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dentity, 또는 정체성이란 말이 있습니다. 나는 어떤 존재인가 하는 의식상태를 말합니다. 자존심, 자의식 같은 말도 정체성을 설명하는 여러 표현들 가운데 들어갑니다. 예컨대 서울대 출신은 고졸자 밑에 들어가 일할 수 없다는 자의식이 있습니다. 장교계급장을 달고는 사병한테 머리를 숙일 수 없다는 자존심도 있습니다. 나는 백인이므로 흑인한테 굽신거릴 수 없다는 신념이 있습니다.
  나는 대한민국 사람이므로 북한의 김정일에게는 존칭을 쓸 수 없고 그들의 도덕성이나 인감됨을 인정할 수 없다는 소신을 국민들의 대다수가 공유하고 있었으므로 대한민국은 공산주의자들의 도전, 속임수, 위협, 선동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지난해 6월의 평양 정상 회담 이후 한국인들은 심각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평양까지 찾아가서 반국가단체의 수괴 김정일을 만나고, 남한의 장관들이 권력세습의 망나니라고 알고 있었던 김정일한테 아부하는 모습을 보이고, 대한민국의 안보를 책임진 국정원장이 북한의 對南공작부서 책임자를 안내하고 다니고, 남파간첩과 빨치산들을 미화, 찬양하는 방송이 나가고, 북한당국이 트집을 잡으면 적십자사 총재도 자르고,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한테는 존칭을 쓰지 않으면서도 김정일한테는 위원장이란 호칭을 꼭 꼭 붙이고, 공산당이 주도한 폭동을 민중의거인 것처럼 조작하고 이를 진압한 국군을 죄인시하는 분위기를 언론과 국회가 만들어가고, 6.25전쟁과 월남전에서 일어난 학살사건 가운데 원인제공자의 책임은 묻지 않고 자유를 지키려고 싸운 우리쪽의 잘못을 과장 하고, 국기-국가-국호를 함부러 포기하고....
  대한민국 국민들은 지금 '내가 그동안 믿었던 것이 혹시 잘못되었나' '대한민국 대통령이 혹시 무슨 약점이라도 잡혔나' '이러다간 공산화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닐까' '민주주의의 길을 걷고 있는 당당한 경제대국 대한민국이 노예제 국가보다도 못한 범죄주식회사 북한에 절절 매는 이 모습은 도대체 무엇인가' '목숨 걸고 자유를 찾아온 황장엽-김덕홍씨를 사실상 연금하고 있는 국정원은 유사시 과연 우리를 지켜줄 것인가, 아니면 세 불리할 때 북한측에 붙을 것인가' 등등의 걱정, 망상, 기우, 의혹 등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정체성의 혼란이 누적되면 그 결과로서 그런 사회는 자신감을 잃게 되고 규칙과 규범이 붕괴되면서 범죄가 많이 생기며 그 결과로서 자위력이 약해진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의 이런 정체성 위기를 가져온 가장 큰 책임은 물론 대한민국을 상징하고 대표하는 국가원수에게 있습니다. 지금 김대중 대통령이 보여주는 행태는 많은, 정상적인, 애국 시민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대한민국에 대한 확신과 애정을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통령의 언행에서 그가 대한민국과 한덩어리가 된, 그리하여 국권과 국익을 지켜내는 화신으로서의 단호함과 신뢰성을 국민들이 발견하지 못한다면 이 정체성의 위기는 상당히 오래 지속될 것이고, 정상적인 지도세력이나 정권이 나타날 때라야 풀릴지 모릅니다.
  장교가 사병한테 멱살 잡히는 모습을 바라보는 부하들이 그 장교의 명령을 따르겠습니까.
  저는 이런 정체성의 위기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1967년3월1일에 공군사병으로 자원입대했습니다. 161기였습니다. 훈련을 받던중 늑막염에 걸려 병원에서 40일간 치료를 받고 나와서 다시 훈련소에 들어가 두달 뒤에 입대한 163기와 함께 훈련소를 졸업했습니다. 군번은 161기의 군번이고 졸업동기생은 163기이니 저는 일선 부대에 배치된 뒤 161기로 행동해야 하느냐, 163기로 행동해야 하느냐로 고민했습니다.
  제가 세운 원칙은 군대는 기수가 아니라 군번이고, 서열은 훈련소 졸업순이 아니라 입대날짜순이다(소위 밥그릇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원칙에 따라 저는 동기생인 163기와 저보다도 1개월 먼저 훈련소를 나온 162기를 저의 부하로 취급하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제대로 대접을 받기 위하여 주먹다짐도 벌였지만 저는 결국 161기로 대접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의 권리를 쟁취한 것이지요.
  북한의 김정일은 깡패 집안의 망나니이고 김대중 대통령은 명문 부자 집안의 장남입니다. 그런 장남이 주먹다짐을 하기 싫고 대결이 두려워서 깡패 집안의 망나니한테 끌려다닌다면, 휘둘린다면 그 장남은 온 마을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저런 대통령이 있기에 대한민국은 비록 나라는 작지만 우리는 가슴이 뿌듯하다고 생각하도록 만든 두 대통령이 이승만, 박정희였습니다. 그때보다 나라는 엄청 커졌지만 대통령의 언행에서 국민들이 자존심이 상한다면(잘난 사람이 못난 사람한테 당하는 것보다도 더 자존심 상하는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에서 기가 꺾이고 국민들은 당당함을 잃고 말 것입니다. 북한과는 국가로서의 격이 다른 대한민국이 어떻게 저들한테 이런 식으로 당하고만 살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