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근성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노예는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고 판단의 주인공을 자신이 아닌 남으로 삼습니다. 그 남(他人)은 주인일 수도 있고 힘센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노예근성의 전형적인 예가 최근에 있었던 장충식 총재 사건입니다. 북한은 장충식 총재가 월간조선 10월호와 한 인터뷰 내용 중에 북한체제가 자유가 없다, 못산다는 등의 이야기만 부각시켜 이를 트집잡고는 이산가족 상봉을 깰 것처럼 공갈을 쳤습니다.
  
  이런 사태가 일어났을 때 주인의식이 있는 사람(즉 주체성과 자주성이 있는 사람)은 북한의 억지를 나무라든지 경멸해버리고 장충식 총재를 적극적으로 감쌉니다. 노예근성을 가진 자들은 자기 스스로 판단능력이 없으니까 눈치를 봅니다. 요사이 상황이 소위 남북화해와 평화공존을 최우선시한다고 생각한 그들은 '북한측에도 일리가 있다. 장충식 총재도 경솔했다'면서 자기 편을 치고나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상황에 적응하는 영리한 행동이고 또한 잘 하는 일이라고 착각합니다.
  
  미국에선 이런 사람들을 '항상 조국을 먼저 비난하는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아이가 노상강도한테 털리고 들어왔을 때 아이를 붙들고 '야, 이 바보자식아. 왜 당했어?'하고 쥐어박고는 강도를 잡으러 나가지도 않고 신고도 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그 노상강도에게 아이를 시켜 '잘못 했습니다'(밤길에 혼자 다녀서?)라고 사과하도록 하는 부모가 바로 노예근성의 소유자인 것입니다.
  
  노예로 지내기는 사실 편하고 쉽습니다. 골치 아픈 판단과 행동을 주인에게 맡겨버리면 되니까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1948년 대한민국 건국 때까지는 이런 노예근성을 갖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1948년 대한민국은 헌법을 제정하면서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때부터 우리 국민들은 서류상으로는 노예에서 주인으로 승격했지만, 우리 체질과 의식속에 오랫동안 뿌리박고 있던 노예근성은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근대화란 것은 정신적인 면에서는 노예의 의식을 버리고 국민과 시민의 의식을 갖는 것을 가리키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노예가 아니고 나의 운명을 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주인이다'는 일대 각성과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런 이성적인 결단의 과정에는 수많은 갈등과 대결과 혁명과 전쟁이 놓여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혼란스러워 보이는 것은 우리가 지금 그런 과정을 밟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더구나 북한의 수령지배체제란 노예제 때문에 이런 근대화 과정에서 많은 도전과 방해를 받고 있습니다. 김정일 집단은 근대화 과정의 대세를 어기고 주민들을 계속해서 노예수준으로 묶어두려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제 확실하게 주인이 되는 길로 들어선 남한국민들까지 뒷다리를 걸어 '우리 같이 노예 수준으로 머물러 있자'고 속삭입니다. 우리는 근대화 과정의 후발국이란 조건에다가 공산수구세력의 방해란 이중의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역사적 상황이 이러하니 한국 사회가 정상화되고, 법과 합리, 과학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요사이 일어나는 현상은 결코 한국인이 못나서가 아니라 근대화의 과정을 선전국보다도 수백년 뒤늦게 밟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근대화의 졸업생이 된 선진국들은 탈근대, 탈국민국가, 세계화 등을 외치면서 아직 근대화, 국민국가 건설 과정에 있는 우리들의 가치관을 혼돈시키고 있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하면 합리적이고 자주적인 판단을 할 것인가, 우리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답은 實事求是란 말에서 찾아야 합니다. 현실(reality)과 사실(fact)을 근거로 하여 판단한다는 뜻의 이 말에는 영구불변의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현실을 확실하게 딛고 사실에 입각하여 思考하는 방식은 실용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합리요 과학정신인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