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고 충격적인 내용만 골라 수록
  
  
  1993년:改革 드라이브 속의 삽화
  
  金大中 출국
  
  14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취임까지는 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바쁘고 긴장된 나날의 연
  속이었다. 이 기간을 통해 나는 그동안 준비해 온 문민정부의 국정 청사진을 보다 구체적으
  로 가다듬으면서 이를 실행에 옮기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다.
  나는 국민화합 차원에서 선거에서 패배한 金大中(김대중)씨와도 만남을 갖고자 했다. 1992년
  12월19일 대통령선거 결과가 확정되자 김대중씨는 국민 앞에 눈물을 흘리면서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고, 그 직후 내게 전화를 해왔다. 김대중씨는 『당선을 축하드립니다. 조금 전 會見
  (회견)에서 국민들에게 政界隱退를 약속했습니다. 당선자께 영광이 있기를 바랍니다. 훌륭한
  대통령으로 남기를 바랍니다』는 말을 했다. 나는 그의 낙선을 위로하면서 『곧 한번 만납
  시다. 편한 시간에 언제든지 연락을 주십시오』라고 했고, 김대중씨는 『좋습니다. 곧 연락
  을 드리겠습니다』고 대답했다.
  나는 김대중씨를 위로할 겸 대국적인 견지에서 국가경영 문제를 논의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나와의 만남을 피하더니 1993년 1월26일 영국으로 떠났다. 이날 아침 나는 동교
  동으로 전화를 해서 김대중씨와 짧은 통화를 했다. 내가 『연락을 기다렸는데 못 만나 섭섭
  합니다. 아무튼 건강히 잘 다녀오기를 바랍니다』고 인사를 건네자, 김대중씨는 『사정이 여
  의치 않아 연락을 못 드렸습니다. 미안합니다. 앞으로 잘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고 말
  했다. 이날 김대중씨는 『나는 정치를 떠났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정치는 하지 않을 것이
  다』라는 말을 남긴 채 영국으로 출국했다.
  
  대통령 집무실의 초대형 금고를 뜯다
  
  청와대에서의 첫 집무가 시작된 1993년 2월25일 나는 앞으로 5년 동안 내가 일할 대통령 집
  무실을 둘러보다가 집무실 한쪽 모퉁이의 조그마한 방문을 열어보고 깜짝 놀랐다. 방 전체
  가 하나의 금고였다. 방에 일부러 짜맞춘, 천장까지 높이가 닿는 엄청나게 큰 金庫(금고)가
  설치되어 있었다. 대통령 집무실의 초대형 금고. 나는 집무실에까지 그렇게 큰 금고를 설치
  해 놓은 것을 보고 놀랍기도 하고 어이가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금고를 떼어내라」고
  지시했다. 워낙 큰 금고였기 때문에 그것을 떼어내는 데는 며칠을 기다려야 했다. 처음에는
  경호실 직원들이 떼어내려고 했으나, 도저히 처리할 수가 없어서 외부에서 기술자를 부르고
  기중기까지 동원했다. 토요일 오후부터 1박 2일에 걸쳐 금고를 전부 해체한 후, 해체한 금고
  부품을 창문으로 내보내 기중기에 실어 날라야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비서실장실에도 커
  다란 금고가 있었고, 그밖에도 몇 군데에 금고가 있었는데 전부 다 없애버렸다. 과거 청와대
  에서 얼마나 많은 돈이 오고 갔는지 알게 해주는 웃지 못할 풍경이었다.
  내 집무실의 금고를 철거한 이후 금고가 놓여 있던 그 방은 내게 소중한 공간이 되었다. 나
  는 그 방에 책장과 전화를 갖다 놓고 서재로 꾸몄으며, 재임 중 숨가빴던 외국 정상들과의
  전화통화 역시 대부분 이 방에서 이루어졌다.
  
  골프연습장 즉각 철거
  
  골프연습장은 청와대 뒤편 北岳山(북악산)에도 설치되어 있었다. 청와대 경내에서 뒤편 인왕
  산을 향해 힘차게 골프 공을 치면, 청와대 경비를 맡고 있던 군인들이 산에 대기하고 있다
  가 날아온 공을 주워야 했다. 청와대를 경호하는 군인들이 경호와는 전혀 상관없는 골프 공
  줍는 일에 종사해 온 것이다. 나는 이 골프연습장도 즉시 철거하도록 지시했다.
  내 주위에서는 휴식과 건강을 위해서 골프를 권유하는 일이 더러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다 좋은 말이나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고 잘라 말했다. 차츰 골프 이야기가 내 앞에서
  화제에 오르는 일은 없어졌다. 골프는 사실 재미있고 운동도 많이 된다는 것을 나도 잘 알
  고 있다. 그러나 골프는 일반 국민들에게 위화감을 주기 쉽고, 무엇보다도 일하는 시간을 많
  이 빼앗아 간다. 나는 고위공직자들이 근무시간에 골프장을 찾아 접대를 받거나 로비를 받
  는 것을 야당시절부터 자주 목격해 왔다. 일하는 풍토를 조성하기 위해 나는 임기가 다할
  때까지는 골프를 치지 않기로 결심했다.
  
  헬무트 콜 수상 訪韓
  
  1993년 3월1일 나의 대통령 취임 후 나흘 만에 첫번째 손님이 찾아왔다. 헬무트 콜 독일 수
  상이 2박 3일간의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巨軀(거구)인 콜 수상은 키뿐 아니라 몸집도 대단히 장대했다. 내가 『체중이 105kg이라고
  들었는데 맞습니까?』하고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자, 콜 수상이 『제 몸무게는 국가 최고기
  밀입니다』라고 말해 폭소가 터졌다. 나는 독일 통일의 「일등공신」으로 평가받고 있던 콜
  수상을 기쁜 마음으로 환영했고, 콜 수상은 나의 대통령 당선과 문민정부의 출범에 대해 각
  별한 태도로 축하를 해주었다. 이날 회담에서 나와 콜 수상은 정치·경제적인 문제는 물론,
  남북한 관계와 한·독 협력 문제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한편 독일측은 통독 지역에 대한 한국의 투자 확대, 그리고 당시 우리 정부가 추진하고 있
  던 최대의 SOC(사회간접자본) 사업인 고속철도 사업자 선정 문제에 커다란 관심을 보였다.
  1989년 기준 총 5조 8000억원의 투자규모로 「檀君(단군) 이래 최대 役事(역사)」로 불리던
  고속철도 사업을 둘러싸고 당시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는 막바지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사업자 선정 여하에 따라 해당국과의 외교관계에도 영향을 줄 만한 커다란 사업이
  었다.
  이날 회담에서 콜 수상은 직접 『고속전철 건설 사업을 독일 쪽에 맡겨달라』고 솔직하게
  부탁해 왔다. 나는 내심 깜짝 놀랐다, 國益(국익)을 두고 국가 정상이 직접 세일즈에 나서
  「사업 유치」를 솔직하게 부탁하는 콜 수상의 자세도 놀라웠고, 다른 한편으로는 과거 우
  리나라의 대통령들이 직접 여러 가지 利權(이권)에 개입해 왔기 때문에 이런 직접적인 「청
  탁」이 생기는구나 하는 부끄러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는 회담 후 콜 수상을 수행한 독
  일측 관계장관이 우리 건설장관에게 「당장 계약을 하자」고 말했다는 보고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사업자 선정 문제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서 콜 수상에게 『고속전철사업은 그 내용이 중대하고 전문적인 사안인 만큼, 비록 내가 대
  통령이라 할지라도 임의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고 딱 잘라 대답했다. 나는
  『우리 정부의 관계부서에서 전문가들과 함께 가장 객관적 기준에 따른 입찰조건 평가작업
  을 진행할 것이며, 가장 유리한 조건을 제시한 입찰자가 사업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말
  해주었다. 콜 수상은 내게 더 이상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대통령 관저의 노래방 기계
  
  내가 청와대 대통령 관저에 입주해 보니 큰 노래방 기계가 놓여 있었다. 내가 어찌된 영문
  인지 확인해 보니 전임자들이 관저에서도 종종 유흥잔치를 벌이면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노래는 누구나 즐겨 부를 수 있지만, 대통령 관저에까지 그런 시설을 해놓았다니 한심하다
  는 생각이 들었다. 국민들을 생각하고 국정을 생각한다면 청와대만은 조용하고 경건한 분위
  기를 갖추는 것이 옳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나는 관저의 노래방 기계도 치우도록 했다.
  
  『빨리 부대로 돌아가 취임식 가져라』
  
  3월8일 오전 7시30분, 나는 權寧海(권영해) 국방장관을 청와대로 불렀다. 전날 오후 아침식
  사를 함께 하자고 이미 지시를 해둔 터였다. 나는 식사를 시작하자마자 權장관에게 우리 軍
  (군)의 가장 중요한 요직인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을 바꾸겠다고 말했다.
  『權장관, 내가 오늘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을 바꾸려고 합니다. 누가 후임으로 적임자
  인지 한번 말해보세요』
  權장관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듯, 커다란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우리 군에서 육참총장과 기무사령관은 요직 중의 핵심 요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 수
  십 년간 군사정권의 핵심 지배세력이었던 軍內 사조직 「하나회」의 실력자들이 그 자리를
  돌아가면서 맡아오고 있었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쑥국만 두어 숟가락 뜬 권영해 장관과 함께 나는 곧장 軍의 인사
  기록 검토에 착수했다. 나와 權장관 두 사람만의 극비 작업이었다. 오전 11시30분을 조금 넘
  긴 시각, 나는 金振永(김진영) 육군참모총장과 徐完秀(서완수) 기무사령관을 해임하고, 非하
  나회 출신으로 군내에서 큰 존경을 받고 있던 金東鎭(김동진) 연합사 부사령관을 육군참모
  총장으로, 金度潤(김도윤) 기무사 참모장을 기무사령관으로 각각 새로 임명했다. 나는 權장
  관을 재촉해 신임 김동진 육참총장과 김도윤 기무사령관을 청와대로 불러 간단한 임명절차
  를 밟았고, 두 사람에게 『빨리 부대로 돌아가 취임식을 가지라』고 했다. 나로서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조치였다.
  길게는 5·16 이후 32년, 짧게는 1980년 신군부 등장 이후 10여 년간 유지돼 오던 육군의
  골격을 뒤집는 혁명적 인사가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權장관에게 얘기를 꺼낸 지 불과 4시간
  5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전광석화와 같이 이루어진 이날 軍 인사는 신임총장과 물러나는 총
  장이 눈치도 채지 못할 정도로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이로써 우리 군 내부에 엄존하는 현실
  적 쿠데타 위협세력이었던 「하나회」 척결의 막이 올랐다.
  
  클린턴 대통령과 힐러리의 인상기
  
  1993년 7월10일 토요일 오후 클린턴 대통령이 1박 2일의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한·미
  양국이 오랜 우방인데다 나와 클린턴 모두 비슷한 시기에 취임하여 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 서로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다.
  오후 2시40분, 나는 아내와 함께 청와대 현관에서 클린턴 내외를 반갑게 맞았다. 계단 앞에
  서 잠시 기념 촬영을 한 뒤 나는 클린턴 대통령과 곧장 2층으로 올라가 정상회담을 시작했
  다. 아내는 힐러리 여사와 별도로 환담을 나누었다.
  이날 저녁 청와대 본관 만찬 때 만난 힐러리 여사는 대단히 적극적이며 아름다운 여인이었
  다. 남편과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대화를 즐기고 토론을 매우 좋아했다. 나는 그녀와의 토론
  을 통해 그녀가 대단히 이지적인 여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대통령 직무라는 것이 너무 엄청나기 때문에 남편의 건강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
  인가를 늘 생각합니다』라면서, 나에게 『김영삼 대통령께서는 조깅에 전문가이신데 조깅은
  어떻게 해야 좋습니까?』하고 물었다. 나는 『TV에서 보니 클린턴 대통령은 거리에서도 뛰
  고 아스팔트에서 달리는 것 같던데, 내가 20년 동안 조깅을 해보았지만 딱딱한 아스팔트에
  서 조깅하는 것은 무릎 관절을 다치게 됩니다. 나는 언제나 조깅을 하지만 지방에 가면 그
  곳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뜁니다. 반드시 쿠션이 있는 흙에서 뛰는 것이 좋습니다』하고 대
  답해 주었다.
  내가 그후 백악관을 방문해 클린턴 대통령과 조깅을 할 때 보니 백악관의 조깅 코스 밑에
  고무 타이어를 넣어 쿠션이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을 보았다. 힐러리 여사가 고쳐놓은 것이
  었다. 이날 만찬에서 나의 말을 심각하게 듣고 있던 힐러리 여사의 표정이 떠올랐다.
  
  녹지원 조깅과 상춘재 회담
  
  이튿날인 7월11일 아침 8시 나는 클린턴 대통령과 함께 청와대 綠芝園(녹지원)에서 조깅을
  했다. 미국측에서는 사전에 클린턴 대통령의 조깅 속도가 매우 빠르다고 전해왔으나, 정작
  녹지원을 두 바퀴쯤 뛰다 보니 클린턴 대통령은 매우 힘겨워하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나는
  달리기를 멈추고 함께 걸으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조깅을 마친 우리는 각각 샤워를 마친 후 청와대 경내 賞春齋(상춘재)에서 조찬을 하면서
  환담을 나눴다.
  나는 『한·미간에 긴급한 현안을 협의하고 협조하기 위해 청와대와 백악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전화로 연락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자』고 제의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김영삼
  대통령께서 전화를 주시면 자다가도 받겠다』고 말했고, 나도 클린턴 대통령의 전화는 언제
  라도 받겠다고 약속했다.
  이렇게 해서 한·미간에 24시간 상시 협의 체제인 「핫 라인」이 갖춰지게 되었다. 백악관
  에서 기술진이 직접 來韓(내한)해 청와대에 秘話器(비화기)를 설치했다. 이는 세계의 어떤
  장비로도 도청당하지 않는 완벽한 시스템이었고, 이후 나는 北核(북핵)을 비롯한 모든 문제
  를 논의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 핫 라인을 이용해 클린턴과 대화를 나누었다.
  
  금융실명제 도입의 숨은 이야기
  
  금융실명제는 1992년의 대통령 선거 당시 나의 공약이었다. 나는 「임기 중 실시」 방침만
  밝혔을 뿐 시기와 방법에 대해서는 함구로 일관했다. 8월12일 긴급명령 발표 직전까지도 최
  소한 조기 실시는 어렵다는 것이 지배적인 시각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경제 사정의 어려움을 들어 2, 3년 뒤에나 실시하자고 주장했다. 경제가 바닥
  에 있을 때 실명제를 실시하면 경제가 완전히 주저앉게 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나
  는 그런 사람들과는 더 이상 실명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여기에 반해 나는 실명제 같은 충격적인 조치는 경제가 나쁠 때 하더라도 잃는 것이 적다고
  생각했다. 李經植(이경식) 부총리와 洪在馨(홍재형) 재무장관은 이같은 내 생각에 적극 따라
  준 사람들이었다.
  금융실명제가 햇빛을 보기 약 한 달 보름 전인 6월22일 화요일 오전 7시25분, 나는 이경식
  부총리를 청와대로 불러 단둘이 조찬을 함께 하면서 실명제에 대한 그의 견해를 물었다. 李
  부총리는 금융실명제 실시에 적극적으로 찬성 입장을 피력했다.
  이날 나는 李부총리에게 첫째, 실명제를 빨리 진행하지 않으면 사정과 공직자 재산 공개 등
  기왕의 정치개혁 작업이 물거품이 되기 쉽다. 둘째, 실명제는 시행 후 후유증 치유에만 1년
  가량 소요될 것이다. 만약 실명제를 더 늦추면 결국 임기 후반기에 다른 큰일을 하기 어렵
  고 경제적 성과를 거두기도 어렵다. 셋째, 통상적 입법 절차를 밟아서는 제대로 된 실명제를
  만들기 어렵고, 결국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해야 하는데, 국회 회기 중엔 긴급명령 발동이 어
  려우므로 9월 정기국회 이전에 가능한 시기는 8월밖에 없다고 설명하며 작업을 지시했다.
  금융실명제 준비 기간은 2개월로 잡았다. 대신 성장률이 1∼2% 포인트 정도 떨어지고 시행
  직후 증권 시장이 몸살을 앓을 것도 각오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최대한 빨리, 어떠한 일이
  있어도 비밀을 지키는 것이었다. 어떠한 예외도 절대 배제한다는 것도 원칙이었다.
  
  007작전처럼 진행
  
  6월22일 나의 지시를 받은 李부총리는 비밀리에 실명제 실무 작업팀을 구성했다. 「철통 보
  안」은 금융실명제 실시의 관건이었다. 금융실명제 준비 작업은 한편의 007영화처럼 진행됐
  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楊秀吉(양수길) 박사 등 극소수의 유능한 인물들이 선발되어 작
  업에 착수했다. 초기 작업은 서울 강남구에 있던 李부총리의 자택에서 이루어졌다. 때로는
  비어 있던 옆집으로 장소를 옮기기도 했다. 7월8일 李부총리는 열흘 만에 실명제 초안을 마
  련해 나한테 보고했다.
  속도는 빨라지기 시작했다. KDI 학자들이 만든 초안은 골격이었고 이제 세부적인 법률적
  작업은 주무 부처인 재무부 몫이었다. 나는 7월12일 월요일 홍재형 재무부장관을 청와대로
  불러 단둘이 조찬을 함께 하며 금융실명제 실시 방침을 전달했다. 홍재형 장관도 실명제 실
  시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홍재형 장관은 곧바로 재무부 金容鎭(김용진) 세제실장을 팀장으로 金振杓(김진표) 세제심
  의관, 금융 전문가인 陳棟洙(진동수) 해외투자과장으로 준비팀을 구성했다. 재무부팀은 果川
  (과천) 주공아파트 한 채를 두 달간 빌렸다. 그후 국세청·법제처 직원들과 은행 직원 등이
  합류했다. 모두 합해도 20명이 안 되는 멤버들이었다.
  문제는 실무진들을 어떻게 차출하느냐는 것이었다. 정기국회에 상정될 세법 개정 작업으로
  한창 바쁜 시점에 세제실 멤버를 빼면 엄청난 일이 있음을 공개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
  국 전혀 별개의 일로 해외에 나가는 것처럼 출장 명령을 내린 뒤 이들은 비밀 장소에서 합
  숙시키기로 했다.
  7월 하순, 실무진으로 선발된 이들 멤버들에게 갑자기 40일간의 출장 명령이 떨어졌다. 장기
  출장인데도 당장 출발해야 한다거나 짐은 최대한 줄이라거나 하는 말도 없었다. 출장 지역
  도 외국의 수도나 금융 중심지가 아닌 생소한 도시였다. 대도시를 출장지로 하면 현지 주재
  관들에게 미리 연락할까 봐 일부러 낯선 도시로 정한 것이다.
  
  준비팀의 위장 출국
  
  이들은 실제 공항에 나가 직원들과 가족들이 환송하는 가운데 비행기를 탔다. 그리고 일본
  까지 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비밀 작업 장소인 과천의 아파트로 비밀리에 들어갔다.
  합숙팀에겐 ▲현관문을 나설 수 없다 ▲창문 가에도 서면 안 된다 ▲전화를 삼가되 집에 통
  화할 경우 국제전화로 위장하라는 守則(수칙)이 하달됐으며, 「절대 비밀을 지킨다」는 서약
  서를 써야 했다. 실무진들은 실명제 작업을 「남북통일 작전」으로 불렀다. 집주인에게도 대
  학 교수들이 남북통일 용역 연구를 수행한다고 둘러댔다. 이들 실무진들은 삼복더위를 견디
  며 밀폐된 아파트 공간에서 강행군을 했다. 참으로 힘든 작업이었다. 나는 어려움 속에서도
  금융실명제를 만들어 낸 이들 실무자들에게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7월28일 아침 9시30분 나는 黃吉秀(황길수) 법제처장을 청와대로 불러 1시간 동안 단둘이
  만났다. 이 자리에서 나는 黃처장에게 금융실명제 실시 방침을 알리면서 『黃처장은 구체적
  내용을 알 필요는 없고, 대통령 긴급명령에 따른 법 조문을 만들어 오라』고 지시했다. 긴급
  명령 역시 법이니 만큼 하나의 자구도 놓치지 말고 결격 사유 없이 만들도록 지시한 것이
  다. 물론 절대로 비밀을 지켜야 한다고 엄명을 내렸다.
  1993년 7월30일 오전 7시경, 나는 출근 준비를 하던 李부총리에게 전화를 했다.
  『요즘 그 일이 잘돼갑니까?』
  『예,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좀 빨리 했으면 싶은데 작업을 최대한 서두르도록 해요』
  1주일 후인 8월5일, 청남대에서 여름 휴가를 마치고 청와대로 돌아온 나는 오전 9시에 황길
  수 법제처장을 만난 데 이어 李부총리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보고는 언제쯤 할 수 있지요?』
  『다음주 월요일(9일)에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좋아요. 그때까지 완벽한 내용을 만들어 보고하시오』
  
  총리·비서실장·경제수석도 모르게
  
  나는 李부총리에게 자주 전화를 걸어 준비 상황을 묻곤 했다. 그때마다 「서두르라」는 말
  과 「보안을 유지하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시간을 끌면 정보가 새나갈 수 있고, 그러면
  실명제는 물거품이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보안 유지를 위해 인원 동원에 관련된 모든 결정은 내가 직접 내리다시피 했다. 한
  번은 작업팀에서 방대한 자료를 타이핑할 인력이 필요하다며 워드프로세서 경진대회에서 수
  상한 국세청 직원을 차출해야겠다고 내게 보고했다. 나는 곧 秋敬錫(추경석) 국세청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그 직원을 부총리에게 보내라고 지시했다. 秋청장은 고위직 이동도 아닌
  일개 직원 한 사람 파견을 내가 직접 지시한 것에 대해 매우 어리둥절해 했지만 나는 시치
  미를 뗐다.
  자료 인쇄에도 문제가 남았다. 실명제 실시 발표 전날 밤 某(모) 인쇄소에서 인쇄공 7명으로
  부터 「비밀 서약서」를 받은 뒤, 지하 작업장에서 밤샘 작업 끝에 인쇄가 완료되었다.
  금융실명제 준비 작업은 그만큼 비밀을 지키며 완벽하게 진행되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
  은 작업 실무자를 제외하고는 나와 이경식 부총리, 홍재형 재무장관, 황길수 법제처장뿐이었
  다. 그러나 이들도 정작 내가 언제 금융실명제를 발표할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금융실
  명제 발표 이후에 황인성 총리나 박관용 비서실장, 박재윤 경제수석 등이 섭섭함을 토로했
  다는 얘기를 들었으나, 비밀 유지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의 구토
  
  1993년 9월14일, 프랑스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다.
  우리 국민들에게도 친숙한 女優(여우) 소피 마르소를 비롯한 문화예술인까지 대동했다.
  이날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정상회담에 앞서 미테랑 대통령은 심한 구토증세를 보여 30여
  분 정도의 휴식을 취하느라 정상회담이 그만큼 늦어졌다. 미테랑 대통령은 청와대 본관 앞
  정원에서 열린 환영식에서 이상한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나의 환영사에 이어 미테랑 대
  통령이 답사를 했는데, 답사 말미에 演臺(연대)에 몸을 기대기 시작한 것이다.
  미테랑 대통령은 이때까지만 해도 몸은 가누고 있어서 환영식은 예정시간에 종료되었다. 그
  러나 환영식 직후 나와 함께 본관 현관을 향하던 중 갑자기 얼굴이 창백해지며 구토증세를
  보여 侍從武官(시종무관)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현관에 도착했다.
  현관에 들어서자 그는 허리를 가누지 못할 정도로 구토증세를 보였다. 방명록에 서명하기
  위해 의자에 앉은 뒤에도 잠시 현기증을 느끼는 모습이었다. 나는 놀라기도 하고 걱정하는
  마음이 되었다.
  미테랑 대통령은 우리측 의전관계자로부터 서명용 만년필을 넘겨받아 방명록에 서명했다.
  그러나 결국 구토증을 참지 못했다. 구토물을 왼손으로 받아 카펫에 버린 뒤 시종무관으로
  부터 손수건을 받아 입가를 닦았다. 이어 1층 홀에서의 기념촬영을 위해 시종무관의 부축을
  받아 걸어가던 중 선 채로 다시 카펫 위에 구토를 했다.
  프랑스측은 옆에 대기중이던 주치의를 불렀고, 미테랑 대통령은 프랑스 경호원들의 부축을
  받으며 1층 홀 옆의 화장실로 옮겨갔다. 5분쯤 뒤에는 화장실에 의자를 들여갔다. 미테랑 대
  통령은 한참 뒤 1층 仁旺室(인왕실)로 옮겨 새 옷으로 갈아입은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
  정상회담 회담장으로 이동했다.
  나와 미테랑은 예정보다 30분쯤 늦어진 오후 5시쯤 정상회담장인 접견실에 입장했다. 나는
  미테랑 대통령의 건강상태를 염두에 두고 『14시간 동안이나 비행기를 타고 와 힘들었을
  것』이라고 하고, 『한국은 전형적인 가을날씨로 하늘이 매우 높다』고 가볍게 말문을 열었
  다. 미테랑 대통령은 『오랫동안 한국에 오고 싶었으며 지금에서야 방문하게 됐다』고 말하
  고 『프랑스 국민들이 한국의 변화와 개혁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있다』고 답례를 표했다.
  우리 둘은 곧 단독 정상회담에 들어갔다. 나는 미테랑의 건강이 걱정되어 회담을 50분 만에
  끝냈다. 그러나 오후 5시50분쯤 단독 정상회담을 마치고 시작된 集賢室(집현실)에서의 확대
  정상회담은 당초 예정보다 늦게 끝났다.
  
  『루브르 박물관은 껍데기만 남을 것』
  
  이날 내가 정상회담에서 가장 중요하게 거론한 것은 外奎章閣(외규장각) 도서의 반환이었다.
  외규장각 도서는 1866년 丙寅洋擾(병인양요) 때 프랑스가 약탈해 간 총 297권에 달하는 도
  서로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었다. 나는 이미 미테랑 대통령의 방한 전에 외교채
  널을 통해서 외규장각 도서 반환을 강력하게 요구했었다.
  나는 이날 『우리가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프랑스가 전쟁으로 빼앗아 간 우리 문화
  재는 반드시 돌려주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얘기하였다. 이에 대해 미테랑은 매우 솔직하게
  자신의 고충을 설명했다. 국내 문제는 주로 총리가 맡아서 하는데, 문화재 반환 같은 것은
  프랑스에서 매우 어려운 문제라는 것이었다.
  『오늘날의 루브르 박물관은 나폴레옹 때부터 외국에서 빼앗아 온 문화재로 가득 차 있습니
  다. 江華島(강화도) 사건 때 가져온 외규장각 도서도 한국 입장에서 보면 분명 약탈일 것입
  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따져 외국 문화재를 반환하기 시작하면 루브르 박물관
  은 껍데기만 남을 겁니다』
  미테랑은 한 가지 사례를 소개했다.
  『그리스의 문화부장관이 여성인데 나하고는 절친한 사이다. 그녀가 매주 토요일마다 프랑
  스에 와서 나를 만나 미로의 비너스 像(상) 등 그리스 문화재를 돌려달라고 요청을 한다. 그
  리스 총리도 몇 번씩 방문해 문화재 반환을 요청했다. 나는 절대 안 된다고 거절했다. 그래
  도 계속 찾아와서 문화재를 내놓으라고 요구하길래, 내가 「좋다. 가지고 가라. 그 대신에
  우리가 빼앗아 온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탱크와 포를 동원해서 다시 빼앗아 올 것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참석자들 사이에 폭소가 터졌다. 나는 우리 국민 정서를 얘기하면서 『반드시 반환해야 한
  다』고 거듭 요구를 하였다. 미테랑 대통령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장이 대통령인 자신의 명령
  에도 불구하고 『한사코 책을 내놓으려 하지 않는 훌륭한 사람』이라고 소개해 좌중의 웃음
  을 유도하기도 했는데, 마침내 외규장각 도서의 반환을 약속했다. 미테랑은 외규장각 도서에
  대해 한국의 김영삼 대통령이 그렇게 중시하는지 몰랐다고 하면서, 프랑스로 연락해서 당장
  내일 두 권을 가져오겠다고 약속했다. 프랑스가 외국에 문화재를 반환하는 것은 한국이 최
  초라는 말을 그는 덧붙였다.
  
  호소카와 총리의 결혼 이야기
  
  1993년 11월6일 호소카와(細川護熙) 일본 총리가 訪韓했다.
  이날 만찬 도중 호소카와 총리가 내게 『두 분이 참 정다워 보이는데 결혼은 언제 어떻게
  하셨습니까』하고 물어와, 나는 아내와의 결혼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자 호소카와 총리는
  부인을 가리키며 『우리는 이렇게 해서 결혼하게 됐습니다』라며 한편의 영화 같은 두 사람
  의 결혼이야기를 해주었다.
  호소카와 총리는 上智(상지)대학을 다니던 시절, 같은 반이었던 한 여학생을 사모해 프로포
  즈를 했는데,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그후 대학을 졸업하고 몇 년 후에 국회의원 선거에 입
  후보했으나 낙선하고 말았다. 그가 젊은 나이에 선거에 출마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집안이 일본의 名門家(명문가)로 매우 부유했기 때문이다.
  선거에 낙선한 그는 머리도 식히고 마음의 정리도 할 겸 세계일주 여행을 떠났다. 여행 코
  스에 따라 영국을 들러 런던의 길을 걷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낯익은 한 여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얼굴을 보니 자기가 대학시절 프로포즈했던 그 여자였다.
  이국 땅에서의 뜻밖의 만남에 두 사람은 서로 너무나 반가웠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호
  소카와가 제일 먼저 꺼낸 말이 『혹시 결혼했느냐』는 질문이었다. 그러자 그녀는 『아직
  안 했다』고 대답했다. 호소카와는 즉시 『나도 아직 결혼을 안 했다. 우리가 이렇게 런던의
  거리에서 다시 만나다니, 이것은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 틀림없다. 우리 결혼합시다』고 제안
  을 했다. 그래서 결국 결혼을 했다.
  
  춤추는 클린턴 대통령 내외
  
  1993년 11월23일 저녁 우리 부부는 워싱턴 방문중 클린턴 대통령이 주최한 국빈 만찬에 초
  대되었다. 우리 부부가 백악관에 도착, 만찬장 입구에 들어서자 마중나와 있던 클린턴 내외
  는 우리 부부를 2층으로 안내해 역대 미국 대통령이 쓰던 방들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링컨 대통령의 방을 비롯해서 여러 개의 방을 둘러보았다. 방마다 색깔도 다르고 화
  려한 장식품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2층을 둘러본 우리는 만찬 참석자들을 맞기 위해 1층 접
  견장인 이스트룸으로 내려왔다.
  나와 클린턴 대통령 내외는 이스트룸에서 만찬 참석자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다. 이날
  만찬에 초대받은 사람은 대략 150명 정도로 대부분 부부동반이었다. 나와 클린턴 대통령 내
  외는 나란히 서서 참석자들에게 인사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초대받은 여성들과 일일이 키스
  를 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백악관 여비서의 행동이었다. 클린턴 대통령의 얼굴에 뭐가 묻었는지,
  힐러리 여사가 옆에 서 있는데도 여비서는 서슴없이 클린턴 대통령에게 다가가더니 손수건
  으로 클린턴 대통령의 입과 코를 닦아주는 것이었다. 클린턴 대통령도 뭐가 묻었는지 싶어
  손으로 얼굴을 닦았다. 하지만 뭐가 잘못되었는지 그 여비서는 다시 다가가 클린턴 대통령
  의 얼굴을 한번 더 닦아주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재미있는 풍경이었다.
  만찬장을 정돈하는 사이 나와 클린턴 대통령, 그리고 고어 부통령 등 세 내외는 통로 옆 작
  은 방에서 잠시 대기했다. 만찬장에서는 왈츠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음악이 들
  려오자 갑자기 클린턴 대통령 내외가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잠시 후 비서가 들
  어와 자리가 정돈되었다고 보고하는 바람에 클린턴 부부는 춤을 그쳤다. 춤을 춘 시간은 길
  지 않았지만, 활달한 클린턴 내외의 다정한 부부애를 느낄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1994년:北核 위기 속 金日成 사망
  
  李會昌 총리 경질 내막
  
  李會昌씨의 총리 발탁은 UR(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에 따른 국정 분위기 전환을 위한 것이
  었다. 당시 내 주변에서는 李會昌씨가 균형 감각이 부족하고, 다양한 사람을 포용해야 하는
  조직 생활에는 맞지 않는 인물이라며 그의 발탁을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李會昌
  씨에 대해 「일체의 공직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란 極言(극언)까지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신임 李會昌 총리에 대해 나름대로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그는 총리 취임 직후부터
  내 기대에서 멀어져 갔다. 내가 외국을 방문하는 동안 안기부장에게 업무 보고를 요구하는
  가 하면, 나와 독대한 장관들에게 나와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자신에게 보고할 것을 요구했
  고, 4월5일의 「UR 이행 계획서」 수정 파동 때는 사과 담화를 거부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내가 李會昌씨를 총리직에 더 이상 둘 수 없다고 판단한 사건이 발생했다. 1994
  년 4월 중순 내가 남북 특사 교환 조건을 북한 핵 문제 해결의 전제 조건에서 철회하고, 북
  한 伐木工(벌목공)의 수용 대책을 추진하려 하자, 李총리는 4월21일 총리실 간부회의를 통해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에 회부된 안건도 관계 장관이 사전에 총리의 승인을 받아 시행토록
  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또 이를 언론에 발표하고, 북한 벌목공 수용 대책의 경우도 자신이
  확정하기 전에는 공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李榮德(이영덕) 통일부총리와 韓昇洲(한
  승주) 외무장관을 불러 이같이 지시했다.
  
  대통령의 업무에 대해서도 『총리의 승인을 받으라』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는 북한의 핵 문제를 비롯한 통일외교정책을 조절하기 위해 4월8일 이
  영덕 부총리 주재로 처음 열렸다.
  북한의 핵 문제 대응은 미국을 비롯한 全세계의 관심사였으며, 우리 정부로서도 최고로 절
  박한 현안이었다.
  나는 이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통일원부총리, 외무부장관, 국방부장관, 안기부장,
  청와대비서실장, 청와대외교안보수석을 중심으로 통일안보조정회의를 구성케 했었다.
  당초 멤버에서 빠져 있었던 총리비서실장은 2차 회의 때부터 배석자로 참석토록 했다.
  그런데 李會昌씨는 대통령이 對北 문제 대응을 위해 구성한 회의에 대해 「총리의 승인을
  받으라」고 주장한 것이었다. 李會昌씨는 총리 취임 이후 국무총리의 「법적 권한」을 주장
  하며 대통령의 지휘를 받기를 꺼려하더니, 급기야 북핵 및 외교적 문제 등 대통령의 업무까
  지 자신이 지휘하겠다며 언론에 공개한 것이었다.
  
  사표 아니라 해임당한 것
  
  국무총리 임명 4개월 만에 경질하는 데 따른 부담은 있었지만 나는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
  고 판단했다. 나는 4월22일 오후 4시 李會昌 총리를 청와대로 불렀다. 총리의 週例(주례)보
  고 자리였다. 나는 이 자리에서 전날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에 대한 李총리의 발언에 대해
  호되게 질책했다.
  안보 문제는 대통령 고유의 권한이고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에서 논의된 사항은 대통령
  에게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李會昌 총리가 「회의」의 운영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지시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통치권에 대한 도전」이었다. 나는 『총리로서 혼란의 책임을
  져라』고 했다. 한마디로 해임하겠다는 뜻이었다.
  李會昌 총리는 자신의 언행에 대해 『잘못했으니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라며 시종일
  관 장황하게 변명을 했다. 나는 『지금 당장 사표를 내지 않으면 대통령으로서 헌법에 따라
  해임 조치하겠다』고 호통을 쳤다. 집무실 바깥에 있던 박관용 비서실장과 김기수 실장까지
  도 내가 야단치는 소리를 들었을 정도였다. 1시간 가까이 혼이 난 그는 내 집무실을 나가면
  서 출입문을 찾지 못해 허둥대기도 했다. 나는 李會昌 총리가 나간 직후 李榮德 부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총리직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한편, 李會昌 총리는 나를 만난 뒤 박관용 비서실장을 찾아가 여러 가지 변명을 늘어놓으면
  서 사태를 수습하려 했으나, 朴실장도 『대통령의 뜻을 바꿀 수 없다』고 말하면서 그를 돌
  려보냈다. 결국 李會昌씨는 총리실로 돌아가 오후 5시 40분쯤 사표를 써서 청와대로 보내왔
  다. 그때는 이미 내가 박관용 비서실장과 주돈식 공보수석, 이의근 행정수석을 본관으로 불
  러 후임자 발표 및 후속 조치를 취하라고 지시한 상태였다.
  그런데 총리실로 돌아간 李會昌씨는 또다른 언론 플레이를 했다. 청와대에서 경질을 공표하
  기 전에 사표를 썼다고 발표한 것이다. 언론에서는 이를 두고 나와 李會昌씨가 얼굴을 붉히
  며 高聲(고성)으로 다투었다느니, 李會昌씨가 나에게 반발해 사표를 던졌다느니 하는 등의
  거짓 보도를 했다. 1997년 대선 때는 그가 TV토론에 나와 자신이 「소신껏 사표를 냈다」
  고 말하는 것을 보고 나는 어이가 없었다. 나의 李會昌 총리 「해임」은 대통령과 국무총리
  의 업무에 혼선을 주어 국정을 혼란케 한 사람에 대한 당연한 조치였다.
  
  러시아의 시골집 다차
  
  북한 핵 문제로 한반도에 긴장이 높아지던 1994년 6월1일부터 3박 4일간 나는 러시아를 공
  식 방문했다. 나는 1993년 11월 미국, 1994년 3월 일본과 중국을 방문한 데 이어 러시아를
  방문함으로써 한반도 주변의 가장 중요한 나라들을 모두 직접 방문한 것이었다. 한반도의
  평화·통일과 동북아 평화 구조의 정착을 위해서는 한반도 정세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이들 주변 강대국들과의 긴밀한 협조가 필요했다.
  6월1일 러시아에 도착한 나는 공항에서 승용차를 타고 모스크바 근교의 「다차」로 직행했
  다. 다차는 러시아말로 「시골집」이란 뜻으로 러시아 대통령의 국영 별장이었다. 다차에 도
  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옐친 대통령 내외가 나와 아내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옐친 대통령과의 만남은 이때가 두 번째였다. 1992년 12월 대통령선거를 한 달 앞두고 옐친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서울의 신라호텔에서 조찬을 함께 한 적이 있었다. 당시 옐친 대통령
  은 나에게 『김영삼 후보께서 반드시 다음 대통령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하고 말해 함께
  유쾌한 시간을 보낸 기억이 있었다.
  광대한 러시아의 평원, 끝없이 펼쳐진 자작나무 숲을 병풍 삼아 제정러시아 시대 황제의 별
  장이었던 다차가 있었다. 초원의 아름다운 호수에는 청둥오리를 비롯해 수많은 새들이 한가
  하게 헤엄치거나 주위를 날고 있었고, 벽돌로 된 고색창연한 2층 건물 주변에는 각종 조각
  들로 장식된 수천 평의 전통 러시아식 정원을 가꾸어 놓았다.
  
  「귀머거리새」 요리
  
  실내는 전형적인 제정러시아 풍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우리 내외와 옐친 대통령 부부는 이
  곳에서 3시간여 동안 만찬 겸 정상회담을 가졌다.
  1층 응접실에서 옐친 대통령은 다차 방문에 대한 환영의 표시로 6·25 전쟁 관련 문서 사본
  4종을 내게 건네주었다. 이 문서들은 다음날인 6월2일 확대 정상회담이 끝난 후 전달받기로
  예정되어 있던 방대한 양의 舊소련의 한국전쟁 관련 문서 중 일부였다. 이 문서들은 한반도
  를 전쟁과 분단의 고통으로 몰아넣은 한국전쟁의 책임을 둘러싼 오랜 논쟁을 종식시키는 데
  결정적인 자료가 되었다.
  우리 네 사람은 응접실 옆의 만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만찬은 순수 러시아式 정찬이었다.
  특별 메뉴로 나온 요리 때문에 이날 만찬은 내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는 인상적인 시간이 되
  었다. 옐친 대통령 내외가 준비한 특별 메뉴의 이름은 「귀머거리새」였다. 이런 이상한 이
  름을 가진 새가 있다는 것도 나는 처음 들었다.
  옐친 대통령은 「귀머거리새」 요리의 내력을 특유의 시원시원한 어조로 설명하기 시작했
  다. 이 새는 소리를 잘 듣지 못해 사람들이 바로 옆에까지 접근해도 직접 보기 전에는 도망
  을 가지 않는다고 해서 「귀머거리새」라는 이름이 붙었다. 오랜 세월, 러시아 사람들은 그
  특별한 맛 때문에 「귀머거리새」를 잡아왔지만, 워낙 귀한 야생조여서 실제 대다수 러시아
  사람들도 직접 요리를 맛본 사람은 드물었다.
  옐친 대통령은 나를 위해 귀머거리새를 잡으라고 미리 다차의 대통령 경비대에 지시해 놓았
  었다. 대통령 경비대는 귀머거리새를 잡기 위해 다차 인근 야트막한 野山(야산)의 숲 속을
  며칠 동안 헤매다닌 끝에 만찬 당일에야 간신히 한 마리를 잡아온 것이다.
  커다란 꿩 만한 크기의 귀머거리새는 정말 맛이 좋아서 나와 옐친 두 내외는 요리를 남김없
  이 먹었다. 식탁에는 귀머거리새의 剝製(박제)가 올려져 있었다.
  
  엘친은 사귈수록 호감이 가는 인물
  
  술을 권하는 러시아의 酒道(주도)도 특별했다. 웨이터는 커다란 접시에 술잔을 가득히 얹어
  손에 든 채 나와 옐친 대통령 사이에 내밀었다. 술잔마다 제각기 다른 세계 각국의 유명한
  술이 채워져 있었다. 옐친 대통령이 조그마한 보드카 잔을 잡길래 나도 따라 들고 건배했다.
  웨이터가 나갔다가 다시 잔을 채워 가지고 왔다. 하지만 나는 다음 잔부터는 와인을 선택했
  다. 다차의 저녁시간을 밀도 있는 정상회담 시간으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중간에 옐친
  대통령이 내게 코냑을 권했지만 마시지 않았다. 옐친 대통령도 내 모습을 보더니 더 이상
  보드카를 잡지 않았다.
  우리 내외는 취미 활동과 가족 관계를 비롯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옐친 대통령은 외부
  에 알려진 다소 괴팍한 모습과는 달리 사귈수록 호감이 가는 인간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었
  다. 나는 세계의 많은 정치 지도자들을 직접 만나보았지만 러시아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
  들과 심성이 많이 닮아 있는 듯해 더욱 交感(교감)을 느낄 수 있었다. 어린 시절 개구쟁이였
  다는 옐친 대통령과 나는 서로 인간적으로 통하는 점이 있었고, 회담에서 곤란한 처지에 놓
  이더라도 서로 솔직하게 진심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자동 군사 개입 조항 폐기하겠다』
  
  이날 저녁 나와 옐친 대통령은 진지하게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우선 당시 긴급한 현안이던
  북한 핵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우리는 북한 핵 문제는 대화를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돼야
  하나, 끝내 북한이 태도 변화를 보이지 않을 경우에는 국제사회의 제재가 불가피하다는 점
  에 인식을 같이했다. 나는 對북한 설득에 러시아가 적극 나서줄 것을 요청했으며, 옐친 대통
  령은 대화를 통한 해결 노력이 실패하고 유엔 제재가 필요할 경우 러시아도 이에 동참할 것
  임을 밝혔다.
  1994년은 한·러 수교 110주년이 되는 해였다.
  옐친 대통령은 나에게 러시아의 북한에 대한 기본 입장의 변화를 약속했다. 과거 舊소련과
  북한 간에는 1961년 체결된 「朝·蘇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이 있었다. 이 조약의 제1
  조는 「한반도 유사시 소련군이 북한 지원을 위해 자동 개입한다」는 내용의 이른바 「자동
  군사 개입 조항」이었다. 소련의 대외적 권리·의무를 승계한 러시아는 이미 1992년 1월 대
  통령 특사를 평양에 보내 조약상의 「자동 군사 개입 조항」은 북한의 被侵(피침) 경우에만
  적용될 것임을 통보한 바 있었고, 1994년 11월 방한했던 옐친 대통령은 향후 이 조항의 폐
  기 방침을 밝혔었다.
  나는 이 조약의 조속한 폐기를 강조했고, 옐친 대통령은 이 조항이 이미 死文化(사문화)되었
  다고 답했다. 비록 6월2일의 「한·러 공동선언」에 기재되지는 않았지만 옐친 대통령은 이
  조약의 기한이 만료되는 1996년에는 조약을 갱신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입장을 밝혔다. 또
  조약 폐기 후에는 유사한 어떠한 동맹 관계나 조약도 체결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對北 무기판매 중지 요청
  
  이날 저녁 결론을 보지 못한 사안도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러시아의 북한에 대한 전투기
  와 군사 장비·부품 및 기술 제공 문제였다. 나는 조·소 동맹이 死文化된 마당에 러시아가
  북한에 무기 부품을 계속 공급하는 것은 한국에 커다란 안보 위협이 된다고 강조했다. 북한
  무기 체계의 80% 이상이 러시아製였다. 『북한에 미그기가 많지만 부품은 전부 러시아에서
  가져가고 있습니다. 새로운 한·러 관계를 위해 이러한 무기 판매는 안 됩니다』하고 내가
  문제를 제기했지만, 옐친 대통령은 난색을 표하며 솔직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옐친 대통령은 『각하, 전통적으로 우리와 북한의 관계가 가까웠다고는 하지만 무기와 부품
  을 무상 제공한 적은 결코 없습니다. 반드시 대가를 받고 판매해 왔습니다. 러시아는 지금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북한에 무기를 판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고 말했다.
  무기 판매를 통해 국가 수입을 도모하지 않을 수 없다는 솔직한 말과 늦은 시간 때문에 나
  는 이 문제를 일단 다음날 오전의 頂上회담으로 미루어 두었다.
  이밖에도 한·러 양국간에는 몇 가지 현안이 더 있었다. 우리나라는 과거 정권 시절 소위
  「북방외교」를 내세워 舊소련에 과도한 차관을 제공한 뒤 원리금을 회수하지 못하고 있었
  다. 당초 30억 달러라는 무리한 경협차관을 제공키로 하고 이중 14억 7000만 달러를 제공했
  으나 1991년 12월 舊소련이 해체됨에 따라 차관 제공은 중단되었고, 이후 원리금 연체가 누
  적되고 있었다.
  양국 정부간 협상에서도 러시아측은 『원리금은 반드시 상환하겠지만 당장으로서는 방법이
  없다』는 입장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시간을 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을 끌수록 원리금
  이 늘어나 양국 관계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고, 더욱이 우리로서도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나는 옐친 대통령에게 『원리금 일부를 현물로 상환해 달라』고 요청했다. 결국 이러한 과
  정을 통해 러시아가 자랑하는 대형 헬기 등 일부 러시아제 무기가 우리나라에 도입되게 되
  었다. 도입 과정에서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무기 수입국인 미국측의 보이지 않는 반대가 있
  었지만 나로서는 우리 국익을 최대한 확보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300여 명의 기자들을 기다리게 한 한·러 정상회담
  
  러시아 방문 이틀째인 6월2일 오전 나와 옐친 대통령은 크렘린宮에서 단독 및 확대 정상회
  담을 가졌다. 이날 회담은 전통적인 러·북 관계로 볼 때 러시아가 북한 제재에 동참할 것
  인지 여부에 국제적인 관심이 집중되고 있었기 때문에 회담 종료 후 예정된 기자회견을 위
  해 세계 각국에서 300여 명의 기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이날 단독 정상회담에서 옐친 대통령과 전날 마무리 못한 對북한 무기 공급 문제를 결
  론짓자고 했다. 나는 한국에 치명적인 危害(위해)가 되는 러시아의 對北 무기 부속품 공급
  및 판매를 완전 중단하라고 촉구했고, 옐친 대통령은 완강히 거부했다.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가운데 기자회견 시간이 다가왔다. 옐친 대통령은 자꾸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300여
  명의 기자들이 모여 있습니다. 이제는 가야 됩니다』하고 말했다.
  나는 『기자들은 기다리면 됩니다. 여기서 합의를 합시다』하고 강하게 버텼다.
  결국 기자회견은 1시간 이상 지연되었다. 시계를 자꾸 들여다보던 옐친 대통령이 마침내 결
  단을 내렸다. 그는 손으로 책상을 「쿵」 치면서 『대통령 각하, 정 그러시다면 그렇게 합시
  다』하고 말했다.
  내가 『정말입니까. 기자들에게 분명히 얘기해야 됩니다』하고 재차 확답을 요구하자, 옐친
  대통령은 『그럼 정말이지요. 우리 두 사람이 보통 관계입니까. 한다면 하지요』하고 확인해
  주었다. 그의 솔직하고 결단력 있는 면모가 돋보인 반가운 순간이었다. 옐친 대통령은 또
  『오늘은 절대로 양보하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우리 참모들이 얼마나 반대한 줄 아십니
  까』하고 말했다.
  
  스푼으로 식탁 두드리며 장단 맞춰
  
  6월2일 크렘린궁 만찬장의 대리석 기둥은 전부 鍍金(도금)하여 황금빛으로 빛났다. 만찬이
  진행되는 동안 크렘린 악단에서는 「푸른 다뉴브강의 물결」을 비롯해 경쾌한 음악을 연주
  했다. 이틀간의 솔직한 대화를 통해 나와 옐친 대통령은 오랜 친구처럼 정이 들었다. 옐친
  대통령은 강한 의지력이나 고집이 센 점까지도 나와 비슷한 것 같았다. 술을 많이 마신다고
  알려진 것과는 달리 옐친 대통령은 나와 만났을 때 조심스러웠는지 그다지 술을 많이 들지
  않았다. 전날 다차에서와 마찬가지로 옐친과 나는 주로 포도주를 마셨다.
  술을 많이 마시지는 않았지만 만찬은 가족 같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계속되었다. 모두가
  만족스러웠다. 옐친 대통령은 악단을 향해 몇 번이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고, 흥겨운 음악
  에 맞춰 커다란 러시아 스푼으로 식탁을 힘차게 두드리며 장단을 맞췄다. 너무 세게 두드린
  나머지 나중에는 스푼이 완전히 휘어지고 말았다. 그래도 옐친 대통령은 악단의 밝고 경쾌
  한 음악에 맞춰 신나게 스푼을 두들겨댔다. 이 사건 때문에 이날의 만찬은 나에게는 오래도
  록 기억에 남는 만찬이 되었다.
  퇴임 후 상도동 나의 집에는 쿠나제 대사나 마르티노프 이메모(IMEMO) 소장, 이그나텐코
  타스통신 사장 등 옐친 대통령과 친분이 두터운 러시아 지도층 인사들이 찾아온 적이 있다.
  내가 이들에게 옐친 대통령이 나와 만났을 때는 소문과 달리 술을 많이 마시지 않더라고 말
  하자, 이들은 한결같이 『아닙니다. 옐친 대통령은 술을 매우 좋아하고 酒量(주량)도 대단합
  니다. 하지만 각하와 회담을 할 때에는 중요한 國政(국정)을 수행중이었기 때문에 조심했을
  겁니다. 회담 때는 아니지만 끝나고는 많이 마셨을 겁니다』하고 말해주었다.
  
  對北 봉쇄 준비
  
  내가 러시아에 머물고 있는 순간에도 북한 핵 문제는 긴박한 대치 상태로 치닫고 있었다.
  6월3일 오후 7시15분 크렘린宮 내 영빈관에 머물고 있던 나에게 로마를 방문중이던 클린턴
  대통령이 전화를 걸어 왔다.
  IAEA(국제원자력기구)가 막 북한과의 핵 협상 실패를 선언한 직후였다. 한스 블릭스 IAEA
  사무총장은 3일 유엔안보리에 출석해 『연료봉 교체에 대한 사찰 실패로 북한의 과거 핵 물
  질 전용 여부에 대한 검증이 불가능해졌다』면서 국제사회의 강력한 조치를 요구했다. 金日
  成은 이에 대해 『완전히 벌거벗느니 전쟁을 택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와 클린턴 대통령은 35분간의 전화 통화를 통해 북한 핵 문제에 대한 대응 방안을 협의했
  고, 현시점에서는 북한에 대한 유엔 제재 결의안을 추진할 수밖에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
  다.
  클린턴 대통령은 나에게 6일쯤 안보리에 對北 제재 결의안을 상정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바야흐로 對北 제재 일정에 가속이 붙고 있었다. 나는 클린턴에게 북한 핵문제가 대화로 풀
  리지 않은 데 대해 유감을 표시한 뒤 『한국 정부는 이 결의안이 통과될 수 있도록 관계국
  들과 긴밀히 협조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클린턴 대통령은 이날 옐친 러시아 대통령에게도
  전화를 걸어 북한 핵문제를 유엔 안보리에서 다룰 수밖에 없게 됐다는 입장을 전달하고 협
  력을 요청했다.
  북한은 IAEA와 협상을 결렬시킨 직후 『현재의 핵개발 계획을 한 차원 높은 단계로 진척
  시킬 것』이라고 위협하며 미국과의 협상을 요구하는 등 시간을 끌어보려 했다. 하지만 클
  린턴 행정부는 미·북 3단계 고위급 회담을 취소하는 등 對北제재가 불가피하다는 방향으로
  급선회하고 있었다.
  
  미국의 북한 선제 폭격 계획을 반대
  
  한반도가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으로 치닫고 있을 때의 일이다. 6월16일 오전 안보수석으로
  부터 내게 이런 보고가 올라왔다. 『레이니 駐韓(주한)대사가 내일 기자회견을 합니다』 그
  내용인즉 「회견 직후 주한 미군 가족과 민간인 및 대사관 가족을 서울에서 철수시킨다」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미군 가족이나 대사관 직원들을 철수하는 것은 미국이 전쟁 일
  보 직전에 취하는 조치였다. 미국은 유엔 제재와 별도로 北爆(북폭)을 감행하려고 하고 있었
  던 것이다. 더욱이 레이니 대사도 딸과 손자·손녀에게도 한국을 떠나라고 지시해 두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미국이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막기 위해 유사시 寧邊(영변)을 폭격할 계획을 세워놓았
  다는 것은 사전에 알고 있었다. 항공모함과 순양함이 北爆에 대비해 동해안으로 접근해 있
  었다.
  寧邊과 平壤(평양)은 대대적인 미군 폭격기의 空襲과 함포사격의 사정권 안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미군의 폭격이 이뤄질 경우 그 즉시 북한은 휴전선 가까이 전진배치되어 있는 엄청
  난 규모의 화력을 남한을 향해 쏟아 부을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미국은 북한의 핵개발 가능성을 폭격으로 저지할 수 있겠지만 可恐(가공)할 인명 살상의 참
  화가 한반도를 초토화시킬 것이었다. 유엔을 통한 국제사회의 제재가 진행되고 있는 상태에
  서 민족의 共滅(공멸)을 가져올 「선제 북폭」(北爆)을 감행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
  이었다.
  北核 제재의 이유는 핵 위협을 제거함으로써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의 생존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한·미 양국軍이 비상경계에 들어간 것도 어디까지나 好戰的(호전적)인 북한 정
  권에 대한 억지력을 확보하려는 것이었을 뿐 한반도에서의 戰爭(전쟁)을 목표로 삼은 것은
  아니었다.
  
  『클린턴 대통령, 이게 말이 됩니까』
  
  16일 오후 나는 비밀리에 집무실로 레이니 주한미국대사를 불러 단독으로 1시간 동안 요담
  했다. 레이니 대사는 나와 오랜 친구였으며, 클린턴 대통령이 외교관이 아닌 레이니를 주한
  대사로 임명한 이유도 나와 문민정부에 대한 미국의 友好(우호)를 표시하기 위한 뜻이었다.
  하지만 민족의 존망이 걸린 문제를 앞에 두고 나는 레이니 대사에게 강력하게 경고하지 않
  을 수 없었다.
  『클린턴 대통령이 이럴 수가 있습니까! 레이니 대사, 당신은 나와 오랜 친구가 아니오. 미
  국이 북한을 폭격하면 그 즉시 우리 남한도 북한의 포격에 의해 초토화됩니다.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내가 있는 한 전쟁은 절대 안 되고 가족 등 미국인들의 소개도 안 됩니다. 지금
  바로 클린턴 대통령에게 연락해 내 이야기를 분명히 전하세요. 나는 한국군의 통수권자로서
  우리 군인 60만 중에 절대 한 사람도 동원하지 않을 겁니다. 미국이 우리 땅을 빌려서 전쟁
  을 할 수는 없어요. 전쟁은 절대 안 됩니다』
  내가 레이니 대사를 비밀리에 청와대로 부른 것은 너무나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내
  가 재임중 외국 대사와 단 둘이 따로 만난 것은 이날 레이니 대사를 만난 것과 황장엽 망명
  당시 강택민 주석에게 내 뜻을 전달토록 하기 위해 張庭延(장정연) 중국대사를 만났을 때,
  단 두 번뿐이었다.
  레이니 대사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대사관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 외교안보수석이 『미국
  대사가 회견을 일단 연기했습니다』하고 보고해 왔다. 레이니 대사가 나와 만난 직후 직접
  백악관의 클린턴 대통령과 전화통화를 했다는 보고였다. 나는 일단 숨을 돌렸다. 그날 새벽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클린턴 대통령에게 거세게 몰아붙였
  다.
  『클린턴 대통령, 이게 말이 됩니까. 내가 대통령으로 있는 이상 우리 60만 군대는 한 명도
  못 움직입니다. 한반도를 전쟁터로 만드는 것은 절대 안 됩니다. 전쟁이 나면 남북에서 군인
  과 민간인이 수없이 죽고 경제는 완전히 파탄 나며 외국자본도 다 빠져나가게 돼요. 당신들
  이야 비행기로 공습하면 되지만, 그 즉시 북한은 휴전선에서 남한의 주요 도시를 일제히 포
  격할 겁니다. 우리가 6·25 때 수없이 죽었는데 지금은 무기도 훨씬 강력해졌어요. 전쟁은
  절대 안 됩니다. 나는 우리 역사와 국민에게 죄를 지을 수는 없소』
  한·미 정상간 핫라인을 설치하면서 『24시간 어느 때라도 서로 원하면 통화할 것』을 약속
  했지만 전화를 걸어온 클린턴 대통령은 내가 잠들어 있을 새벽에 전화하는 것이 미안했는지
  『내 평생의 즐거움이 김영삼 대통령 각하의 목소리를 듣는 겁니다』라며 인사했다. 하지만
  나는 그날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그 즈음은 내 재임 중 가장 고뇌했던 한 시기
  였다. 미국이 아니더라도 유엔 제재가 본격화되면 북한이 언제 남한을 선제 공격할지도 모
  르는 일이었다. 북한의 핵개발을 봉쇄하면서 동시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도 절대 막아야 했
  다. 나의 강력한 추궁에 클린턴 대통령은 억지로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끝냈다.
  
  평양에 다녀온 카터
  
  6월17일 카터 前 대통령은 金日成과 평양의 대동강 요트선상에서 2차 회담을 갖고 CNN과
  회견했다. 카터 대통령은 김일성에게 미국이 對北 제재 중단, 3단계 북·미회담 재개, 경수
  로 제공 등의 의사가 있음을 밝혔고, 김일성은 NPT복귀를 비롯해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위
  해 모든 것을 다할 생각이라고 말했다는 보도였다.
  백악관은 일단 對北 제재의 중단이 미국의 공식 입장이 아니라고 밝혔고 아직은 북한의 眞
  意(진의)를 속단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이로부터 전쟁위기로까지 치달아 가던 위급한 상황
  은 간신히 한 고비를 넘어가는 듯했다.
  나는 6월18일 판문점을 거쳐 서울에 온 카터 대통령 내외와 청와대에서 부부동반으로 오찬
  겸 회담을 했다. 카터 대통령은 뜻밖에도 金日成의 제안을 가지고 왔다.
  『김일성 주석이 김영삼 대통령께 언제 어디서든 조건없이 만나고 싶다고 전해달라고 했습
  니다』
  김일성이 남북 정상회담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다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카터 대통령은 대
  동강에서 자신과 로잘린 여사, 그리고 김일성과 부인 김성애가 뱃놀이를 하는 도중, 자신이
  김일성에게 『위기를 극복하려면 남한의 김영삼 대통령과 반드시 만나셔야 합니다. 두 분이
  만나시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라고 말했더니 김일성이 그 자리에서 『좋습니다. 기꺼이 만
  나겠습니다』하고 흔쾌히 승낙을 하더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러면 김영삼 대통령하고 내가 내일 청와대에서 오찬을 하기로 돼 있는데 그때
  전달해도 되겠습니까』하고 했더니 역시 좋다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나는 카터 대통령의 설명을 들은 즉시 남북 정상회담 제의를 수락했다. 나는 카터 대통령이
  가지고 온 김일성 주석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갑작스런 제의였지만
  남북 정상이 직접 만나게 된다면 그것은 북한 핵 문제 해결과 남북관계 진전, 그리고 한반
  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유익한 계기가 될 수 있을 터였다.
  혹시라도 김일성의 제의가 단순한 선전용 발언이었다고 한다면 그러한 거짓말은 곧 백일하
  에 드러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북한은 중국이나 러시아의 암묵적 지원을 얻는 것조차 불가
  능해지는 등 국제사회에서 회복불능의 상태로까지 빠져들 것이었다.
  
  『金日成의 건강이 좋지 않을 텐데…』
  
  남북 정상회담 소식은 당장 발표되었고 즉각 세계적 뉴스가 되었다. 북한으로서도 미국의
  양보를 끌어내기 위해 꺼낸 핵개발 카드가 오히려 스스로를 국제사회의 제재대상으로 몰고
  가게 되자 궁지에 몰려 있다가 마침 訪北(방북)한 카터를 통해 해결의 돌파구를 찾은 셈이
  었다.
  처음에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카터 대통령의 방북은 이처럼 예상 밖의 역사적 전환을 가
  져왔다. 나는 지금도 1994년 북핵 위기 해소의 커다란 공(功)이 카터 대통령에게 있다고 생
  각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이날 카터 대통령의 모든 견해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식사 도중 카터
  대통령에게 김일성의 건강상태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물었다. 카터 대통령은 김일성이 「이
  자리(주석직)에 한 10년 정도 더 있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대단히 건강하고 정력적이라고
  했다. 내가 당초 김일성과 카터 대통령의 회담이 성공하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미
  국 클린턴 대통령이 「카터 대통령은 개인 방북」이라는 입장을 밝혔기 때문이며, 또한 당
  시 국내외의 모든 정보를 종합해 볼 때 김일성의 건강상태가 매우 나쁜 것으로 알려져 있어
  서 카터 대통령이 그를 만난다고 해도 실질적인 협상의 성공은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기 때
  문이었다.
  카터 대통령과 김일성이 한 시간 남짓 배를 타고 대동강을 다녔다는 것에 주목해 물어본 것
  이었는데, 나는 김일성이 건강하다는 카터 대통령의 말에는 동의하기 어려웠다. 내가 카터
  대통령을 배웅하고 돌아서면서 韓昇洲 외무장관과 鄭鍾旭(정종욱) 안보수석에게 『건강이
  좋지 않을 텐데…』하고 말한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온갖 대응방안 노트에 정리하고 암기
  
  나는 정부 내외의 모든 채널을 통해 북한과 김일성 주석에 대한 치밀한 정보를 입수·분석
  했다. 김일성은 전형적인 공산주의자로서 6·25 전쟁을 일으켰으며 피비린내 나는 내부 숙
  청을 통해 북한에서 거의 반세기 동안을 절대군주로 군림해온 인물이었다. 또 과거 행적으
  로 볼 때 김일성은 술수에 능하며 절대 믿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김일성 주석이 카터 대통령의 제안을 즉석에서 받아들인 것을 볼 때 나는 김일성 주
  석과의 정상회담이 성공을 거둘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다. 북한의 폐쇄적인 체제로서는 국
  제적 제재의 압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획기적 전환을 하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오직
  절대 지배자인 김일성만이 그러한 전환을 하게 만들 수 있었다. 당시 건강 등의 문제로 통
  치 일선에서 다소 물러서 있다는 분석도 있었지만 김일성은 어디까지나 북한에서는 살아 있
  는 神(신)과 같은 존재였다.
  분단 50년 만의 첫 회담이니 만큼 관계부처에서 올라오는 보고서의 양도 엄청났다. 나는 나
  대로 김일성 주석에게 제기할 이야기와 회담에서 벌어질 수 있는 여러 가지 상황 등에 대해
  온갖 가상을 해보고 대응방안을 세워 대학노트에 하나하나 꼼꼼히 기록해 나가고 있었다.
  일과시간은 물론 관저에 돌아와서도 노트를 꺼내 썼다가 지우고 또 고치느라 밤잠을 거의
  이루지 못했다.
  나는 김일성과의 회담에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언제 어디서나 나의 신념대로 당당하
  게 이야기를 꺼내는 성격이었다. 단지 내가 우려한 것은 김일성의 건강 문제였다. 회담이 난
  관에 부딪칠 경우 당연히 격론이 벌어질 것이었고, 오랫동안 주변으로부터 「충성스러운」
  말만 들어왔던 김일성으로서는 갑작스런 건강 이상이 생길 수도 있었다.
  이산가족 문제와 함께 내가 정상회담에서 다루려 했던 가장 큰 의제는 북한의 核 개발 및
  전쟁 포기를 촉구하는 것이었다. 나는 김일성 주석에게 할 이야기를 字句(자구) 하나하나까
  지 꼼꼼히 메모해 놓고 외우다시피 하고 있었다.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라. 전쟁은 절대 안 된다. 어떠한 경우든 남·북한간에 또다시 전쟁
  이 일어나서는 안된다. 남북전쟁은 共滅(공멸)의 길이다. 전쟁이 시작되면 가장 먼저 북한은
  완전히 멸망할 것이다. 북한 땅에는 한사람의 생존자조차 남기 힘들 것이다. 전쟁을 일으키
  면 당신은 역사와 민족 앞에 씻을 수 없는 죄인이 될 것이다」
  북한의 핵과 전쟁의 포기 외에 남·북 정상간 핫라인(Hot Line) 설치도 중요한 사안이었다.
  대신 나는 북한 주민의 고통스러운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食糧(식량)을 도와줄 의사를 제
  시할 생각이었다. 나는 또 북한의 불안을 덜어주기 위해 독일식의 흡수통일은 전혀 고려치
  않고 있다는 입장을 전달할 생각이었다. 또 구체적인 평화보장 방법과 평화통일 원칙 합의,
  신뢰구축 등 수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었고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회담이 시작되기 전까
  지 최종적인 입장을 가다듬어 가고 있었다.
  
  김일성 사망
  
  온 국민은 물론 세계가 7월25일로 예정된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 개최에 대해 비상한 관심
  을 가졌고, 나는 나름대로 김일성 주석과 만나게 되면 반드시 분명한 성과를 끌어낼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94년 7월9일 정오를 갓 넘긴 시각, 나는 15명의 여성정책심의위원들과 함께 막 칼국수로
  오찬을 시작하고 있었다. 아내와 김숙희·권영자 두 여성장관도 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다.
  그때 김석우 의전수석이 들어와 내게 메모를 한 장 내밀었다.
  「김일성 사망」이었다. 북한 중앙방송과 평양방송이 9일 낮 12시 「특별방송」을 통해 김
  일성이 7월8일 새벽 1시 심근경색과 심장쇼크 합병으로 사망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정상회
  담에 대비해 회의를 하고 있던 통일부총리·비서실장·안기부장·국방부장관·외교안보 수
  석 등이 놀라서 들어왔다.
  나는 김일성 사망 소식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만감이 교차했다. 50년간 민족의 비극적 분
  단과 대립에 결정적인 책임이 있는 독재자의 죽음, 보름 후로 예정된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
  담에 걸던 국민들의 희망과 기대 등등. 나는 오찬에 참석 중인 여성대표들에게 말을 꺼냈다.
  『지금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보름 후면 남북 정상이 함께 모여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허심탄회하게 의논하게 되어 있었는데, 대단히 아쉽게
  생각합니다』
  김일성 사망에 대해 아쉬워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1인 지배 체제의 절대 지배자가 갑자
  기 사망한 것이다. 어떠한 사태가 발생할지는 예측불허였다.
  나는 즉시 이병태 국방장관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全軍(전군)은 비상경계 태세에 들어
  갈 것, 조기 경보 및 전장 감시체제를 증강시킬 것, 한·미 공조체제를 재확인할 것, 對北
  방송을 비롯해 절대 북한과 북한군을 자극하는 행동은 하지 말 것 등이었다.
  나는 이어서 김덕 안기부장과 이홍구 통일부총리 등을 불러 상의한 뒤 오후 2시에 긴급 국
  가안보회의, 그리고 오후 5시에는 긴급 국무회의를 소집했다. 국가 안전보장회의에서 나는
  김일성 사망과 관련해 『우리의 기본적인 통일정책에 대한 변화는 아무것도 없다』고 밝혔
  다. 나는 또 각 행정부처의 장관들이 일체 북한에 대해 코멘트를 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갑작스런 업무량의 폭증
  
  김일성 주석의 건강을 우려하고는 있었지만 회담을 하기도 전에 사망하리라고는 생각지 못
  했었는데, 우려했던 것이 현실이 되어버렸다. 김일성은 당시 남북정상회담에 신경을 많이 쓴
  듯하다.
  일본 언론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김일성은 회담에 앞서 13차례나 참모회의를 가졌다고 한
  다. 북한 관리들이 나중에 방북인사들에게 밝힌 증언에 의하면, 7월7일 김일성은 묘향산에
  도착한 뒤 내가 묵을 별장의 침실과 욕실까지 직접 점검하고 냉장고에 광천수를 넣어둘 것
  까지 일일이 지시했었다는 것이다.
  나는 당시 82세의 노령에 남북정상회담이라는 중대한 일을 맞아 갑자기 업무량이 폭증한 데
  다, 회담 준비를 하면서 남·북간의 현실적 격차를 확인한 데 따른 스트레스 등이 김일성의
  사망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도 김일성 사망에 대해서는 여러 가
  지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북한에서는 김용순이 「有故(유고)에 의해서 7월25일로 예정된 정상회담은 연기할 수밖에
  없다」며 「위임에 의해서 이 사실을 통고합니다」라고 전해왔다. 「김정일」의 위임이라는
  뜻으로 해석되었다.
  남북정상 對坐(대좌)로 분단 반세기의 두꺼운 壁(벽)을 허무는 작업은 이렇게 해서 아쉽게
  도 역사의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고 말았다.
  
  1995년:JP 탈당과 나의 후회
  
  『옛 친구와 우정을 저버리는 사람 아니다』
  
  1995년 2월8일 나는 국제 그린크로스 총재자격으로 방한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러시아)
  前 대통령과 부인 라이사 여사를 청와대에서 만났다. 내가 이날 고르바초프를 만나기까지는
  상당한 우여곡절이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전에도 한번 서울에 온 적이 있었는데,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내가 고르바초
  프를 만나는 것을 대단히 꺼려했기 때문에 그때는 내가 옐친 대통령의 뜻을 존중해서 그를
  만나지 않았다. 1995년 2월 다시 서울을 찾은 고르바초프는 나와 만나기를 원했고 나 역시
  옛 친구인 고르바초프와의 만남을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옐친의 반대는 대단히 거셌다. 러시아는 쿠나제 대사를 통해 우리 외무부
  에 강력한 반대의 뜻을 거듭 전해왔다. 참모들은 나에게 강대국인 러시아와의 외교관계를
  고려해서도 러시아의 요구대로 하자고 건의했다. 하지만 나는 러시아에 통보해 나의 분명한
  입장을 옐친 대통령에게 전달하도록 했다.
  나는 고르바초프를 만날 것이다. 나는 한국 정치인 최초로 고르바초프와 만나 양국간 수교
  의 초석을 놓은 사람이다. 그가 비록 지금 대통령의 지위가 아니고 곤경에 처해 있다고 하
  더라도 나는 옛 친구와의 우정을 저버리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그를 만나더라도 한·러 양
  국 관계에는 전혀 변함이 없으며, 나와 고르바초프의 각별한 인간 관계를 옐친 대통령이 이
  해해주기 바란다.
  나는 이 날 고르바초프와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의 활달하고
  밝은 표정과 이지적인 면모는 대통령 시절에 비해 전혀 변하지 않았다.
  내가 『고르비 당신이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으로 너무 느슨하게 풀어놓았기 때문에 쿠데타가
  발생하고 옐친에게 권력을 넘겨주는 사태가 발생한 것 아닙니까?』하고 물었더니, 고르바초
  프는 『막강한 힘으로 권력에 안주할 수는 있었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변화를 가져
  와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그 속도가 너무 앞질러 가다 보니 黨(당) 조직이 느슨해
  졌던 것 같습니다』하고 말했다. 그는 『결국 그러한 사태가 왔지만 정권을 빼앗긴 것을 후
  회하지는 않습니다. 필연적인 것이 아니었는가 하고 생각합니다』하고 말했다.
  『그래서 세상이 이렇게 변하고 또 진보되어 가는 것 아닙니까. 이제 나는 철두철미한 민주
  주의자입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사람 중 하나
  
  1991년 8월에 소련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고르바초프 대통령 부부가 흑해 소치 별장에 연금
  되었던 나흘 동안 라이사 여사는 일부러 전혀 잠을 자지 않았다고 한다. 외부와의 모든 연
  락이 두절된 상태에서 언제 폭도들이 대통령 부부를 끌고 나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라이
  사 여사는 만약 한밤중에 남편과 자신이 서로 분리되어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끌려간다면
  영원히 헤어질 것이라는 걱정이 가장 앞섰다고 한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최후의 순간을
  예상해 『이것은 인정할 수 없다. 이것은 쿠데타다. 이 나라 인민들은 이러한 기가 막힌 일
  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반드시 정의를 위해 싸워야 한다…』고 비밀리에 녹음해 두었다고
  한다. 다행히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갔고 부부는 살아서 모스크바에 돌아오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권력은 옐친에게 돌아갔다.
  라이사 여사는 『우리 두 사람은 지금까지 모든 영광과 고난을 함께 했으며,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함께 걸어갈 것입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처럼 적극적인 내조로 全세계인의 사
  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아왔던 라이사 여사는 늘 밝고 유쾌한 모습으로 남편을 격려해 준
  우아하고 품위있는 여성이었다. 나는 『우리는 영원히 같이 살 겁니다』하고 말하던 라이사
  여사가 1999년 9월 아쉽게도 남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데 대해 아내와 함께 진심어린 애
  도를 담아 조전을 보냈다.
  러시아 국내에서 과거 페레스트로이카 시대의 화려했던 그의 인기는 떨어졌지만, 고르바초
  프는 여전히 세계적으로 커다란 인기와 존경을 받고 있다. 역시 고르바초프는 20세기의 가
  장 위대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무엇보다 그는 半세기 이상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로 양분되어 온 세계를 화해시킨 우리 시대
  의 영웅인 것이다.
  
  김종필에 대한 民主系의 거부감
  
  문민정부 출범 초기부터 金鍾泌(김종필)씨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이 많았던 게 사실이었
  다. 특히 민자당 안의 민주계에서는 다수 의견이 그러했다. 민주계 사람들은 대부분이 과거
  군사독재시절에 민주화투쟁을 하면서 중앙정보부나 軍 정보기관에 잡혀가 고문을 당하고 투
  옥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박정희 정권의 2인자였던 김종필씨에 대해서는 거부감이 많았
  다. 이들은 김종필씨가 나의 「후계」, 혹은 「내각제를 통한 포스트 김영삼」의 의지를 버
  리지 않고 있다고 판단했으며, 그가 「차기 논의」의 한복판에 서게 될 것을 우려했다. 그들
  은 또 김종필 대표 체제로는 개혁과 세계화의 추진에도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1995년 2월9일 김종필 대표는 민자당을 脫黨(탈당)했다. 이후 그는 舊공화계 세력을 중심으
  로 「자유민주연합」을 만들었다.
  사건의 발단은 1994년 12월 민주계 핵심인 崔炯佑(최형우) 당시 내무장관이 당의 지도체제
  개편을 주장하면서 시작되었다. 12월13일 최형우 장관은 기자들에게 『내년에는 큰 변화가
  있으며, 당대표제는 필요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최형우 장관의 말은 「세계화 개혁을
  위해 당 대표를 새 인물로 바꿔야 한다. 즉 김종필 대표의 2선 후퇴가 불가피하다」는 뜻으
  로 해석돼 논란을 일으켰다.
  김종필 대표는 속이 상한 것 같다. 12월17일 오후 나는 청와대에서 김종필 대표와 주례회동
  을 했다. 김종필 대표는 내가 사전에 최형우 장관을 비밀리에 만나서 그런 발언을 하도록
  지시한 것이 아니냐고까지 말했다. 나는 대단히 난감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였다. 나는 내
  가 사전에 최형우 장관과 따로 만난 일이 전혀 없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전화 통화도 한 적
  이 없었다.
  1995년 1월10일 나는 청와대에서 비밀리에 김종필 대표를 만나 오찬을 함께 했다. 나는 그
  동안 심사숙고해 온 말을 꺼냈다. 나는 黨이 쇄신을 하는 마당에 黨名(당명)·심벌·黨規(당
  규)·黨歌(당가) 등 겉모습만 바꾸어서는 안 될 것이며, 黨內(당내) 민주주의를 획기적으로
  진전시키기 위해 당직 및 공직후보의 당내 경선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나는 김종필
  대표가 전당대회를 순조롭게 치러주기를 당부했다. 김종필 대표의 거취를 둘러싸고 벌어지
  는 당내외의 복잡한 분위기를 나 나름대로 설명하고 김종필 대표의 협조를 요청했다. 나는
  김종필 대표가 전당대회 이후의 거취를 내게 맡겨줄 경우 그에게 최대한의 배려를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김종필 대표는 자신을 세계화에 부적합한 인물로 몰아 여론몰이식으로 물러나게 하려는 당
  내 일각의 움직임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내가 이들을 뒤에서 주도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막상 김종필씨가 탈당한다는 소식은 내게는 충격이었다. 12월과 1월 두 차례 청와대에서 만
  났을 때도 그랬지만 나는 김종필씨가 탈당을 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대표위
  원직을 사퇴하는 것을 보고 청구동 자택으로 사람을 보내는 등 그를 설득하기 위해 노력해
  보기도 했다. 그런데 끝내 김종필씨는 탈당하고 말았다.
  나는 지금도 오해와 감정이 복잡하게 얽힌 상황에서 김종필씨가 탈당한 것을 대단히 아쉽게
  생각하고 있다. 만약 그때 내가 김종필씨의 청구동 자택으로 찾아가 내 본심을 전했다면 오
  해가 풀렸을 것이고 탈당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의 탈당은 내가 지
  금까지의 정치역정 가운데 제일 아쉽게 생각하는 사건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테이블 밑에서 내 발등 밟은 엘리자베스 여왕
  
  1995년 3월8일 오전 영국 런던에 도착한 나는 그 날 오후 영국 여왕 관저인 버킹검宮에서
  열린 공식 환영식과 엘리자베스 여왕이 주최한 환영오찬에 참석했다.
  나는 환영식장에서 엘리자베스 여왕과 남편 필립公의 영접을 받고 인사를 한 뒤 필립공의
  안내를 받으며 의장대를 사열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국 근위병은 사열하는 동안 눈동자
  까지 고정되어 있어 마치 마네킹을 연상케 했다.
  사열을 끝낸 나는 버킹검宮 현관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엘리자베스 여왕과 합류한 뒤 여왕
  내외와 함께 버킹검宮 내의 2층 뮤직 룸에서 오찬을 가졌다. 창가에 있는 식탁에 나와 엘리
  자베스 여왕이 나란히 앉고, 맞은 편에 아내와 필립公이 나란히 앉았다. 창 밖에는 굉장히
  넓은 정원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고, 군데군데 자리잡은 湖水(호수)에서 강물같은 물줄기가
  흘러 내렸다. 그림같은 풍경이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온화하고 자상한 여성이었다. 낮은 목소리로 조리있고 재미있게 이야기
  를 이어갔다. 내가 『정원이 대단히 넓고 아름답다』고 말하자, 엘리자베스 여왕은 버킹검宮
  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유지비용이 많이 드는데 宮에 할애된 예산만으로는 모자란다고 하면
  서, 버킹검宮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1년에 한번씩 宮의 정원에서 가든파티를 연다고 설명
  했다. 초청 대상은 수백명에 이르는데, 모든 외교사절은 물론 영국의 역대 수상과 장관, 국
  회의원, 지방 유력자, 경제, 사회, 문화, 유명 배우에 이르기까지 총망라한다고 했다. 그들은
  초대받은 것을 영광으로 여기고 파티에 참석하는데, 그 파티에 참가하는 비용을 받아 버킹
  검宮을 유지하는 경비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여왕 부부와 한참 대화를 나누면서 식사를 하던 중 내 발 위로 뭐가 다니는 것 같았다.
  「이런 곳에 쥐가 있을 리 없을 텐데 이상하다」 생각하면서 식탁보를 살짝 들춰보았다. 그
  랬더니 여왕이 구두를 벗고 맨발로 더듬고 있었다. 발이 불편해 신발을 잠깐 벗었는데, 발로
  신발을 다시 찾느라고 그런 것이다. 나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 영국 왕실의 위엄이 잠깐
  「破格(파격)」의 유머러스한 장면을 보여 준 것이었다.
  
  신선한 인상을 준 블레어
  
  영국 방문 이틀째인 9일에도 바쁜 일정을 계속했다. 이 날 오전 숙소인 클라리지 호텔에서
  영국 勞動黨(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당수(現 영국 총리)를 접견하고 30여분간 환담했다. 나
  는 42세이던 블레어 당수를 보고 『30代(대)로 보인다. 이렇게 젊은 줄 몰랐다』고 인사했으
  며, 블레어 당수도 『김대통령도 마찬가지』라고 화답했다.
  이 날 저녁 나는 메이저 영국 총리가 주최하는 만찬에 참석하기 위해 다우닝街 10번지 총리
  공관을 다시 찾았다. 건물 자체가 적다보니 만찬장의 규모도 매우 작았다. 만찬장 이름은
  「대식당」이었으나, 주요 각료를 제외한 수행원들은 참석하지 못할 정도로 좁은 공간이었
  다.
  식사가 끝난 후, 나와 메이저 총리를 비롯한 몇 사람만이 10여 평 남짓한 작은 방에 들어가
  코냑을 한 잔씩하면서, 앉거나 서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때 메이저 총리가 갑자기 노동장
  관을 가리키며 큰 소리로 『내가 사흘 전에 저 자와 이스라엘에 다녀왔는데, 저 놈 나쁜 놈
  이에요』 하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메이저 총리는 『이스라엘서 총소리가 나
  니까 저자가 나를 버리고 도망치더라고요. 나쁜 자야』하며 말을 이어갔다. 그러자 메이저를
  빤히 쳐다보며 얘기를 듣고 있던 노동장관이 다가오더니, 『내가 언제 도망쳤습니까. 앞에서
  막았잖아요』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메이저 총리는 『무슨 소리야, 총을 뒤에서 쏘았지 앞에
  서 쏘았나!』고 응수를 했다. 방안에는 폭소가 터졌다.
  이어서 메이저 총리는 러시아 옐친 대통령과의 재미있는 에피소드 하나를 들려주었다. 한
  달 전쯤에 옐친 대통령이 영국을 방문해 총리 공관에서 국빈만찬을 베풀었는데, 만찬이 끝
  난 후 옐친이 「밖으로 나가 술 한 잔 더 하자」고 제의를 해서 시내로 나갔다고 한다. 부
  슬부슬 내리는 비를 뚫고 한 술집 앞에 도착했는데 문이 잠겨 있어 문을 두드려도, 주인이
  잠을 자는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 때 한 여인이 강아지를 끌고 왔다갔다 하면서 메이
  저와 옐친이 문 두드리는 모습을 구경했다. 한참 문을 두드리자 주인이 『누구냐』고 소리
  쳐 메이저 총리가 『옐친 대통령이오』하고 대답을 했다. 문을 연 주인 할아버지는 총리를
  알아보고 들어오라고 해서, 둘이 바(BAR)에 앉아 위스키 1병을 나누어 마셨다고 한다.
  메이저 총리는 내가 만난 정상들 중에 가장 유머가 풍부한 사람이었다.
  
  북한의 쌀 15만t 요청
  
  饑饉(기근)에 시달리던 북한이 朝鮮 三千里總公司와 우리의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 등
  몇 가지 경로를 통해 우리에게 쌀 지원을 요구해 왔다. 나는 對北 쌀 지원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정부 대표단을 구성해서 정부 차원에서 논의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다. 나는 곧
  청와대·통일원·안기부 등의 실무 대표단을 구성, 李錫采(이석채) 재정경제원 차관에게 단
  장을 맡겼다.
  나는 우리 대표단이 對北 쌀 협상을 하러 떠나기 전에 그들을 만나 여러 가지 지침과 주의
  를 주었고, 이석채 단장과는 별도로 여러 차례 만나 협상에서의 나의 복안을 전달했다.
  1965년 6월17일, 이석채 단장과 全今哲(전금철) 노동당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을 단장으로
  한 남북한 대표들이 北京(북경)에서 對北 쌀 제공에 관한 첫번째 회담을 가졌다. 이 날 비공
  개로 열린 회담에서 남북 대표들은 對北 쌀 제공을 정부나 당국, 또는 민간차원으로 할 것
  인가에 관해 집중 논의했으며, 이 자리에서 북한측은 15만t 규모의 쌀 지원을 요청했다.
  이어서 6월21일, 남북한 대표들은 북경에서 열린 4일간의 회담 끝에 한국이 북한에 대해 1
  차로 쌀 15만t을 조만간 무상 지원하기로 합의하고, 합의문을 교환했다. 그리고 남북한 양측
  은 1차분 15만t 외에 추가로 쌀 지원을 논의하기 위한 제2차 회담을 7월 중순에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對北 쌀 지원 결정을 하기까지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나는 북한 식량난의 심각성을 보면
  서, 무엇보다도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동포의 먹고사는 문제, 생존문제에 관한 한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같은 동포가 굶어 죽어가는데 이념과 체제 차이 때문에 이를 외면
  한다는 것은 민족에 대한 죄악이었다.
  또한, 나는 6월23일 청와대에서 출입기자들과 간담회에서 『이번 쌀 지원을 계기로 북한도
  생산적인 대화와 교류·협력의 場(장)으로 나오길 바라며, 그것이 국민 모두의 바람』이라고
  강조했듯이, 북한이 우리의 쌀 지원을 계기로 남북대화의 장으로 나와주기를 진심으로 바랐
  다.
  
  『제발 우리 좀 살려주십시오』
  
  남북 양측의 북경회담 과정에서도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당시 언론에서는 전금철이 오히
  려 큰소리를 치면서 고압적인 자세로 나왔고, 우리는 계속 끌려다녔다는 식의 온갖 추측기
  사를 남발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과 전혀 다른 왜곡 보도였다.
  북한측 협상단은 옷차림부터가 보기 딱할 정도로 남루했다.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북한 전
  금철은 쌀을 달라면서 통 사정을 했다. 『식량이 없어 우리가 다 죽게 생겼습니다. 형제밖에
  더 있습니까. 제발 우리 좀 살려주십시오』하며 울다시피 매달렸다. 북한 대표는 회담 도중
  에도 수시로 본국과 연락해서 지침을 받곤 했으며, 이석채 단장과 전금철의 단독회담 때도
  전금철 옆에는 항상 감시하는 사람이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다.
  북한의 전금철은 협상이 타결된 후 이석채 단장과 단둘이 만나 『김영삼 대통령 각하께 배
  려에 대해 특별히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해주십시오』라고 말을 했다. 북한 대표가 「대통령
  각하」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로 그만큼 북한은 우리의 쌀 지원에 대
  해 고마워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북측이 회담 내용을 녹음하지 말자고 하는 바람에 이석채 단장이 수첩에
  다가 전금철과의 대화 내용을 일일이 적어, 회담 후 나에게 보고한 내용이다.
  
  북한 인공기 사건
  
  북경회담이 타결됨에 따라 對北 쌀 지원을 위한 준비에 본격 착수했다. 나는 북한에 쌀을
  지원하되 제일 좋은 햅쌀로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보내도록 지시했다. 또 이 사업이 민족
  적인 사업인 만큼 도정 및 포장재 공장, 선적 항구 등에서 전국적 규모로 진행하도록 지시
  했다. 여기에 소요되는 2억3200만 달러 상당의 경비는 남북경협 기금에서 전액 부담토록 했
  다.
  이에 따라 호남·영남 등 전국의 도정공장 200여개소가 일제히 밤을 새면서 가공작업에 들
  어갔으며, 전국의 30개 포장재 공장은 쌀을 담을 포대 제작준비에 들어갔다. 또 동해·목
  포·군산·마산 등 지정된 항구도 부산하게 움직였다.
  남북한은 6월25일 쌀 제공 관련 계약서에 합의 서명했으며, 우리 쌀 1차분 2000t을 실은
  「씨 아펙스號」가 이 날 오후 강원도 東海港(동해항)을 출발해서 淸津港(청진항)으로 향했
  다. 나의 지시로 이홍구 부총리가 항구까지 나가봤다. 우리의 國籍船(국적선)이 태극기를 게
  양하고 북한 영해를 항해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씨 아펙스호는 그러나 청진항 진입과 쌀 하역작업 중 북한측의 위협으로 태극기를 내리고
  북한 人共旗(인공기)만 달았던 것으로 29일 확인되었다.
  국제적인 관례는 국제선박이 외국 항구에 入港(입항)할 때는 상대방 국기를 중앙에 달고 自
  國旗(자국기)는 船尾(선미)에 다는 것이다. 그런데 북경회담에서 쌀 수송선은 어느 쪽 국기
  도 게양치 않기로 구두로 양해했었는데, 북한은 『마스터에는 인공기를 달고 船尾에 있는
  태극기는 내리라』고 위협한 것이다.
  
  헬기에서 고성능 마이크로 회항 지시
  
  씨 아펙스호가 청진항에 쌀을 내려놓고 북한 영해를 벗어난 것은 공교롭게도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6월29일이었다. 이 날 유종하 외교안보수석이 『북한측으로부터 인공기를 게양하도
  록 강요받았다』는 선장의 육성 방송을 밤 9시 뉴스에서 듣고 내게 밤늦게 전화로 보고했
  다.
  삼풍백화점 뒷수습 문제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지쳐 있던 나는 유종하 수석의 전화를 받고
  사태의 심각성을 직감했다. 그리고 이어 쌀을 싣고 북으로 향하던 배 두 척을 回航(회항)시
  키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문제는 북한으로 향하는 배에는 회항을 지시할 통신시설이 없었다. 선박회사에서 통
  신을 할 수 있었지만 밤이 너무 늦어 모두 퇴근을 했고, 선박회사 간부와도 연락이 안 되었
  다. 청와대 상황실에서 비상수단을 강구했다. 공군 헬기와 군함을 북한 해역 50km 지점까지
  가 있던 쌀 수송선에 접근시켜 고성능 마이크로 회항지시를 내렸다.
  이와 함께 정부는 북한 당국 차원의 공식 사과가 있을 때까지 추가적인 쌀 지원을 전면 중
  단키로 했다. 정부는 이 문제와 관련, 북한 조선 삼천리총공사가 사과 電文(전문)을 보내오
  기는 했으나, 양측간 합의사항의 명백한 위반으로 판단하고, 북경회담의 서명자인 전금철 명
  의의 공식사과가 없을 경우 쌀 수송선의 추가 출항을 중단하기로 했다.
  7월15일부터 북경에서 제2차 쌀회담을 가졌다. 7월15일부터 18일까지 4일간 열린 회담결과
  ▲1차 회담을 통해 합의한 쌀15만t의 원활한 지원을 위해 보완조치를 취하며 ▲우성號 선원
  송환문제에 대해 북측은 관계당국의 조사가 끝나는 대로 가능한 한 빨리 송환하기로 하고,
  ▲제3차 회담은 8월10일 잠정적으로 북경에서 개최하며, ▲남북간 경협문제를 협의키로 했
  다.
  그러나 10일로 예정됐던 제3차 남북 북경 당국자 회담은 북한측의 불참 통보로 무기한 연기
  되었다. 북한측은 쌀을 싣고 청진항에 입항한 삼선비너스號의 선원이 카메라로 청진항을 촬
  영했다는 이유로 선원 21명과 선박을 억류한 채 이를 「정탐행위」라고 주장, 우리측의 사
  죄를 주장하면서 제3차 회담 불참을 통보해 온 것이다.
  
  『공산당은 주면 줄수록 요구』
  
  북한측의 삼선비너스號 억류에 따라 對北 지원쌀 가운데 아직 수송되지 않은 7만5000t의 수
  송이 전면중단됐다. 인도적인 차원에서 쌀을 무상으로 지원하기 위해 간 민간선박의 선원이
  고의로 정탐행위를 했다는 것은 한마디로 억지였다.
  나는 실로 황당하고 난감했다. 북측에 적지 않은 분량의 쌀을 무상으로 보내주는 인정을 베
  푼 데 대해 고맙다고 인사를 받기는커녕, 「人共旗 사건」에 이어 쌀 수송선과 선원을 억류
  당하는 기막힌 입장에 놓이게 된 것이다.
  북한의 이런 이중적인 태도는 한마디로 표리부동한 공산주의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이고, 동족에 대한 배신이었다. 나는 과거에 세계 사회주의 정당 대표들을 초청한 일이 있
  었다. 그 때, 소련 공산당의 핵심 간부 한 사람이 『공산당에 대해서는 제가 잘 압니다. 공
  산당은 주면 줄수록 요구합니다』라고 말을 했던 기억이 새삼 떠오르기도 했다.
  북한 청진항에 억류 중이던 삼선비너스號는 8월14일 오후 浦港(포항)으로 되돌아 왔다. 하루
  전인 8월13일 남북간 송환협상이 타결되었기 때문이다.
  그후 삼선비너스號 억류사건으로 무산됐던 제3차 남북 당국자 회담을 재개하기 위한 남북간
  접촉이 있었으나 결렬됐다. 정부는 인공기 사건과 삼선비너스號 선원 억류사건을 계기로 쌀
  지원을 매개로 한 對北협상 자체를 전면 再검토하게 되었다. 이미 북한에 지원키로 한 15만
  t의 쌀 이외에는 별도의 쌀 지원을 하지 않기로 방침을 굳혔다.
  
  『金大中은 과거 부정 수사할까봐 英國으로 떠나』
  
  김대중씨는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난 뒤 국민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정계은퇴를 선언
  했다. 그러고 난 뒤 영국으로 갔다. 나는 그의 말바꾸기와 거짓말을 너무나 많이 보아 왔기
  때문에 좀처럼 그의 말을 신뢰하지 않았지만, 국민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정계은퇴 선
  언을 했을 때는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박정희가 그랬듯이 김대중씨도 눈물로 자기 자신과
  국민을 속일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결국 나와 국민은 김대중씨에게 또
  한번 속았다.
  국민 앞에 눈물을 흘리며 정계은퇴를 약속하고 1993년 1월 영국으로 떠났던 김대중씨는 6개
  월쯤 지난 뒤 슬그머니 귀국했다. 그는 여전히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공언했지만 처
  음 떠날 때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의 귀국을 놓고 정가에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분분했지만, 내가 판단하기에 김대중씨는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한 후 대통령인 내가 그의 부정한 과거를 수사할까봐 두려워서 영국으
  로 떠난 것이다. 나중에 스스로 자백했듯이 김대중씨는 노태우씨로부터 20억원을 받는 등의
  부끄러운 자신의 행적이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김대중씨 본인은
  물론 그의 측근에 대해서 어떠한 조사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파악하고는 귀국한 것이었
  다.
  한국 재계의 선두를 달리던 현대그룹의 엄청난 자금과 조직을 총동원해서 1992년 大選(대
  선)을 혼탁한 金權선거로 얼룩지게 만들었던 정주영씨의 경우, 대선이 끝나자 스스로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물러났다. 정주영씨는 천문학적 자금을 조성해 기업을 정치의 수단으로 악
  용하다가 결국 기업과 정치 양쪽 모두에 엄청난 해를 끼쳤지만 나는 그를 인신 구속하지는
  않았다. 내가 나중에 그를 청와대로 불러 『당신은 처벌받아야 할 사람이지만 경제를 염려
  해서 사면할 것』이라고 통보해 주었는데, 그는 뜻밖의 사면에 너무나 놀라서 나가는 문을
  찾지 못할 정도였다.
  나는 지금까지 김대중씨나 정주영씨는 물론이고 그 누구에 대해서도 정치보복을 생각한 적
  이 없으며, 심지어 전두환·노태우에 대해서도 천문학적 부정부패가 밝혀지기 전까지는 어
  떻게든 인신 구속만은 막아보려고 했었다.
  
  『江주석과 내가 강력하게 대처합시다』
  
  1995년 11월13일 오후 江澤民(강택민) 중국 국가주석이 우리나라를 공식방문했다. 중국 권력
  서열 1위인 국가주석이 우리나라를 방문한 것은 우리 역사상 처음이었다.
  14일 오전 韓·中 정상회담이 열렸다. 이날 나와 강택민 주석 간 단독회담은 당초 40분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예정시간의 두 배를 넘겨 1시간35분간 계속되었다. 나와 강택민 주석은
  한반도 문제는 南·北 당사자간의 대화를 통해 풀어 나가야 하며,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위
  해 停戰(정전)협정은 준수돼야 한다는 데 견해를 같이했다. 경제협력 분야에 관련해 양국은
  중형 항공기 공동개발을 조기에 착수하고, 원자력 분야와 러시아 가스田 개발에 협력하는
  방안을 적극 모색하기로 합의했다.
  나와 강택민 주석은 또 일본의 過去事(과거사) 妄言(망언)에 대한 문제를 집중 논의했다. 정
  상회담이 길어진 이유도 사실은 이 문제에 대한 논의와 대책 마련에 많은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당시 韓日관계는 일본의 과거사 망언으로 인해 급속하게 악화된 시기였다. 中·日
  관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라야마 총리는 10월5일 「한일합방 조약은 합법」이라는 망언을 했다. 이어서 10월 11일
  에는 에토 총무청장관이 「식민지 통치 시절에 일본이 좋은 일도 많이 했다」는 망언을 했
  다. 이 망언은 11월8일 국내에 뒤늦게 알려졌다. 계속되는 일본 고위층의 망언에 국민들은
  분노했고, 나 역시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나는 각급 외교채널을 통해 일본 정부에 강력하게 항의하는 한편, 11월 초로 예정된 韓日의
  원연맹 총회를 무기 연기하도록 지시하였다. 11월11일로 예정된 일본 고노 외상의 訪韓도
  거부했고, 만약 에토 장관을 경질하지 않으면 11월 중순으로 예정된 韓日 정상회담도 거부
  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밝혔다. 결국 11월13일 에토 장관은 사임하였고, 다음날 일본 총리
  는 「韓日조약은 불평등조약이었다」는 사과친서를 보내왔다.
  나는 강택민 주석에게 『일본이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번에도 그냥 넘어간다면 일본의 과
  거사 망언은 점점 더 심해질 것입니다. 이번 기회에 江주석과 내가 강력하게 대처합시다』
  하고 제의했다.
  강택민 주석은 『내가 어렸을 때 일본군이 南京(남경)에서 대학살을 하는 것을 직접 봤습니
  다. 그런데도 일본은 그런 일이 없었다고 잡아떼고 있습니다』하며 일본을 비난하면서, 『좋
  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의 제의에 동의합니다. 일본을 강력하게 규탄하는 우리의 의지를 공표
  합시다』고 동의했다.
  
  『이번에는 버르장머리 고치겠다』
  
  정상회담을 마친 나와 강택민 주석은 공동기자회견을 갖고 일본의 과거사 妄言에 대해서 단
  호하게 비판했다. 다음은 이와 관련한 우리 두 사람의 발언 全文이다.
  ▲강택민 주석=중국과 일본의 관계는 지금 장래를 내다보는 그런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습
  니다. 우리는 일본과의 우호관계를 계속적으로 발전시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과정에서 하나의 전제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옛날에 우리 인민에게 입힌 일본 군국주의의
  재난에 대해서 일본측에서는 정확한 인식을 해야 한다는 전제입니다. 그 어떤 역사도 말살
  될 수는 없습니다. 역사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나 견해를 갖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중국과
  일본 사이의 전쟁이 끝난 지 이미 반세기가 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의 일부 인사들, 그중에는 정치인들도 있습니다마는, 아직도 아주
  완고하게 그릇된 역사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옛날 중국·아시아 국가에 대한 침략
  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은 일본 정부의 장기적인 역사에 대한 명확한 태도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여기서 핵심적인 문제는 그 침략전쟁에 대한 일본 정부의 인정이냐 아니냐에 달려 있습니
  다. 본인은 일본의 고위급 인사들을 만날 때마다 항상 이런 말을 천명해 왔는데, 「前事不忘
  後事之師(과거의 일을 잊지 않아야 앞으로의 귀감이 될 수 있다)」는 얘기를 여러 번이나
  되풀이했습니다. 우리는 일본의 소수 군국주의 세력을 경계해야 하고, 일본으로 하여금 역사
  를 똑바르게 인식하고 평화·발전의 길로 나가도록 해야 합니다.
  ▲나=조금 전에 江주석께서 일본의 계속되는 망언에 대해서도 말씀을 하셨는데요, 그 문제
  와 관련해서 우리 한반도의 평화는 물론이고, 아시아·중국 평화는 물론이며, 세계 평화와도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계속되는 그러한 망언에 대해서도 아주 깊이 있는 의견교환을 했
  습니다. 내 자신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에 일본은 총리가 네 번이나 바뀌었어요. 그 네 사
  람이 취임한 이후에 다 우리나라를 방문했지만, 그때마다 내가 얘기한 것이 있습니다. 제일
  중요한 얘기가 「역사인식을 바로 해라. 과거의 침략행위, 우리를 식민지로서 그렇게 잔혹하
  게 대한 일에 대해서, 중국에게 한 일에 대해서도 반성해야 된다. 역사를 직시하는 가운데
  미래지향적으로 가자. 반성의 토대 위에서 가자」,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이런 얘기를 한
  번도 안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망언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번 이 망언까지 합하면 서
  른 번은 넘은 것 같아요. 그래서 이번에는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 문민정부의 당당한 도덕
  성에 입각해서 과거의 군사정부하고는 다르다는 것을 일본에게 보여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
  합니다. 이 사람(에토 장관)이 실질적으로 해임되지 않으면 정상회담도 안 할 것이고 외상회
  담도 안 할 생각입니다. 이것은 평화 문제하고도 직결됩니다.
  
  1997년:黃長燁 망명과 金大中 비자금
  
  황장엽 북한 노동당 비서 망명
  
  1997년 2월, 전세계의 이목을 끈 매우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다. 북한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
  겸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장 黃長燁(황장엽) 비서와 그의 심복인 노동당 중앙위 자료연구실
  부실장 金德弘(김덕홍)씨가 2월12일 오전 중국 북경주재 한국총영사관에 한국으로의 망명을
  신청했다.
  북한 노동당 최고 지도부에 속한 비서가 망명한 것은 분단 이후 52년 만에 처음 있는 대사
  건이었다. 더욱이 황장엽 비서는 지난 50년간 북한 체제의 사상적 지주가 되어온 대표적인
  지식인이었다. 金日成대학 총장을 지낸 그는 북한 주체사상 이론의 「설계사」이자 「전도
  사」였다. 그의 망명은 곧 북한을 이끌어온 주체사상의 망명이었다. 이 사건은 남·북한과
  중국을 극도의 긴장 상태로 몰아넣으면서 세계적인 뉴스로 떠올랐다.
  황장엽 비서는 망명 직후 우리측 관계자에게 『나는 내가 만든 주체사상이 金日成·金正日
  부자의 권력세습과 권력유지의 도구로 이용되고 또 그 사상 때문에 수많은 인민이 헐벗고
  병들고 굶주리게 된 북한의 현실이 너무나 한탄스러워 죄책감을 느껴 왔다』고 밝혔다. 또
  『나는 우리 민족을 불행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문제를 좀 더 넓은 범위에서 협의하고 싶
  은 심정에서 北을 떠나 南의 인사들과 협의해 보기로 결심하였다』고 망명 동기를 밝혔다.
  나는 즉각 중국정부와 망명 실현을 위한 교섭에 들어갔다. 나는 공식적으로 외무부를 통해
  『한국으로 보내라』는 입장을 강력하게 제기했다.
  한편, 북한은 황장엽 비서의 망명 사태에 즉각 호전적인 반응을 보였다. 북경은 언제든 북한
  에서 기차를 타고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북한은 황장엽 비서의 망명 요청이 남한의 납
  치극이라고 생떼를 쓰면서 그를 북한으로 돌려보내지 않을 때는 복수하겠다고 위협했다. 북
  한은 부총리급 인사를 북경에 보내 중국 정부에 황장엽의 북한 송환을 요구하는 한편, 북한
  청년들을 북경까지 동원해서 우리 총영사관을 포위하고 「황장엽을 내 놓으라」며 「위력
  시위」를 벌였다. 중국은 軍 장갑차를 동원해서 영사부에 대한 경계에 들어갔다. 우리 영사
  부는 일시적으로 북한의 시위대에 의해 고립된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에 빠져들었다.
  시간이 경과하면서 중국이 황장엽 비서를 북한으로 보낼 것이라는 분위기도 감지됐다. 우리
  대사관에서도 영사부를 포기해야 될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江澤民 주석에게 친서를 보냈다.
  강택민 주석에게 이런 문제로 편지를 쓰는 일은 처음이었다.
  <강택민 주석, 황장엽 비서 본인이 한국으로 망명을 원하고 있는 만큼 황장엽 비서는 반드
  시 한국에 와야 됩니다. 북한과 오랜 관계가 있다고 해서 중국이 황장엽 비서를 북한에 돌
  려보내는 일은 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만약 그가 북한으로 송환된다면 우리나라와 중대한
  외교문제가 발생할 것입니다>
  강택민 주석에게 친서를 보냈음에도 중국측에서는 한참 동안이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나
  는 張庭延(장정연) 중국대사를 비밀리에 청와대로 불렀다. 장정연 대사는 통역이 필요 없을
  정도로 한국말을 대단히 잘했다. 나는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張대사와 배석 없이 단 둘이서
  만났다.
  나는 『張대사는 모르겠지만 사실 내가 황장엽 비서 망명과 관련해 강택민 주석에게 친서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응답이 없습니다』. 나는 강택민 주석이 과거 나에게 여러 차례
  「형제같이 지내자」고 말한 것을 상기시켰다.
  『강택민 주석이 나와 兄弟之情(형제지정)으로 지내면서 모든 것을 상의하자고 해놓고 이럴
  수 있습니까. 황장엽 비서를 북한에 보내면 韓·中 관계가 매우 나빠지는 것은 물론 강택민
  주석과 나와의 개인적 관계도 다시 생각할 것입니다. 만약 황장엽 비서를 북한에 돌려보낸
  다면 그는 즉시 총살당하게 될 것입니다. 황장엽 비서가 북한에 송환돼 총살된다면 국제적
  으로 반드시 인권문제화될 것이며, 강택민 주석은 인권을 말살한 사람으로 국제적으로 지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을 강택민 주석에게 반드시 전해 주세요』
  
  강택민의 당부:『제3국에서 한 달 이상 머물게 해달라』
  
  나를 만난 후 장정연 대사는 강택민 주석에게 오늘 중에 즉각 보고하겠다고 약속했다. 모든
  것이 극비리에 이루어졌다. 얼마 후 회신이 왔다. 황장엽 비서를 한국에 바로 보내는 것은
  힘들고, 국제관례상 제3국으로 보내 일정한 시간이 지난 뒤 한국으로 보내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강택민 주석은 황장엽 비서를 「최소한 한 달 이상 제3국에서 머물게 해달라」
  고 내게 당부했다. 북한과의 관계를 생각해서 황장엽 비서의 한국행을 최대한 늦추는 것이
  북한을 덜 자극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중국측에서는 『어디로 보내면 좋겠습니까』하고
  내게 의견을 물어왔다.
  제3국을 어디로 할 것인지를 놓고 나는 여러 나라를 떠올리며 고민한 끝에 필리핀으로 최종
  결정했다. 필리핀은 북한 공관이 없고 중국과의 관계도 비교적 원만했으며, 무엇보다도 라모
  스 필리핀 대통령과 나는 친구로서 각별한 친분을 맺어왔기 때문이다.
  나는 서둘러 반기문 외교안보수석을 비밀리에 라모스 필리핀 대통령에게 특사로 보냈다. 반
  기문 수석은 심야에 라모스 대통령을 만나 「중국이 황장엽 비서를 필리핀으로 보낼 것이니
  잠시만 맡아 달라」는 나의 친서를 전달했고, 라모스 대통령은 『김영삼 대통령이 부탁하는
  것인데 들어줘야죠』하며 흔쾌히 승낙해 주었다.
  3월18일 황장엽 서기 일행은 극비리에 중국에서 필리핀으로 옮겨졌다. 황장엽 비서 일행은
  이날 극비리에 특별기 편으로 마닐라 북동쪽 75km 지점에 위치한 클라크 국제공항에 안착,
  다시 필리핀 공군 헬기편으로 마닐라 북쪽 250km 지점에 있는 휴양도시인 바기오 지역의
  安家(안가)로 이동했다. 바기오 휴양지는 산악지대에 위치해 있어 일반인의 접근이 어려웠
  다.
  
  라모스:『빨리 데려가라』
  
  그후 며칠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라모스 대통령한테 비밀리에 私信(사신)이 왔다. 라모스 대
  통령은 『나는 간단히 생각하고 金대통령 말을 들었는데, 지금 참 괴로운 형편입니다. 야당
  에서 들고 일어나고, 언론에서도 황장엽 비서를 빨리 내보내라고 난리입니다. 공산당 게릴라
  들의 습격도 우려됩니다』하고 난처한 입장을 호소해 왔다.
  라모스 대통령은 처음에는 황장엽 비서 일행이 열흘 정도 필리핀에 체류하면 된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러나 차츰 시일이 지나면서 라모스 대통령은 곤란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親북한 세력인 일본의 赤軍派(적군파) 대원이 황장엽 비서를 암살하려고 입국한다는 제보로
  필리핀 당국의 경호에 비상이 걸렸는가 하면, 필리핀 야당이 들고 일어나 황장엽 비서에게
  피난처를 제공한 라모스 대통령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라모스 대통령은 내게 전화를 하거나 사신을 보내 황장엽 비서를 빨리 데려가 달라고 재촉
  했다.
  나는 중국과 「한 달 이상 제3국 체류」를 약속했기 때문에 라모스 대통령의 말을 선뜻 들
  어줄 수가 없었다. 라모스 대통령이 재촉할 때마다 「조금만 더 참아달라」거나 「우리도
  황장엽 비서를 데려오려면 준비가 있어야 될 것 아니냐」며 시간을 벌었다.
  마침내 황장엽 비서는 김덕홍씨와 함께 우리가 보낸 KAL 특별 전세기를 타고 4월20일 성
  남 서울 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북경 주재 한국 영사관에 망명한 지 67일 만이며, 필리핀
  체류 34일 만이었다. 나는 제3국에 한 달 이상 체류시키겠다는 강택민 주석과의 약속을 지
  켰다.
  황장엽 비서 일행이 한국에 도착한 후 나는 적당한 때에 그를 만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김
  일성 사후 북한 체제 내부의 상황과 김정일 체제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고 싶어서였다. 그런
  데 어느 날 언론에서 이른바 「황장엽 리스트」를 대서특필했다. 황장엽 비서가 풀어놓을
  「정보 보따리」에 그동안 소문으로 나돌던 국내의 親北(친북)인사에 관한 정보가 있을 것
  이고, 그 정보의 파괴력은 엄청날 것이라는 추측보도였다. 거기에는 김대중씨의 과거 행적에
  대한 상당한 비밀도 포함되어 있다는 내용이 언론에 크게 보도되기 시작했다. 나는 고민하
  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황장엽 비서를 만났다가는 내가 공작을 했다고 공격을 해올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나는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재임 중에 황장엽 비서를 만나는 것을
  피했다.
  나는 퇴임한 후 홀가분한 상태에서 황장엽 비서를 만나고자 했다. 그러나 또다른 이유로 그
  를 만날 수가 없었다. 김대중 정부에 의해 황장엽 비서는 사실상 연금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현철이 구속
  
  1997년 2월21일 검찰에서 조사를 받은 현철이는 韓寶(한보)와 전혀 무관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자 김대중씨 등 야당과 언론에서는 이번에는 현철이가 「각종 인사에 개입하는 등 국정
  을 농단했다」며 정치공세를 시작했다. 야당의 요구는 국회의 한보 청문회에 현철이를 증인
  으로 출석시키라는 것이었다. 현철이가 국정에 개입했다는 야당의 주장은 사실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4월25일 현철이는 국회 청문회의 증언대에 섰다. 여당인 신한국당은 당시 원내의석이 과반
  수였고, 내가 총재로 있었다. 내가 반대하면 현철이의 증인 출석을 막을 수도 있었다. 하지
  만 나는 『네가 결백하다면 청문회에 나가서 떳떳하고 당당하게 주장을 해라. 그래야 모든
  의혹이 풀릴 것이 아니냐』고 아들에게 말했다. 신한국당에도 현철이를 청문회 증인으로 세
  우라고 지시했다.
  아들을 검찰의 조사를 받게 한 데 이어, 청문회에까지 세우는 아버지의 심정은 고통 그 자
  체였다. 내가 끝내 아들을 청문회에 세우게 한 것은 야당의 요구에 응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본인에게도 도움이 되고 국민들의 뜻에도 부합하는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
  문이다.
  험담과 비방만 늘어놓은 채 청문회는 막을 내렸지만 현철이에 대한 야당의 지나친 정치공세
  는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도저히 정상적인 국정운영이 불가능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고통스럽고 쓸쓸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나의 재임 중 가장 괴롭고 고독한 시간들이었다. 대
  통령 취임을 앞두고 가족들을 불러모아 대만의 蔣介石(장개석) 총통 얘기를 빌어서 엄격한
  몸가짐을 당부했던 일이 떠오르기도 했다. 아들이 원망스럽다가는 아버지로서의 자책이 몰
  려오는 순간들이 반복되었다. 집무를 보면서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온갖 번민과 회한
  으로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현철이의 등을 떠밀어서라도 진작 해외에 내보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일기도 했다. 어려서
  부터 정치에 관심이 컸던 현철이에게 나는 그동안 미국 유학을 몇 차례 권했었다. 대통령의
  아들인데다 정치에도 관심이 크다면 아무래도 우리 현실에서는 많은 로비와 비난의 표적이
  될 소지가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해리티지 연구소와 브루킹스 연구소에 사전
  에 이야기를 해놓고 현철이를 두 번이나 미국에 보냈었는데, 얼마 있지 못하고 귀국해 버렸
  다. 세 번째로 등을 떠밀다시피 미국 유학을 강권했더니, 이번에는 한사코 안 가겠다고 버텼
  다. 비록 대통령이더라도 강제로 자식을 추방할 수는 없었다. 대신 몸가짐에 대해서 각별히
  조심하라고 거듭 주의를 주었었다.
  「내 아들을 구속시켜야 한다」.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현철이를 그대로 둘 수는 없었
  다. 나는 몇 날 며칠을 두고 고민을 거듭한 끝에 결심했다. 나는 김기수 검찰총장한테 직접
  전화를 해 『현철이를 구속하라』고 지시했다. 김기수 총장은 펄쩍 뛰면서 『2월에 이미 조
  사해 보았지만 아무런 혐의가 없는데 어떻게 구속합니까? 여론재판에 의해 구속하는 것은
  법치주의에도 어긋납니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아니다. 구속해라. 혐의를 찾아봐라』고
  재차 엄명을 내렸다.
  며칠 후 김 총장은 『며칠을 조사해도 구속시킬 만한 혐의를 찾을 수가 없다』고 보고했다.
  내가 『그래도 어쨌든 조사를 해보라』고 했더니, 김 총장은 『굳이 꼭 구속해야만 한다면
  방법이 하나 있긴 있습니다. 정치자금에 대해 세금을 내지 않았다는 혐의로 처벌하는 방법
  이 있습니다. 하지만 법률에는 판례라는 게 있습니다. 정치자금에 대해 세금을 내지 않았다
  는 이유로 처벌한 사례는 우리나라 50년 역사에서 한번도 없었던 일입니다. 그렇게까지 하
  면서 꼭 구속해야만 하겠습니까?』하고 물었다. 나는 『그 방법대로 해라. 전례가 없다면 이
  번에 만들면 될 것 아닌가』하고 지시했다.
  5월17일 검찰은 현철에게 특가법상 알선수재 혐의와 조세포탈 혐의를 적용, 서울구치소에
  구속·수감했다. 검찰이 정치자금에 대해 증여세 포탈 혐의를 적용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
  다.
  
  전두환·노태우 사면론
  
  1997년 9월1일과 2일, 도하 언론에는 갑자기 與圈(여권)이 전두환·노태우씨를 추석 전에 사
  면할 것이라는 기사가 1면 머리로 크게 보도되었다. 9월4일 나와 이회창(당시 신한국당 대
  통령 후보)씨의 주례회동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이를 앞두고 이회창씨는 전·노 사면을 추
  진하겠다고 발표해 버렸다. 당연히 여당 대표이자 대통령후보인 그의 말에 언론은 추석 전
  사면을 기정사실화해서 대서특필한 것이다.
  전두환·노태우씨의 사면 문제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이를 다음 정권에 넘길 생각은 없었다.
  대통령 선거를 끝낸 뒤 내 임기를 마치기 전에는 이 두 사람을 사면하겠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하고 있었다.
  나는 大選이 끝나기 전까지는 절대 발설하지 말 것을 전제로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도
  이런 입장을 미리 밝혀 둔 바 있었다. 또 당 대표직을 맡은 이회창씨와 여러 차례 주례회동
  을 할 때도 같은 이야기를 해 준 바 있었다. 나는 즉각 청와대대변인을 불러 『사면 복권은
  대통령 고유권한이다』는 성명을 발표하도록 지시했다. 그러자 2일 오후 이회창 대표에게서
  연락이 왔다. 지금 춘천에 있는데 저녁에 서울에 도착하는 대로 나를 찾아오겠다는 것이었
  다. 9월2일 밤 10시가 넘은 시각, 나는 관저에서 이회창을 만났다. 나는 크게 화를 냈다.
  『이회창 대표, 몰라도 이렇게 모릅니까. 사면을 해도 대통령인 내가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내가 사전에 충분히 설명까지 해 주었는데 이럴 수가 있어요! 정신 좀 차리세요. 전두환·
  노태우 두 사람은 선거가 끝난 후 내 임기 중에 사면할 것이니 다시는 그 말을 꺼내지 마세
  요』
  이회창씨는 크게 당황해서 다시는 이를 거론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후보 교체론까지 대두
  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인제를 비롯한 당내 비주류들을 추스리고 끌어안지는 못하고 이런 엉
  뚱한 발상을 해낸 이회창씨의 미숙한 정치적 판단력이 한심스럽기까지 했다.
  
  김대중씨 비자금 수사 유보
  
  이회창씨가 김대중씨의 비자금을 폭로하고 검찰의 수사를 요구하는 것을 보고 나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이회창씨는 김대중씨의 비자금에 대한 수사가 이뤄지면 자신이 대통령선거
  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 같다. 하지만 사태는 그렇게 간단치 않았다.
  대통령 선거를 불과 2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일단 김대중씨의 부정축재를 수사하게 되면 그
  의 구속은 피할 수 없을 것이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전라도 지역은 물론 서울에서도 폭동
  이 일어날 것이고, 그럴 경우 대통령 선거를 치를 수 없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
  다.
  선거 자체가 없어질 상황인데 어떻게 당선될 수 있다는 말인가. 이회창씨의 생각은 경쟁자
  를 선거에서 배제하려다가 선거 자체를 없애 버리게 될 무모한 발상이었다. 그는 눈앞의 승
  리에만 급급해 이런 잘못된 시각을 갖게 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대통령 선거가 없어진다
  면 국가 전체는 대혼란에 빠져들게 될 것이었다.
  10월19일 일요일 아침 9시, 나는 청와대 관저로 金泰政(김태정) 검찰총장을 불렀다. 집무실
  로 부르면 당장 신문에 보도되기 때문에 일요일 아침을 택해 관저로 부른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김태정 총장에게 지시했다.
  『만일 김대중 비자금 사건을 검찰에서 수사하게 되면 대통령 선거를 치를 수 없게 된다.
  광주를 비롯한 호남과 서울에서도 폭동이 일어나 선거를 치를 수가 없다. 내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렇게 되면 우리나라는 헌정이 중단되고 대통령 없는 나라가 된다. 이게 말
  이나 되느냐. 그러니 안 된다. 대통령 선거 이후로 비자금 수사를 미룬다고 내일 당장 발표
  하라』
  김태정 총장은 『준비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내일 검찰 간부들과 내부 조율을 해서 모레 발
  표하면 어떻겠습니까』고 했다. 나는 『좋다. 그렇다면 모레 반드시 발표하라』고 지시했다.
  이틀 뒤인 10월21일 오전, 김태정 검찰총장은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회의 김대중 총
  재에 대한 비자금 의혹 고발사건 수사를 15대 대통령선거 이후로 유보한다』고 공식 발표했
  다.
  
  『감사합니다』를 연발한 김대중씨
  
  비자금 수사를 유보시킨 직후, 나는 진작부터 준비했지만 「김대중 비자금」 문제 때문에
  미루어 두었던 대선 후보들과의 개별 회동을 추진했다. 10월23일 나는 이회창·김대중·김
  종필·조순·이인제씨 등 5명의 대통령후보와 연쇄 조찬 회동을 가질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나는 大選 후보들과 만나 대통령으로서 「공명정대한 선거관리」의 의지를 분명히 확인시켜
  두는 동시에 경제 현안과 안보 문제 등을 챙겨나가는 데 협조를 구할 생각이었다. 나는
  1997년 大選을 가장 민주적이고 모범적인 선거로 만드는 것이 나의 가장 중요한 마지막 과
  업이라고 생각했다. 私心(사심)을 버리고 초연한 위치에서 그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것으
  로 나의 대통령직을 명예롭게 마무리하고 싶었다.
  10월24일, 大選 주자들과의 조찬 회동 중 첫번째로 김대중씨와 만났다. 신한국당의 비자금
  폭로 이후 김대중씨는 다섯 번에 걸쳐 나와의 면담을 요청해 놓고 있었다. 국민회의 의원을
  시켜 면회요청을 하는가 하면 김용태 비서실장이나 조홍래 정무수석에게 사람을 보내 요청
  하기도 했다. 『나도 칼국수 먹을 줄 압니다』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먼저 『대통령으로서, 초연한 입장에서 헌정사상 유례없는 공명정대한 선거관리를 하
  겠다』고 밝혔다. 또 『4개월 후인 2월25일 대통령직을 그만둘 사람으로서 대통령선거가 내
  임기 중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전라도 출신인 고건 총리를 임명한 것도 공명선거
  를 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 『반드시 누가 돼야 하고 누구는 되지 말아야 한
  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으며, 어느 후보에게도 절대 불이익이 가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김대중씨뿐 아니라 이후 만난 모든 후보들에게도 똑같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는 이회창씨의 비자금 폭로에 대해 『비자금 폭로에 대해 몰랐으며, 사전에 알았다면 못
  하게 했을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김대중씨는 내가 비자금 수사를 유보한 데 대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김대중
  씨는 이 날 나에게 『감사합니다』는 인사를 수없이 했다.
  1997년 11월10일 오후 3시가 조금 못되어, 내가 세계제대군인연맹 서울총회에 참석하려고
  나서는데 홍재형 前부총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아무래도 IMF(국제통화기금)의 지원을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외환이 부족해 잘못하면 국가 부도가 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라는 내용이었다.
  홍재형 前부총리는 관료출신의 우수한 경제전문가로 내가 중대한 경제 문제에 조언을 구하
  곤 하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홍재형 前부총리의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막 행사장으로 이동
  하려던 참이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통화를 계속할 수 없었다. 내가 『홍 부총리, 그렇게 심각
  한 상황이라면 나와 얘기를 좀 해야 되겠는데, 내가 지금 행사가 있어서……』라고 얘기하
  자, 홍재형 前부총리는 『오늘 당장 문제가 되는 건 아닙니다』하고 대답했다. 나는 『그렇
  다면, 내일 꼭 다시 전화하자』며 전화를 끊었다.
  다음날인 11일 오후, 홍재형 前부총리와 오랫동안 통화를 하면서 나는 여러 가지 상황을 물
  어보았고, 홍재형 前부총리는 IMF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경제팀에서는 IMF라는 「최악의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최종적인 결정을 내려야 하는 대통령으로서 참모들이 쉽게 말하지 못하는 문제에 대해
  서도 단안을 내려야 할 입장이었다.
  국제통화기금의 지원을 받게 되면 우리나라의 경제 정책 결정에 있어서 IMF의 요구를 받아
  들여야만 하는 커다란 어려움이 있었다. IMF가 요구할 것은 우리의 경제구조 개혁이었고,
  그 과정은 실업과 기업 부도 등 고통스러운 진통을 겪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현재의 경제위기가 노동법 개정이나 대기업 부도사태에서 보듯이 우리 자체의 개혁
  이 늦어졌던 데에도 원인이 있는 만큼, IMF 행이 불가피하다면 이를 피할 것이 아니라
  IMF의 지원을 받아 경제를 서둘러 안정시키는 것도 차선책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국제통화기금의 지원을 받게 될 경우 내가 취해야 될 조치들에 대해서도 신중히 생각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날인 12일 오전 金光一 정치특보로부터 윤진식 경제비서관이 내게 보고를 하고 싶어한
  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오후 2시30분 윤진식 경제비서관을 만났다. 윤 비서관은 현재
  와 같은 추세라면 국가부도의 심각한 상황이 오게 될 것이라면서 신속하게 국제통화기금의
  자금지원을 받아야 한다고 보고했다. 나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윤 비서관에
  게 후속 조치와 관련해 몇 가지 의견을 물었다.
  11월14일 아침 나는 강경식 경제부총리에게 미셸 캉드쉬 IMF 총재를 즉시 비밀리에 서울로
  불러 교섭에 착수하라고 지시했다. 강경식 부총리가 직접 콸라룸프르에 가 있던 캉드쉬 총
  재를 찾아가겠다고 했으나 그렇게 될 경우 保安(보안)이 샐 우려가 있었다.
  만약 IMF와의 협상이 언론에 노출될 경우, 국내 금융시장은 엄청난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고 국가경제는 공황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신속하면서도 극도의 보안 속에
  서 교섭하는 것이 중요했다.
  11월16일 강경식 부총리와 이경식 韓銀총재 등은 극비리에 서울에 온 캉드쉬 IMF 총재와
  만나 협상을 시작, 지원규모 300억 달러 등에 합의했다. 통상 한 달 이상 소요되는 협상기간
  을 단 하루 만에 성사시킨 것이다.
  
  林昌烈을 부총리로 임명 前 IMF行 통보
  
  11월17일 오전 나는 林昌烈 통산부장관을 청와대로 불러 단 둘이 만났다. 나는 林장관에게
  현재의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IMF의 자금지원을 받기로 했다는 점을 알려주고, 곧 임
  창렬 장관을 경제부총리 겸 재경원장관에 임명할 것이니 극비리에 업무에 착수할 준비를 하
  라고 지시했다.
  나는 당초 후임 경제부총리에 홍재형 前부총리를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그가 국민신당에
  몸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대선에 영향을 줄 우려가 있어 포기했다. 대신 임창렬 장관을 기
  용하기로 한 것은 그가 마침 경제부처인 통산부장관직에 있었고, 또 과거 IMF에 파견 근무
  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11월19일 저녁 신임 임창렬 재경원장관의 기자회견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
  졌다. 임창렬 장관은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 신청은 긴급 금융안정대책에서 제외한다고
  발표했다.
  임창렬 장관의 예상치 못한 발표에 나는 깜짝 놀랐다. 그는 이틀 전인 17일 내게 후임을 통
  보 받고는 곧장 김인호 경제수석과 김용태 비서실장을 찾아가 『IMF로 가기로 했다면서
  요』라며 나와의 대화 내용을 발설하기까지 했었다. 그런 그가 막상 기자회견에서는 IMF
  지원신청을 않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IMF行을 19일에 발표한다는 것은 IMF 캉드쉬 총재와의 합의사항이었다. IMF와의 원만한
  협상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 정부에 대한 信賴(신뢰)가 중요했다. 다행히 IMF 지원 요
  청의 1단계라고 할 수 있는 캉드쉬 총재와의 16일 비밀 회담은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이를
  공식 확인하는 두 번째 단계에서 있을 수 없는 중대한 실수가 발생한 것이다. 이날 회견 때
  문에 IMF에 대한 우리 정부의 신뢰도는 먹칠을 한 셈이 되었다. 林昌烈 장관은 결국 이틀
  뒤인 21일 밤 10시30분 IMF에 대한 200억 달러의 구제금융 신청을 공식 발표했다.
  
  하시모토 日총리, 직접 지원 不可 통보
  
  11월27일 나는 APEC 정상회의 참석을 마치고 귀국했다. 나는 밴쿠버에서의 회담 성과에
  대해 나름대로 안도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솔직하게 직접 지원은 어렵다고 말했지만, 일본에
  대해서는 상당히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귀국한 바로 다음날인 28일 오후 클린턴 대통령이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우리는 IMF 지원
  과 관련하여 20분 가량 전화로 협의를 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한국은 지금 대단히 위급한
  상황입니다. 이제는 확실히 한국의 상황을 알겠습니다』하더니, IMF와 협상을 서두르라고
  재촉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한국의 외환사정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다.
  나는 이미 24일 밴쿠버에서 만났을 때 클린턴 대통령에게 우리나라의 사정을 자세히 설명하
  고 『IMF로 가겠으니 미국도 협조해 달라』고 말한 바 있었다. 그랬는데도 클린턴 대통령
  이 전화를 걸어와 한국의 IMF행을 거듭 강조하는 데 대해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나는 『이미 밴쿠버에서 내가 IMF로 간다고 말했고, 클린턴 대통령도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한국은 지금 IMF와의 협상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적극적
  으로 도와주기 바랍니다. 미국이 서둘러 주면 IMF도 그렇게 결정할 것 아닙니까. 한국이 금
  융위기를 맞는 것은 미국에도 이익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하고 말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자기로서도 최선을 다하겠으니 어찌됐든 서둘러 달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미국은 IMF에 가
  장 영향력이 큰 나라였다.
  다음날인 11월29일 나는 하시모토 총리에게 전화를 했다. 하시모토 총리는 변함없이 성의를
  가지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내가 기대를 걸었던 재정지원에 대해서는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
  다. 그는 『역시 한국이 IMF로 간다고 했으니 IMF의 지원을 받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IMF로 가는 데는 적극적으로 지지하겠습니다』하고 완곡하게 말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
  는 일이었다. 하시모토 총리가 말하지 않아도 그의 어려운 입장에 대해서는 나도 잘 이해하
  고 있었다. 한국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일본도, 세계도 모두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시모토 총리는 그러나 IMF의 빠른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약
  속했다. 그는 『현재 한국의 금융위기는 일본과 미국·유럽이 협조하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제가 그 일을 위해서 직접 노력하겠습니다』하고 말했다. 하시모토 총리는 『미국의 경우
  클린턴 대통령이 한국에 대한 IMF의 자금 지원을 지지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하고 말했
  다. 그는 『이제 IMF 이사회가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유럽이 중요하다』면서, 『유럽 주
  요국가의 정상들에게 자신이 직접 연락해서 한국에 대한 금융지원을 요청하겠다』고 약속했
  다.
  
  金大中 당선과 배신 사태
  
  12월18일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국민회의의 김대중 후보가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를 불과
  39만여 표차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2월19일 나는 이 날 청와대 수석비서관들과 점심을 들며 김대중 후보의 당선에 대한 내 심
  경을 피력했다.
  『긴 역사로 볼 때 결과를 놓고 보면 김대중 후보의 당선은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지역감
  정의 문제를 풀지 않으면 정치·경제 등 모든 것이 제대로 될 수가 없다. 이번 기회에 지역
  감정을 완전히 풀고 진정한 국민화합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란다』
  12월20일 나는 청와대로 김대중 당선자를 초청, 오찬 회동을 가졌다. 나는 김대중 정부가 순
  조롭게 출범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지원을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김대중씨는 당선 직후 보즈워스 미국 대사와 만난 이야기를 꺼냈다. 보즈워스 대사가 김대
  중씨에게 『앞으로 당선자께 가장 중요한 일은 김영삼 대통령과 두 분이 나라를 위해서 협
  력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하고 말하기에, 김대중씨 자신도 보즈워스 대사에게 『그렇게
  하겠습니다』고 동감을 표시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김대중씨는 자신은 앞으로 나와 협
  력해 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12월29일 나는 김대중씨 부부를 청
  와대로 초대해 부부동반으로 저녁 식사를 했다. 김대중씨는 이 자리에서도 나의 아내에게
  똑같은 말을 했다.
  나는 김대중씨가 그동안 나에게 수많은 거짓말을 했지만 보즈워스 미국 대사의 생각과 같다
  고 말하는 것을 보니 대통령에 당선되는 큰 일을 겪으면서 사람이 많이 변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도 했다. 나는 물론 김대중씨가 순조롭게 취임을 준비할 수 있도록 진심으로 협력할 생
  각이었다. 나는 퇴임하기 직전인 2월17일까지 김대중 당선자와 매주 화요일 오전 9시에 만
  나서 1시간 가량 차를 마시면서 국정 운영과 정부 이양에 관련된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는 김대중씨가 이 날 『김영삼 대통령과 협력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고
  두 차례나 되풀이 말했기 때문에 그가 취임한 후 6개월 동안은 그가 잘 되기를 진심으로 바
  랐다. 누구에게나 『나는 김대중씨가 잘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김대중씨가 국회의석
  이 모자라 어려울 테니 정부가 법률안을 처리하려 할 때는 특별히 중대한 문제가 없으면 도
  와주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권유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내가 퇴임한 이후 김대중씨가 나에게 한 행동은 그의 말과는 정반대였다. 그는 나와
  내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을 감시하고 뒷조사했으며, 권영해 前 안기부장을 비롯해 숱한 사
  람들을 구속했다. 김대중씨는 IMF의 원인을 조사한다며 한승헌 감사원장과 김태정 검찰총
  장을 시켜 나에게 서면 질문서를 보내기도 했다. 나는 1998년 3월17일 감사원에 서면 답변
  을 해 주었고, 김태정 검찰총장이 내게 문서로 질문서를 보내왔을 때도 5월2일 성실하게 답
  변서를 작성해 보내주었다. 그런데 내가 답변서를 보내자 김태정 검찰총장은 기자회견을 열
  어 나의 답변서가 『참고가 안된다』고 매도했다. 이것은 김대중씨가 김태정 검찰총장에게
  의도적으로 시킨 일이었다. 그의 행동을 보고 나는 김대중씨에 대한 모든 기대를 접었다. 김
  대중씨는 또 강경식 前 경제부총리와 김인호 前 경제수석 두 사람을 구속하더니, IMF의 책
  임을 묻는다며 1999년 2월13일 국회 청문회 마지막 날까지도 나에게 청문회 출석을 요구하
  기도 했다.
  나는 그가 지역감정을 완화시키기를 바랐지만 우리나라는 지금 역사상 가장 심한 지역감정
  의 고통에 빠져들고 있다.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는 김대중씨는 지금도 나에 대한 정치 보
  복 행위를 계속하고 있다.
  
  全·盧 석방
  
  대통령 선거가 한창 진행 중이던 12월11일 나는 金鍾求(김종구) 법무장관을 청와대로 불러
  단 둘이 오찬을 함께 하며 전두환·노태우씨 등의 사면방안을 검토했다. 나는 사면은 하되,
  부정축재에 대한 추징금에 대해서는 사면해서는 안 된다고 결정했다.
  이들이 부정축재한 돈은 어디까지나 국민의 돈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감옥에서 석방하더라도
  부정축재한 돈은 환수해야 했다. 나는 김종구 장관에게 최종적인 사면 방안을 준비하라고
  지시하는 동시에 선거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사면 검토 사실이 일체 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주의를 주었다. 선거가 끝난 다음날인 12월19일 오전 10시 나는 예정대로 김종구 법무장관
  으로부터 최종 보고를 받았다. 다음날인 12월20일에는 이를 김대중씨에게 말해주었고 22일
  국무회의에 회부하기로 결정했다.
  김대중씨는 전두환·노태우 등을 사면하겠다는 내 말에 대해 아무런 의견을 제시하지 않고
  『좋습니다』라고 한마디만 했다. 사면복권은 어디까지나 대통령의 고유권한이고 당선자가
  관여할 입장은 아니었다.
  12월22일 오전 국무회의는 12·12, 5·18 및 비자금사건 관련자 25명에 대한 사면안을 의결
  했고, 전두환·노태우씨는 구속수감 2년여 만에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1997년 12월22일 나는 오랜 동지인 최형우 의원의 서울 구기동 자택을 방문했다. 내가 투병
  중인 최형우 동지를 찾은 것은 1997년 3월 그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두 번째였다. 나는
  경호원들만 대동한 채 최형우 동지의 집을 찾아 부인과 가족을 위로했다. 최형우 동지는 다
  소 회복되긴 했으나, 여전히 언어 소통을 비롯해 모든 것이 불편한 상태였다. 최형우 동지는
  나를 보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내 가슴속의 최형우 동지는 여전히 영원한 불굴의 투사
  였다.
  
  金泰政 총장의 보고:『DJ가 깨끗이 처리해 달랍니다』
  
  12월30일 나는 김태정 검찰총장을 청와대로 불러 오찬을 함께 했다. 김태정 총장은 김대중
  당선자의 비자금 수사 문제를 내게 보고했다.
  김태정 총장은 이 자리에서 뜻밖의 말을 했다. 대통령선거가 끝난 직후 김대중 당선자가 자
  신을 불러 김대중씨 자신의 비자금 수사에 대해 나의 임기가 끝나기 전에 『깨끗하게 처리
  해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었다. 비자금을 무혐의로 처리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신한국당의 김대중씨 비자금 폭로 이후 나는 이회창씨가 어떻게 그런 자료를 입수하게 되었
  는지 조사해 보았다. 알고 보니 배재욱 청와대 사정비서관이 나도 모르게 자신이 가지고 있
  던 자료를 이회창씨에게 넘겨준 것이었다.
  1993년 8월12일 실시된 금융실명제는 모든 금융거래에 실명거래 의무를 부과하는 동시에,
  비실명금융자산에 대해서도 실명화를 압박하는 몇 가지 조치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2개월간
  의 실명전환 의무기간 중 실명전환되는 거액의 자산에 대해서도 자금출처조사가 규정되었
  고, 기간 경과 후에 전환하는 자산에 대해서는 과징금과 높은 세율이 추가로 부과되었다. 이
  를 피하기 위해 실명전환 의무기간을 넘겨서도 실명전환을 하지 않는 가·차명 계좌의 뭉칫
  돈이 많이 남아 있었는데, 이 뭉칫돈들도 결국 계좌에서 인출 혹은 이동 등 움직임이 있을
  경우에는 소유주가 드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노태우 부정축재 사건도 실명제의 이러한 위
  력 때문에 진상이 밝혀질 수 있었고, 김대중씨의 비자금 역시 이 과정에서 관계기관에 축적
  된 자료에 의해 드러날 수 밖에 없었다. 이회창 총재가 폭로한 자료는 배재욱 비서관이 갖
  고 있던 이 자료들 중의 일부였다.
  퇴임을 앞둔 1998년 2월20일 오후 3시30분 나는 청와대 집무실에서 마지막으로 김태정 검찰
  총장의 보고를 받았다.
  『김대중 당선자의 부탁대로 깨끗하게 처리했습니다』
  김태정 총장은 이렇게 보고했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던 궤변과 같이 대통
  령에 당선된 김대중씨의 비자금 수사는 그의 지시대로 「깨끗하게 처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