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리 나라에 몇 개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면 공산화될 가능성도, 쿠데타가 일어날 가능성도, 그리고 민중폭동이 성공할 가능성도 없다고 주장해왔다. 체제유지의 핵심 기능이란 경제부문에선 시장, 정치부문에선 선거, 법치부문에선 대법원, 이런 3대 기능의 정상 작동을 가능하게 하는 언론의 자유를 말한다.
  2001년의 가장 큰 뉴스는 무엇인가. 권력과 홍위병들과 김정일과 좌파들과 안티들과 철없는 청소년들과 열등감 및 소외감에 사로잡힌 어른들과 선동가들과 위선자들과 어용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은 조선-동아일보가 죽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두 민족지를 때리는 데 앞장섰던 세력들이 퇴조기에 들어섰다는 사실일 것이다.
  지난 여름 언론세무조사와 이에 따른 공세가 본격화되면서 조선일보와 월간조선은 판매부수가 늘어났고 때리는 데 앞장선 방송의 시청률은 급전직하로 떨어졌다. 이것은 시장에서 이미 결판이 났다는 것이다. 국민들이 정부나 집권당의 주장에 찬동하거나 그들의 영향을 크게 받았더라면 조선-동아일보 및 월간조선의 부수는 많이 떨어졌을 것이다. 결과는 반대였다. 소비자들은 이미 이것은 언론탄압이요 하고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그 뒤 지난 10월25일 재보선 때 한나라당이 3-0으로 이겼다. 정치의 시장인 선거판에서도 유권자들은 소비자로서의 판단과 거의 같은 결정을 내렸다. 김대중 대통령이 민주당 총재직에서 물러나게 한 것도 이런 정치의 시장, 즉 선거 기능의 정상 작동과 압력에 의한 것이다. 선거와 시장의 정상적인 기능은 결국 민심의 흐름, 역사의 대세를 만들고 법원의 판결에도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구속된 언론 사주들이 모두 보석 등으로 석방되었다).
  우리는 지금 역사의 물줄기가 국내외적으로 크게 바뀌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이럴 때는 외교와 내치가 중요하다. 9.11테러 이후 세계가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는 느낌이다. 러시아는 미국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면서 친 서방 노선을 굳히고 있다. 중국은 미국의 가상敵 대상에서 잠시 벗어나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새로 전개되는 국제질서에 편승하고 있다. 일본은 아프간 전선에 대한 적극적인 파병으로써 거세된 국가에서 정상국가로 일종의 성 전환을 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은? 국익을 극대화할 좋은 기회를 놓고도 한국은 구경꾼이 되고 있다. 전투병력을 파견하여 역사의 주무대에 등장할 기회를 놓치고 있다. 바뀌는 세계 정세를 이용하여 김정일 정권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킬 기회도 놓치고 있다.
  국내적으로는 기회가 남아 있다. 마침내 3김씨가 끝장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새로운 질서, 새로운 엘리트, 새로운 국가 아젠다(agenda)를 만들어야 할 기회를 잡게 되었다. 새로운 지평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군부 엘리트 시대를 거쳐 3김씨로 대표되는 구정치인 시대를 떠나보내면서 새로운 정치 지도 세력이 등장할 것이고, 이들은 정상적으로 성장하고, 정상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다소나마 정치를 정상화시켜 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내년 선거는 결과에 못지 않게 과정도 중요한데, 무엇을 놓고 大權을 다투느냐 하는 것이다. 선거는 전국민적인 토론장인데, 무슨 주제를 놓고 토론하느냐가 결과의 성격을 결정한다.
  남북관계의 재검토, 경제개혁의 재점검과 생산성의 회복, 기초질서 복구, 법치 정착,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 같은 권력구조의 조정, 버릇 없는 아이들과 교양 없는 어른들의 문제점, 韓日中 관계 조정, 전통적인 한미동맹관계의 회복 방안, 문화 예술 진흥 전략 등등 근본적인 주제를 가지고 진지한 토론이 될 수 있도록 언론이 잘 유도를 해주어야 할 것이다. 언론은 속성이 역사 창조의 주인공이 아니라 연출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