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이 金正日을 붕괴시킨다
  
  지난 해 10월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과 동행하여 평양에 갔던 미국 워싱턴 포스트紙 기자 스티븐 머프슨(Steven Mufson)이 쓴 ‘올브라이트가 보지 못한 평양’이란 題下의 기사는 지난 해 6월 頂上회담 때 평양에 갔던 우리 기자들이 쓴 기사와는 크게 달랐다.
   워싱턴 포스트 기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한 여인이 길에 쏟아진 옥수수알을 쓸어담고 있었다. 식량부족의 이 나라에선 옥수수알은 버리기엔 너무나 귀중한 것이다. 더 멀리 가자 두 군인들이 주저앉은 소형트럭의 엔진 부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런 장면들은 더러 볼 수 있는데 무너진 경제를 상징하는 것 같다. 그보다 더 멀리 가보니 수천명의 사람들이 한국쪽으로 나 있는 텅빈 고속도로의 길가를 하염없이 걷고 있었다. 그들은 평양에서 구입한 작은 물건뭉치를 집으로 가져가기 위하여 그들이 지닌 유일한 교통수단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머프슨 기자는 안내인을 따돌렸는지 평양 부근의 여기저기를 찾아다니면서 북한사람들의 생활상과 경제상태에 대해 실감 있는 증언들을 들었다. 이런 대목도 있다.
  <곧, 사람들은 지하철로 들어가기 위하여 줄을 설 것이다. 가정에선 온기를 찾을 수 없어 지하철에 머물면서 몸을 녹이는 것이다. 한 거주자는 1,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공중 수영장에 들어가기 위하여 줄을 선다고 한다. 온수 샤워를 하기 위해서란 것이다. 몸을 따뜻하게 간수하지 못한 사람들은 동상에 걸려 병원신세를 지고 발구락과 손가락을 잘라내는 일이 자주 있다. 그러나 병원에 가는 것도 위험하다. 마취제가 없어 수술이 매우 어렵다. 꼭 수술을 해야 할 경우 의사들은 환자에게 술을 한 잔 주고는 최선을 기대하면서 수술을 한다는 것이다. 북한의 10개 병원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하여 와 있는 독일응급의사 그룹의 노르베르트 폴러첸씨는 “어두워진 다음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겨울에는 환자들이 수술대 위에서 떨고 있다”고 했다.
  모든 평양사람들이 고생하는 것은 아니다. 볼링장은 암시장에서 돈을 번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다. 당과 군대의 고위직 또는 충직한 지식인이란 점 때문에 특혜를 받는 이들은 외국인들이 ‘자금성’(the Forbidden City)이라고 부르는 곳에 살고 있다. 그곳으로 통하는 도로는 보통시민들과 외국인들에겐 봉쇄되어 있다. 그러나 그곳을 출입하는 사람들이 청색 벤츠차를 타고다니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김정일은 그곳에 살고 있지 않고 아무도 그가 어디에서 사는지 이야기하지 않는다. 폴러첸씨는 “그것은 하느님이 어디에 사는지 묻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나는 살아 있는 기자정신을 보았다. 평양의 진실을 알고자 하는 기자의 직업윤리가 만들어낸 아주 훌륭한 기사이다. 길지 않은 기사지만 오늘날 김정일 정권이 당면하고 있는 딜레머와 북한주민들의 참담한 생활상을 알게 해준다. 이 글은 긴 논문보다도 더 쉽고 생생하게 북한의 실상을 전해주는데 이 기사에 깔린 것은 휴머니즘이다. 억압당하고 굶주리고 있는 북한주민들에 대한 동정심, 그래서 이 기사는 따뜻하게 느껴졌다.
  이 기사와 지난 해 6월의 평양정상회담을 보도한 우리 기자들의 기사를 비교하면 얼굴이 화끈해진다. 우리 기자들은 金正日이 보여주고싶었던 것과 金大中 대통령이 희망하는 범위안에서만 보도했다. 우리 기자들은 대체로 수십만의 인파가 동원된 평양의 조작된 환영을 진정한 민족애의 환영인 것처럼 보도했다. 거기엔 한 독재자의 말 한 마디에 따라 울고 따라 웃는 연극배우로서의 평양사람들에 대한 동정이 없었다.
  우리 기자들은 사실확인 정신과 비판정신을 포기함으로써 결국 金正日의 대변인처럼 되어 그가 제작, 감독, 주연한 드라마의 조역을 충직하게 해냈다. 그리하여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김정일의 심리전이 먹힐 수 있도록 했다.
  
  위에 소개한 글은 내가 지난 해 10월에 나의 웹사이트(www.natizen.com)에 올린 것이다. 그 석 달 뒤 필자는 위의 기사에 나오는 노르베르트 폴러첸씨를 서울의 조선 호텔에서 만나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위의 기사는 당시 평양에 있던 폴러첸씨가, 올브라이트 장관과 동행한 미국 기자들이 묵고 있던 호텔로 찾아가 기자들의 안내를 자원함으로써 취재가 가능했던 것이다. 폴러첸씨는 외국 기자들을 이틀 동안 데리고 다니며 평양 안팎의 여기저기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필자가 감탄한 워싱턴 포스트 기자의 취재 정신도 알고보면 폴러첸씨의 도움으로 빛난 것이다.
  폴러첸씨를 따라다닌 기자들이 쓴 기사들은 올브라이트의 평양 방문에 찬 물을 끼얹었다. 김정일을 이상한 사람으로 만든 이들 비판 기사들은 클린턴 당시 대통령의 후속 평양 방문 계획에 제동건 것이다. 독일의사로서 북한에서 구호활동을 하고 있던 폴러첸씨는 이 기사가 한 이유가 되어 북한에서 추방당한 뒤 곧장 서울로 왔다. 서울을 근거지로 해서 그는 대단한 활동을 했다. 서방 언론의 서울 특파원들에게 북한의 인권 탄압 사태를 전해주고 북한 사정에 생소한 기자들을 데리고 연변 지역을 다녀오는 등 폴러첸씨는 세계와 북한을 이어주는 창구 역할을 하고 있다. 북한 인권 문제가 세계적으로 부각되지 못한 이유중의 하나는 서구 기자들의 무관심이었다. 폴러첸씨는 자신이 의사로서 경험한 생생한 북한 사례들을 바탕으로 하여 주로 영어권 독일어권 기자들에게 북한 소식을 전해주었다. 올해 상반기 세계 언론에 보도된 북한 인권 문제 기사중에는 상당수가 폴러첸씨의 노력에 의한 것이다.
   가수 존 덴버를 닮은 그는 대단한 열정가이다. 북한 인권 문제가 화제로 오르면 몇 시간이나 열변을 토한다. 그는 '북한의 악마적 정권을 언론의 힘으로 무너뜨릴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가 북한에서 써둔 일기를 이번에 책으로 펴내기로 한 것도 그런 확신에 찬 행동의 한 표현이다. 그의 일기는 주로 병원을 무대로 하고 있다. 지상의 지옥인 북한에서도 또 지옥인 곳이 병원이다. 환자를 마취도 하지 않고 수술을 하는 곳이 지금 지구상에 또 어디 있겠는가. 폴러첸씨는 북한 사람들이 집단적인 공포증에 걸려 있는 이상 상태라고 진단하기도 했다.
  이 책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정의감 있는 한 외국인의 눈에 비친 북한의 실상이 건전한 한국인이 알고 있는 북한의 모습과 거의 같다는 것이다. 마음만 맑으면 똑 같이 보이는 모양이다. 폴러첸씨의 일기 중 정작 재미 있는 대목은 서울에 온 뒤 쓴 부분이다. 그가 월간조선과 한 인터뷰에서 김정일을 히틀러라고 비교했더니 화를 내는 기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폴러첸씨는 이곳이 서울인가, 평양인가 하고 의아해 했다는 것이다. 폴러첸씨는 독일인으로서 히틀러와 김정일을 비교할 수 있는 안목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독재자는 더러 가졌지만 히틀러 같은 전제자를 가진 적이 없는 한국인은 그 차이를 모르는 모양이다.
  폴러첸씨를 요사이 만나면 좀 피로한 모습이다. 당연히 기대되었던 응원세력을 발견할 수 없는 데 대한 실망도 있을 것이다. 黃長燁 선생이 지금 느끼고 있는 것과 같은 감정이리라. 김정일이 벌이고 있는 일은 인류 역사상 가장 악질적인 것이다. 이 김정일의 악행을 눈감아주는 일은 인류 역사장 가장 큰 비겁이다. 이 김정일의 악행을 변호하는 일은 인류 역사상 가장 희극적인 사건일 것이다. 폴러첸씨의 일기는 한국에서 지금 얼마나 심한 희극과 비극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잘 가르쳐주고 있다.
  
  
  한편 영국의 이코노미스트(경제주간지)는 평양의 60만 인파를 ‘동원되고 잘 조직된 인파’라고 정확하게 썼다. 이와 비교하면 평양회담을 보도한 우리 기자들은 발표문만 받아쓰는 官製 기자에 더 가까운 수준을 유지했다. 그들은 자신의 시각, 자신의 취재로써 진실에 육박할려는 집념을 보여주지 못했다.
  평양회담에 참석한 기자들이 돌아와 각 회사에 보고한 취재 뒷이야기나 정보철은 기사보다도 더 생생하였다. 이런 생생한 정보는 그러나 독자들에게 공식적으로 전달되지 못하고 정보보고 형식으로 몇몇 사람들만이 읽고버리는 ‘소수의 전유물’이 되었다. 이것은 기자들이 충성을 바쳐야 하는 대상인 독자들을 배신하는 행위일 것이다.
  
  實事求是란 말이 많이 쓰입니다. 저는 實을 현실, 事를 사실로 해석합니다. 實事求是란 즉, 현실과 사실에 기초하여 是是非非를 가리고 교훈을 끌어내는 자세입니다. 여기서 현실이란 조국의 상황과 세계사의 潮流 같은 것이고 사실은 특정한 사안의 진실일 것입니다. 기자에게 實事求是란 조국의 상황을 깊이 인식한 바탕에서 특정 사건의 전모를 정확히 파악하여 진실을 그려내는 노력일 것입니다. 조국의 현실을 말할 때 우리는 북한정권과 북한동포들의 현실을 놓칠 수 없습니다. 화려한 회담 뒤에 있는, 김정일의 곰발바닥요리 그 뒤에 있는 북한주민들의 생활과 애환, 그것을 포기하면 기자 자격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평양에 다녀온 그 기자들에게 묻습니다. 당신들이 기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