 후반 이후 대기업은 노사관계 불안으로 인건비 부담이 커졌으며 이를 해소하기 위해 하청이나 용역 등의 활용을 늘렸습니다.그 결과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정규직과 비정규직간의 임금 및 근로조건 격차가 커지고 반면 중소기업은 인력난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문제점은 법·제도의 강화만으로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절대다수의 근로자가 중소기업에 종사하고 있고 비정규직 근로자의 비율이 정규직보다 높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최근들어 새 정부의 시각이 다소나마 변화하기 시작하는 조짐이 있다는 점입니다. 굳이 여기서 그 구체적인 예를 들지 않더라도 경제인 여러분이라면 이런 변화들을 다소간은 느끼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완전한 시각의 중립화가 이루어졌다고 보는 경제인들은 여전히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도 또 기대하기 어렵겠지요. 시각이 자꾸 어느 한쪽으로 쏠릴 때마다 경제가 어려워지는 현상이 앞으로 반복될지도 모르겠군요.
  
  한 기업인은 『어떨 때 보면 정부는 현 경제상황이 어렵다고 판단하다가도, 또 어떨 때는 「언론이 경제위기를 부추긴다, 기업들이 엄살을 부린다」고도 인식하더라』고도 말했습니다. 정말 부추기는 것이나 엄살일까요?
  
  우리 사회의 빈부격차문제, 영세서민들의 문제는 심각한 게 사실입니다. 또 이 글도 노조와 근로자 탓만 하자고 쓰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이렇게 자꾸 기업의욕이 꺾이고 밖으로 도망가려는 심리가 횡행하는 것이 문제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문제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기업이 다 도망가고 쓰러지고 나면 앞으로 뭘 먹고 살겠다는 겁니까. 전부 음식점 내든지, 아니면 옛날식으로 농사지으러 모두 낙향할까요. 해마다 학교에서 쏟아지는 수십만명의 일자리는 어떻게 보장합니까.
  
  『IMF를 항생제라고 하는데, 항생제는 그래도 낫다. 나는 모르핀이라고 생각한다』고 자조하던 한 경제학자의 말이 가끔씩 되새겨지는 요즘입니다.
  
  (김광현 드림 khk@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