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정부는 김정일이 서울을 방문하면 평화선언을 하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주로 군사적인 긴장완화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남북 국방장관 회담을 정례화하고, 상호 직통전화를 가설하며, 대부대의 이동은 상호 통보한다는 등등의 내용입니다. 우리쪽에선 정상회담의 정례화도 집어넣으려고 합니다. 평양회담이 통일회담 비슷하게 되어 때 이른 통일열기가 남한에서 일어나 국론분렬 양상까지 보인 데 반해 이번 서울 선언은 구체적인 긴장완화 방침에 관한 합의사항을 만들어내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 전략부서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워싱턴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이 갑자기 평화선언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 바람에 실무자들은 혼란에 빠졌다고 합니다. 과연 김정일이 서울에 올 것인가하는 의구심도 커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 정보부서에선 김정일이 서울에 올 것이란 논리를 전개할 때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를 들었습니다.
  첫째, 김정일은 북한체제의 유지를 원한다. 그러려면 자신이 남한에 가서 환영을 받는 모습을 북한주민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
  둘째, 김정일은 실속 있는 지원을 원한다. 김정일은 신의주 같은 한만 접경지대에는 중국의 자본을 끌어들이고 개성에는 남한 자본, 동해안엔 일본자본을 유치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투자를 촉진시키기 위해서도 서울에 와서 평화무드를 선전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북한이 요구한 전력지원 문제에 대해서도 한국측으로부터 얻을 것이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셋째, 김정일은 김일성을 능가하는 작품을 남기고 싶어하는 심리를 갖고 있다.
  넷째, 통일열기를 고취시켜 체제강화에 이용한다.
  다섯째, 김정일의 경호에 대해서는 남한 정부가 북한측에 상당한 재량권을 줄 것이다.
  
  우리 전략부서에선 김정일이 남한에 올 때면 단순한 경제협력과 화해를 이유로 해선 안될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는 북한주민들을 향해서 통일에의 거보를 내디딘다는 명분으로 포장하지 않으면 올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 대해서는 우리측도 양보해줄 수 있으나 문제는 국론분렬 양상을 이룰 국내사정인 것입니다. 김정일을 서울로 끌어들이려면 우리측이 많이 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도 퍼주는 식의 대북지원에 반발이 강한 국내여론을 어떻게 잠재우느냐가 고민거리랍니다.
  김정일은 절대로 평양이 개방권으로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휴전선 근방, 한만국경 근방, 동해안 등 심장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을 개방하는 수준일 것입니다.
  문제는 김대중 대통령의 시간입니다. 모레시계처럼 줄어들고 있는 잔여임기 안에 남북관계에 결정적인 돌파구를 열어야 한다는 조바심과는 별도로 부시 행정부란 거대한 장벽이 새로 나타났고, 김정일도 이를 예의주시하고 있는 마당에 과연 그런 돌파구를 만들 수 있을 것인가. 만약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은 한국측의 일방적 양보를 의미할 것이고, 이는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떨어뜨리고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에서 불리한 입장으로 그를 몰아넣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일종의 악순환이 김대중 대통령의 앞날을 어둡게 하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