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 측근은 최근 김정일이 한국에 오면 한반도 평화선언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평화선언의 내용이 어떤 것이 될지는 알 수 없으나 구체적 합의라기보다는 선언적 내용이 될 것이다.
  남북한 관계에서 頂上級끼리의 선언은 1972년의 7.4공동성명, 2000년6월15일의 평양성명이 있었고, 1991년12월의 남북기본합의서 발표문은 이런 성명서보다도 한 걸음 더 나아간 양측의 실천 합의문이었다.
  선언은 선언일 뿐이다. 실천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다. 그 좋은 예가 7.4공동성명이다. 평화통일의 원칙에 합의한 이 선언에 따라 남북한간의 고위 회담이 이루어지고 있을 바로 그때 북한은 휴전선 전역에 걸쳐 남침용 땅굴을 파고 있었다. 우리군은 북한이 20개의 땅굴을 팠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그 중 4개만 발견했다.
  남북기본합의서가 발효되었으나 그 뒤 북한은 핵공갈을 계속하여 한반도를 위기상황으로 몰고갔다. 사실 남북한 사이에는 평화선언이고 뭐고 새로 만들 필요가 없이 남북기본합의서대로 하자고 하면 된다. 이는 아주 정교한 실천합의이기 때문에 이대로만 되면 평화공존과 평화교류는 절로 이루어지고, 북한의 개방도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며 그 이후 국가연합 단계로도 진입할 수 있다.
  양측이 합의, 서명한 이 남북기본합의서를 선반 위에 올려다놓고 또 다른 선언이나 합의문을 만들어보았자 그 실천은 보장하기 어렵다. 남북한간에는 정치적 목적을 깐 선언이나 성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합의한 것의 실천이 필요하다. 실천이 따르지 않는 성명이나 선언은 국익이 아니라 정파적, 개인적 이익을 위해 봉사할 가능성이 높다.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요소들=북한의 핵개발- 미사일 개발 및 수출- 화학 생물 무기 비축- 재래식 군사력의 휴전선 집중배치와 증강 등=이 집중되어 있는 한반도에서 이런 위험 요인의 제거 없는 평화선언이란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 아우슈비츠에 가서 평화를 외치고 북한의 강제수용소에 가서 평화를 선언할 수도 있다. 공동묘지에 가서 평화를 노래할 수도 있다. 그것은 헛소리로서의 평화, 속임수로서의 평화일 뿐이다.
  김정일은 평화파괴와 속임수의 명수이다. 이런 자와 합의한 평화선언은 본질적으로 속임수이다. 문제는 누가 속고 누구를 속이느냐가 문제이다. 김대중 정권이 김정일과 그 정권을 속여서 개혁 개방의 길로 나아가도록 할 수 있다면 이 속임수는 의미가 있다. 그러지 않고 김정일이 이 평화선언을 이용하여 김대중 정권과 한국민들을 속일 수도 있다. 제3의 경우로는 김대중 정권이 이 평화선언을 이용하여 한국민의 對北경계심을 해체하면서 정계 변동 등의 계략을 추진할 수도 있다.
  평화선언은 실천으로 뒷받침되지 않을 때 휴지가 된다. 특히 약속을 깨고 상대를 속이는 데 대해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도록 배우고 훈련된 김정일과 그 세력에게 있어서는 약속을 깨는 문제로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어떻게 가장 효과적으로 깨면서 다른 이익을 취할 것인가로 고민할 따름인 것이다.
  이 평화선언을 가장 잘 이용할 세력은 북한정권과 남한의 친북세력이다. 이들은 이제 남한에서 평화가 선언되었으니 평화시대가 도래했다고 선동하면서(선언과 실천을 혼동시켜서) 주한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해체, 애국언론 비난, 군사비 감축, 주적개념의 철폐, 공산당 합법화 등을 요구하고 나설 것이고 김대중 정부는 이들을 단속할 수 없을 것이다.
  한반도 평화선언은 대한민국의 중심세력을 고립화시키고 남한내의 친북세력을 공식화시키는 첫 걸음이 될 수도 있다. 그러면 대한민국의 주류층은 김대중 정권이 과연 누구 편인가 하는 의구심을 공개적으로 제기할 것이다.
  평화선언이 김대중 대통령의 오랜 구상인 국가연합쪽으로 가는 전단계 포석일 가능성이 있다. 서둘러 하는 국가연합은 골조가 제대로 서기 전에 졸속으로 올린 지붕처럼 쉽게 무너진다. 남북관계는 북한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가야 진전되는 것이지 북한이 약속을 지킬 것이란 전제하에 진선진미한 선언과 합의를 한다고 발전되는 것이 아니다. 실천과 검증 없는 전진은 제자리로 돌아오는 걸음마로 끝난다.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 등 문민정치인들은 근사한 말이 역사를 바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김영삼 대통령은 민자당 대표 시절 고르바초프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한반도에서 전쟁위험이 사라졌다고 이야기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같은 말을 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평화선언을 새로 할 필요도 없다. 서두르고 실천 보장이 없는 평화선언은 김정일 정권과 친북세력에게 이용될 가능성이 많아 보인다. 남북한 당국이 정말 평화실천의 의지가 있다면 그 어떤 평화선언보다도 구체적이고 진전된 남북기본합의서의 실천에 합의하여야 한다. 이 합의도 지켜질지 미지수이지만.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