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조선일보 정치부 김인구 기자의 평양취재 여담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것이다.
  
  통일부를 출입하면서 남북관계를 취재하고 있는 김인구 기자(ginko@chosun.com ) 입니다. 오늘은 최근 평양에 다녀온 얘기를 할까 합니다.
  
  “승객 여러분 잠시후 저희 비행기는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하겠습니다.” 여 승무원의 방송이 끝나자 차장 밖으로 나즈막한 야산과 이제 모내기를 시작한 듯한 논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4월27일 오전 11시쯤 평양 순안공항 위에는 옅은 안개만 드리웠을 뿐 화창했습니다. 잠시 후 남북 장관급회담에 참가하는 남측 대표단과 취재진을 태운 아시아나 전세기는 사뿐히 순안공항 활주로에 내려 앉았습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지난 순간 3년전 첫 평양방문 때가 생각났습니다. 2000년 8월말 2차 남북 장관급회담 취재단 일원으로 평양을 방문할 당시, 이미 북한 당국으로부터 한 번 기자의 방북이 저지 당한 경험이 있어, 조마조마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엔 그동안 같은 북한 땅인 금강산을 여러 차례 방문했던 경험 때문인지 편안했습니다.
  
  ▲ 제10차 남북장관급회담이 지난달 27일부터 29일까지 평양에서 열렸다.
  
  
  기자의 북한방문은 다른 언론사 기자들과 달리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지난 1998년11월19일 현대아산의 금강호가 역사적인 금강산 관광을 위해 북한의 장전항에 처음 닻을 내렸을 때, 기자는 북한 당국으로부터 입북이 거부됐습니다. 북한 당국은 조선일보가 지난 97년 6월에 게재했던 사설(社說)에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비난’했다는 이유로 조선일보에 대해 방북 취재 거부는 물론 ‘폭파’ 위협까지 했었습니다. 때문에 첫 금강산 관광 때 남한의 200여명의 기자들 중 조선일보 기자들은 KBS 일부 기자, 통일부 직원과 함께 하선하지 못했습니다. 현대측이 북한을 설득해 관광 마지막날인 3일째 하루 하선해 금강산을 잠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2000년 6월26 남북 정상회담 직후 처음 열리는 남북 적십자회담에 기자는 남한 공동취재단으로 선발돼, 금강산으로 향했으나, 또 다시 북한당국으로부터 입북 거부를 당했습니다. 당시 기자는 회담 취재를 못하고 꼬박 사흘동안 금강호에 남아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우리 정부가 북한 당국에게 ‘공동취재단’은 특정 언론사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며, 남한 회담 대표단의 일원이기 때문에 누구든 방북을 거부할 수 없다고 설득, 2차 장관급회담에는 평양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후 평양과 금강산 등 북한 지역에서 열린 각종 회담과 행사에 조선일보 기자들의 취재가 허용됐습니다.
  
  평양은 3년전보다는 활기가 있어 보였습니다. 도착한 날이 일요일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공항에서 평양 시내까지 가는 길에 많은 사람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어린 학생들도 무리를 지어 어디론가 가는 모습들이 보였고, 길가에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젊은이들, 아이의 손을 잡고 바삐 가는 부모들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어린 학생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는 것과 관련, “학생들은 일요일마다 ‘좋은 일 하기 운동’의 일환으로 마을 일을 돕고 있습니다”라고 기자의 안내원이 설명해주었습니다.
  
  북측 안내원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걱정은 ‘사스’(SARS·중중급성호흡기증후군) 였습니다. 이미 평양에서 열기로 했던 각종 남북 교류행사들이 취소됐다고 했습니다. 사스 발원지인 중국의 베이징(北京)을 거쳐 평양에 들어오는 사람들만 차단된게 아니라, 전세기로 평양에 바로 들어오는 남한 사람들도 당분간 못들어 온다고 했습니다. 장관급회담 대표단만 예외라는 것이었습니다. “장군님(김정일 국방위원장)께서 상급(북쪽에선 장관급을 상급이라고 합니다)회담 대표단만 예외적으로 들어오도록 허락하셨습니다”라고 북측 안내원들이 설명했습니다.
  
  대표단들은 순안공항에 도착 전세기에서 내리기 전에 북측 검역의사 2명으로부터 간단한 체온 검사를 받았습니다. 북측 의사들은 자리에 앉아 있는 남측 대표단에게 일일이 체온계 한 개씩 나눠주고, 겨드랑이에 끼고 있으라고 했습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런 체온계를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귀 속에 갖다 대서 체온을 체크하는 체온계를 사용하지만 북한에선 아직도 옛날 우리가 사용하던 가느다란 막대 체온계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시간도 많이 걸렸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우리측 대표단의 제의로 이번 회담 기간중 서울에서 즉각 현대식 체온계 4~5개를 가져다 북측에 제공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남측 대표단은 사스 때문에 다른 평양 회담 때와 달리 숙소와 회담장인 고려호텔 밖으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다만 남측 공동취재단 10명 중 기자를 제외한 9명은 모두 평양이 처음이라, 비공식적으로 회담 둘째날인 28일 오후 1시반 정도 버스에 탄 채 평양시내를 둘러보았습니다. 북측이 비공식적인 행사라고 여러 차례 강조해 이 사실은 공동취재단이 서울로 보내는 기사에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처음 평양 시내를 구경했던 다른 취재단원들은 평양의 첫 인상이 좋았다고 했습니다.
  
  고려호텔 내 직원들은 전에 없이 친절하고, 열성적이었습니다. 호텔내에서 술과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은 지하1층의 가라오케와 1층의 호프코너, 2층의 바(Bar) 등 세 곳 정도입니다. 작년 7월 물가와 임금을 인상하는 조치 이후, 이들 코너에서 일하는 ‘복무원’들의 월급이 성과급제로 바뀌어 서로들 ‘손님’ 유치에 열을 올렸습니다. 회담이 열리는 기간 호텔에는 남측 대표단과 러시아 사람 6명 외에 투숙객이 전혀 없었습니다. 사스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북측 사람들이 드러내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이제 북한에선 돈이 없으면 술 한 잔이라도 사 먹지 못할 형편이 됐다고 합니다. 작년 7월1일 조치 이후 모든 게 돈으로 구매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공동취재단은 기자실이 2층 바와 가까이 있어, 이 곳을 자주 이용했습니다. 20대 초반의 여성 복무원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북측 안내원들에게 맥주 한 잔이라도 대접하기 위해서였습니다. 2층 바에서 만난 2명의 여성 복무원들은 “월급 만으로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고 했지만, 남측 대표단과 취재단을 안내하는 북측 요원들이 우리와 맥주 한 잔 먹고 돈을 내는 장면은 보질 못했습니다. 물론 우리가 손님이긴 했지만, 인사치레로 언제부턴가 남쪽 사람들이 북측 사람들에게 술 한 잔을 사는 게 관례처럼 됐습니다.
  
  “이라크와 우리는 다릅니다. 우린 그렇게 무너지질 않아요. 후세인은 큰 소리 치더니 힘 한번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무너지다니… 거참? 그리고 우리가 이라크전을 보고 (겁이 나서) 미국과 회담에 응했다고 남조선 신문들이 쓰던데, 우릴 잘 모르고 하는 소리야. 우린 그렇게 약하지 않아. 우리가 뭐 미국을 무서워 하나…. 우린 회담을 하자는 게 기본 입장이야. 미국이 우리 제의를 받은 거지.”
  
  
  첫날 회담 진행중 회담장 밖에서 만난 북측 안내원들은 한결같이 이라크 패전을 화두에 올렸습니다. ‘핵 보유’에 대한 이야기도 했습니다. 기자가 만난 북측 인사는 북측 대표단에서 비교적 중량급이었습니다. 이 인사는 그동안 여러 차례 만나 대화를 나눈 적이 있어, 편안하게 대화를 하는 사이입니다. 그는 미국과 상대하기 위해선 그러한 강력한 무기를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핵무기를 갖고 있다”고 직설적으로 말은 하질 않았지만, 시인도 부인도 않는 상황에서 “미국과 맞서기 위해서…”라는 말은 했죠.
  
  이들은 노무현 대통령이 6·15 공동선언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 데 대해서도 불만을 털어 놓았습니다. “도대체 남쪽 새 정부는 공동선언 이행하자는 것인가 말자는 것인가. 왜 말을 못하나? 이종석(현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차장)이가 지난 달(3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 학자 통일포럼에서 발표한(이 차장은 참석치 않고 원고만 발표됐나 봅니다) 글에도 이 말이 빠져있어. 그리고 데프콘 2를 발령하고, 우리와 긴장을 조성하고…. (대북송금) 특검은 왜 하는 거야.” 그가 털어놓은 불만은 이미 우리가 짐작하고 있던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기본발언(기조연설)에 공동선언 이행과 관련된 언급이 많이 들어있고, 구체적인 교류협력 사안도 담았다고 했습니다.
  
  또 다른 인사에게 기자가 10차 장관급회담을 북측이 아무런 해명도 없이 일방적으로 연기했던 일(당초 4월7일부터 하기로 합의가 됐었습니다)을 떠올리며, “앞으로 회담을 열기 어려운 사정이 생기면, 솔직하게 미리 이야기하고 다음에 언제 하겠다고 알리는 게 신뢰를 쌓는데 도움이 된다”고 하자, 그는 “그래 남쪽도 데프콘 2를 발령하려면, 미리 (그런게 북쪽과 무관하다는 것을)미리 알려주는 게 좋지 않나”고 했습니다. 북한의 대남(對南) 파트 인사들은 남쪽과의 관계를 지속시키길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느꼈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직분과 직결된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살기 위해 그렇게 나오는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남북관계를 지속해야 자신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29일. 회담이 끝나는 날 아침 평양에는 밤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출근길의 시민들이 대부분 우산을 들고 바삐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비닐 우산이 아닌 색깔 우산들을. 북한 사람들을 자주 접해 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북한 사람들은 비가 와도 우산을 잘 쓰질 않습니다. 우산이 없어서 그렇겠죠. 금년 2월 금강산에서 6차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할 때에도 가는 진눈깨비가 내렸는데, 우산을 쓰고 있는 사람은 모두 남쪽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날 만은 달랐습니다. 우산을 쓰지 않는 사람 찾기가 더 어려울 정도였죠. 뭔가 달라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북쪽도 좋은 것, 편안한 것, 깨끗한 것, 쉬운 것을 찾기 시작했다는 의미로 생각됐습니다. 호텔 건너편 일반인들의 아파트에 전등도 3년전보다 훨씬 많이 켜졌고, 호텔의 엘리베이터 속도도 빨라졌습니다. 누구도 확실하게 답을 주질 않았지만 전력 사정은 분명 3년전에 비해 좋아진 것 같았습니다. 남쪽 대표단에게 보이기 위해 그렇게 한 것같지는 않습니다. 북쪽도 더 이상 형편이 어려운 것을 숨기고 그러진 않기 때문이죠. 그러나 평양의 밤은 여전히 어두었습니다. 가로등이 많이 켜져 있지 않아서죠. 북측의 전력사정에 대해선 지속적으로 살펴봐야 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회담에선 또 다시 양측 대표단간 신경전이 이어졌습니다. 핵 문제를 공동보도문에 어떻게 담느냐하는 문제로 서로 팽팽히 맞섰던 것입니다. 이와 달리 회담장 밖에서 남측 취재단과 북측 복무원, 안내원들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어갔습니다. 그들이 남측 취재단에게 보인 친절이 반드시 우리가 갖고 있는 ‘돈’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물론, 남쪽 손님들을 ‘봉’으로 생각하고 있는 측면도 있습니다. 술 사달라, 담배 사달라 요청도 하고, 심지어 자신들이 먹은 냉커피 값을 기자에게 대신 내달라고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 장면들을 보는 북쪽의 어린 여성 복무원들의 표정도 썩 좋지 않았고요. 그렇지만 그만큼 남쪽의 영향력이 북쪽에게 강해지고 있음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최소한 고려호텔내 복무원들에게서 ‘조선일보’에 대한 비난은 사라졌습니다. 그들이 살아가는 데 그런 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한 여성 복무원은 남쪽 기자가 설명해주는 바깥 쪽 ‘삶의 정보’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당’ ‘고난의 행군’ ‘체제’ ‘사상’… 이런 단어를 그들에게서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떠나기 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미래가 당신들에게 달려있다”고 말하자, 알듯 모를 듯한 표정으로 얼굴을 끄덕였습니다. 그들과 새벽 3~4시까지 나눈 대화를 다 소개할 수 없지만, 분명 그들은 살기 위해선 변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다음 평양 취재 때 이러한 생각들이 얼마나 더 자랐는지 확인해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