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연합은 남북 당국의 결단으로 가능하다
  
  [김대중의 3단계 통일론 - 남북연합을 중심으로]란 책이 있다. 김대중씨가 재야 시절에 만든 싱크 탱크 아태평화 재단에서 한울 출판사를 통해서 1995년에 펴낸 책이다. 이 책의 머리말을 쓴 사람은 당시 아태평화재단의 사무총장 林東源 현 국정원장이다. 머리글의 일부를 인용한다.
  <김대중 이사장의 통일방안은 권위주의 정권하에서는 박해의 대상이 되었으나 1980년대말에 이르러서는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수용되어 '한민족 공동체 통일방안'에 반영되었다. '고려민주연방제'를 주장하던 북한도 마침내 김대중 이사장의 '남북연합제'의 합리성과 실현 가능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독일통일의 주요 지도자들, 그리고 많은 한반도 문제 전문가들이 김 이사장의 통일방안에 공감을 표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임동원 당시 총장은 '아태평화재단은 1994년 초 창립 후 가장 핵심적인 사업으로 '김대중의 3단계 통일론' 프로젝트를 추진해왔다'면서 이 프로젝트에는 '재단 운영위원 김남식, 김성훈, 라종일, 박종화, 백경남, 한상진 교수, 그리고 재단 연구위원인 박건영, 이강래, 이석수, 이성봉, 최성, 하상식, 함인희, 황주홍 박사가 참여하였다'고 밝혔다.
  이 책에는 오늘날 對北정책을 주도하고 있는 김대중-임동원 두 사람의 노력이 스며 있다. 특히 김정일이 만약 서울을 방문한다면 김대중 대통령과 혹시 남북연합을 선언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에 대해 어떤 힌트를 주는 내용이 실려 있다.
  김대중 대통령의 3단계 통일론은 평화공존, 평화교류, 평화통일의 단계를 설정하고 있으며 평화공존과 국가연합, 평화교류와 연방, 평화통일과 완전통일을 대응시키고 있다.
  이에 반해 노태우 정부가 만들어 국회 동의를 받은 한민족 공동체통일방안은 남북교류-국가연합-완전통일을 상정하고 있다. 국가 공인의 통일방안이라고 볼 수 있는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은 남북간의 충분한 교류를 거친 다음에 자연스럽게 남북연합 단계로 들어가 평화공존을 제도화한다는 것인데 김대중씨의 3단계통일론은 평화공존 단계에서 바로 남북한이 연합단계로 진입한다고 주장, 순서를 거꾸로 만들어놓았다. 큰 일에서 성패를 좌우하는 것은 일의 추진 순서이다.
  아태평화재단의 이 책-'김대중 3단계 통일론'은 <남북간 정치적 신뢰조성, 군사적 긴장 완화 조치의 실행, 주변 4强의 남북한 교차 승인 등 ...이러한 상황의 변화는 남북연합 진입에 앞서 반드시 요구되는 전제조건이라기 보다는 남북연합을 보다 앞당겨 실현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촉진요인이라고 보아 마땅하다. 따라서 남북연합으로 들어갈 것이냐, 들어간다면 언제 들어갈 것이냐 하는 문제는 양측 당국의 판단과 결단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적고 있다.
  
  헌법 개정도 안하고
  
  남북연합으로 들어가기 전에 양측 사이에 정치적 군사적 신뢰의 조성이 이루어지면 더 좋고 이루어지지 않아도 양측 당국(지금의 경우엔 결국 김대중, 김정일 두 사람)의 정치적 결단에 의해 남북연합을 선언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매우 중대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남북연합의 선언은 대한민국의 헌법을 개정하지 않으면 절대로 불가능하며, 만약 이를 강행하면 국헌문란의 책임을 면할 수 없다(심할 경우엔 대통령에 의한 위헌적 국체변경 시도, 즉 내란죄를 구성한다).
  국회와 국민의 동의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국체의 변경을 김대중-김정일 두 사람이 결단 형식으로 할 수 있나. 우리 헌법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합헌, 정통성 있는 국가로 대한민국을 지정하고 있다. 남북연합 선언은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스스로 부정하고 대한민국을 북한과 동등한 수준으로 격하시키며, 우리 헌법상의 반란집단인 북한을 합법정부로 인정함으로써 우리 헌법의 심장과 뇌수를 바꿔놓게 된다.
  놀랍게도 김대중씨의 통일안은 국가의 성격에 근본적 변화가 오는 이런 중요한 결정을, 국회나 국민의 합헌적 동의 없이도 주적이자 반국가단체의 수괴인 김정일과 의논만 하면 할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을 하고 있는 셈이다. 헌법과 국민, 국회를 무시한 놀라운 발상이자 위험천만한 주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적, 군사적 신뢰관계가 형성되지 않아도 남북연합으로 진입할 수 있다는 것은 또 무슨 뜻인가. 믿을 수 없는 사람들(북한정권)을 남북연합의 지붕 안으로 과연 들여놓을 수 있을까. 집단살인의 명수를 몸수색(신뢰구축과 검증)도 안하고 안방으로 들여놓을 수 있을까.
  우리의 역대 정부가 견지해온 남북관계 개선과 통일논의의 철학적 기조는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으로, 실현 가능한 것부터, 말이 아닌 실천에 의한 신뢰조성으로 요약된다. 이에 반해 김일성-김정일 집단은 항상 위로부터 아래로, 큰 것으로부터 작은 것으로, 정치적 대타결에서부터 행정적 실천으로, 총론을 먼저 각론은 나중에란 식의 방향을 잡고 있었다. 김대중식 통일론은 남한의 이런 전통적인 전략전술보다는 북한쪽에 더 가깝다는 인상마저 준다.
  남북연합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지금 많은 국민들로 하여금 대북정책의 세부사항에 관해 흥미를 잃게 만들고 있는 것은 연합제와 연방제란 단어일 것이다. 두 단어가 애매하게 쓰이고 있을 뿐 아니라 북한은 적화통일로 가는 중간단계로서 이 연방제란 말을 사용하여 인식의 혼란을 확대시키고 있다. 연방제가 중간단계인지, 이것이 최종적인 통일국가상인지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남북연합회의
  
  김대중-임동원 두 사람이 주도한 이 책-'김대중의 3단계 통일론'은 이렇게 말한다.
  <남과 북이 합의하는 '남북연합헌장(이하 연합헌장)'에 따라 남북통합과정을 관리하게 될 협력장치로서의 남북연합은 최고의사결정기구인 '남북연합정상회의', 代議기구인 '남북연합회의'와 '남북연합회의 사무국' 그리고 집행기구인 '남북연합각료회의' 및 분야별 '남북연합위원회'를 두게 된다. 최고의사결정기구인 정상회의는 남북연합이 지니는 존재론적 특성, 즉 남북당국의 정치적 결단에 의해서 남북연합의 존재가 언제라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연합기구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정상회의는 정례회의로서 남북을 오가며 개최될 것이다. 정상회의에서는 민족문제, 통일문제, 그리고 남북관계를 통일지향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주요 현안문제에 대한 정치적 결정을 내린다. 또한 정상회의는 연합회의의 의결사항을 심의한다. 이의 수용여부를 결정함에 있어 정상회의는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아울러 정상회의는 각료회의의 합의사항을 승인하며 그 집행여부를 감독한다.
  한편 상설대의기구이며 남북 각지를 순회하며 개최되는 연합회의는 양측 의회에서 선출된 남북동수 대표로 구성된다. 단원제를 채택하고 있는 연합회의가 지역 대표성과 주민 대표성 중에서 前者에 의거하여 동수대표로 구성되는 것은 남북연합의 설립정신을 충실히 따르는 것이다. 연합회의의 의결방식은 만장일치제를 따른다. 남북연합은 최소한의 화해만 이룬 상태에서 구성된다.>
  과연 이런 조직에 의한 남북연합제 운영이 가능할 것인가. 북한정권이 일본이나 중국 지배층 정도의 양식만 가지고 있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舊동독의 엘리트 정도만 되어도 대화가 될지 모른다. 아니, 흐루시쵸프 시절의 소련 공산당 지도부 정도의 신뢰성만 있어도 될지 모른다.
  상대는 김정일 정권이다.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고 속임수, 선동, 억지, 테러, 학살, 호화방탕의 제1인자들이다. 그들과 이런 식의 오손도손한 논의와 실천이 과연 가능할까. 김대중식의 남북연합은 근사한 서류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절대로 남북관계의 진전을 가져올 방안은 될 수 없다는 것이 정상적인 인간의 경험칙으로 설명된다.
  
  남북연합 기구는 북한이 장악할 것
  
  남북연합회의를 남북동수로 구성한다고 한다. 이는 의회 역할을 한다고 한다. 북쪽 대표는 김정일 한 사람의 명령으로 움직이는 이들이다. 남쪽 대표는 다양한 정파를 대표할 수밖에 없다. 그 가운데는 친북세력도 끼여 있을 수 있다. 이들은 북한대표와 내통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 연합회의는 북한정권측이 장악하는 바가 될 가능성이, 남한정권측이 장악할 가능성보다는 훨씬 높다. 이 연합회의에서 결정한 것을 남북정상회의에서 거부할 수가 있다고 하지만 거부하는 쪽에서 명분을 잃을 것이기 때문에 북한주도의 연합회의에 끌려 갈 가능성이 충분하다.
  이 남북연합이 구현할 6대 과제 가운데 첫째는 '상호 체제의 인정과 존중에 터하여 상호 비방과 중상을 금함은 물론 일체의 파괴활동이나 내정 간섭 행위를 중지함으로써 남북간 정치적 신뢰를 구축해나감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한다'이다.
  남북간에 많이도 합의해본 문장이다. 그러나 북한정권은 이 합의를 일방적으로 깨면서 남한정부측이 이 합의를 위반했다고 뒤집어씌웠다. 남한에 만약 이상한 정권이 들어서면 이 약속을 지킨다면서 언론에 의한 북한인권문제 제기도 금지시킬 가능성이 있다. 이런 합의는 항상 북한정권측에 의하여 악용되어 남한정부와 언론과 애국시민들의 자유와 양심을 속박하는 무기가 되었다.
  하나 이상한 것은 김대중-임동원 콤비가 남북연합을 통해서 하고자 하는 것의 거의 전부가 이미 남북한 양측에 의해 합의되어 문서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1991년12월13일 남북 양측이 합의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그것이다. 북한측의 약속 위반으로 실천되지 않고 있는 이 좋은 문서를 꺼내어 실천에 옮기면 남북연합이라고 선언하지 않아도 연합 수준의 교류가 된다. 이 문서를 방치해버리고 또 다른 선언과 합의를 들고 나오려는 것은, 집을 짓다가 그만두고 또 다른 집을 짓겠다고 선언하여 돈을 모으는 것과 같다.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사람이 들어가 살 수 있는 집을 짓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집을 짓겠다고 선언하여 돈과 사람을 모으는 것이 목적이 아닌가 하는 불신을 살 수가 있다. 지붕만 얹으면 될 집인데 왜 그 집은 포기하고 새 집을 또 짓겠다고 하는가 말이다.
  김대중 정부가 진정으로 남북 공존과 교류를 원한다면 할 일은 간단하다. 북한측에 대해 남북기본 합의서를 실천하자고 요구하면 된다. 이걸 거부하는 북한은 남북연합약속도 실천에 옮기지 않을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머리속에는 지금도 '남북 당국간의 결단으로써 남북 단계, 즉 통일의 제1단계로 진입한다'는 구상이 들어 있을 것이다. 그런 남북 연합 진입 선언을 김정일이 서울을 방문했을 때 하고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선언이 몰고올 엄청난 국론분렬 양상과 대한민국 수호세력의 반대를 생각하면 '어떻게 그런 일까지...'라고 생각하겠지만 6년 전 저서에서 나타난 김대중 대통령의 생각은 좌우간 그런 방향이었다. 남북간 평화협정, 군사력 재배치, 긴장완호 조치 없는 남북연합은 상습 강간범과 처녀를 한 방에 넣어놓는 것과 같은 짓이다. 상습 강간범이 거세 수술을 받고 처녀가 태권도를 배워 자위능력이 있다는 것이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합방이 어떤 비극을 초래할 것인가는 명백하다. 문제는 이런 상식론을 뒤엎는 김대중-임동원 두 사람의 위험한 구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