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2월11일 경남 거창군신원면 박산골이란 골짜기에서는 국군11사단 9연대 3대대에 의해서 양민 7백19명이 학살되는 이른바 거창양민학살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살된 사람들 가운데서 세 살을 밑도는 젖먹이가 1백 명, 4 - 10세 어린이가 1백91명, 11 - 14세 어린이가 68명으로 14세를 밑도는 어린이가 피살자의 꼭 절반이었습니다. 60세 이상 노인이 66명, 80세 이상도 여섯 명이었습니다. 최고령자는 92세. 피살자들 가운데 공산당에 협력했을 가능성이라도 있는 20, 30, 40대의 청장년들은 1백75명이었습니다. 결국 피살자의 약76%가 노약자들이었습니다. 문제의 11사단 사단장은 그 뒤 월북하여 북한에서 죽은 崔德新입니다. 11사단 3대대장 한동석 소령도 처음에는 「작전지역안에 있는 사람을 전원 총살하라」는 명령을 받고 신원면에 들어왔으나 비(非)전투원들만 눈에 뜨여 상부의 지시를 이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사흘 뒤 연대장 오익경 대령으로부터 독촉을 받고 일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현장에서 살아나온 사람은 세 사람. 그 중 한 사람인 임분이 할머니는 이런 증언을 남겼습니다.
  『사격이 시작되기 전에 군인 한 사람이 오더니 군경 가족이 있으면 나오라고 했습니다. 10여 명이 우루루 몰려나갔지요. 이들이 빠져나가자 군인들이 골짜기 주변을 뺑 둘러섰어요. 나는 모든 걸 포기하고 땅바닥에 엎드렸습니다. 그때 내 옆에 있던 문판대씨가 손을 번쩍 들더니 고함을 질렀습니다. 「대장님, 죽어도 말 한 마디 하고 죽읍시다. 국민 없는 나라가 무슨 필요가 있소?」. 군인들은 문씨를 향해서 총을 놓았습니다. 문씨는 맞지 않고 열여섯 살 먹은 딸이 맞고 쓰러졌어요. 이어 콩볶듯하는 총소리가 들리며 총알이 우리를 향해 쏟아집디다. 저는 죽은 듯이 엎드려 있는데 주먹만한 돌멩이가 퉁겨 가슴을 때렸습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초생달이 보였습니다. 그때 갑자기 주위가 밝아집디다. 군인들은 조명탄을 쏘아가며 시체들을 확인하는 거였습니다. 숨을 죽이고 엎드려 있었더니 그냥 지나쳤습니다. 얼마 뒤 사람소리가 나면서 그들이 시체더미 위에 나무를 져다날랐어요. 내 몸뚱이 위에도 나무를 올려다 놓았어요. 골짜기는 금새 불바다가 되었습니다. 내 옷자락에도 불이 붙었지만 혹시나 들킬까 봐 죽은 체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사라진 뒤 개울가로 기어가 허겁지겁 불을 껐어요. 남편과 친정어머니는 그 골짜기에서 죽었습니다』
  군인들은 나무를 져다날랐던 부락민들에게도 총질을 했습니다. 심부름해주면 살 줄 알았던 그들은 총알을 맞고 차례로 쓰러져갔습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신현덕씨와 문홍준씨는 군인들을 붙들고 늘어지면서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했습니다. 군인들은 『지독하게 명이 긴 놈들을 보겠다』면서 살려주고는 노무대로 부렸습니다.
  문홍한씨는 산기(産氣)가 있는 아내 덕분에 살았습니다. 학살장으로 끌려가기 전날 신원국민학교에 수용되어 있을 때 아내가 몸을 뒤틀면서 괴로와했습니다. 군인들이 이들을 교장 사택으로 데려다주었습니다. 한 군인이 대야에 숯불을 담아다가 주더니 『걱정하지 말라』면서 나갔습니다. 문씨의 아내는 새벽에 사내 아기를 낳았습니다. 3 - 4명의 군인들이 들어오더니 아기를 보고는 험상궂은 표정을 풀고 『당신네는 참 운이 좋다』고 쇠고기국을 끓여다가 갖다 주었습니다. 문홍한씨가 문틈으로 바깥을 살펴보니 부락민들이 군인들에 끌려서 어디론가 가고 있었습니다. 한 군인이 들어오더니 『나가면 죽는다』면서 꼼짝 못하게 했습니다.
  산모(産母)에게 쇠고기국을 끓여준 군인과 노약자들을 향해서 총질을 한 군인이 동일인물이라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닙니다. 명령선상에 있는 군인과 그곳을 떠난 군인은 저승사자와 구세주만큼 다른 것입니다. 이 명령선을 장악하는 것이 정치이고 권력입니다. 초인(超人)도, 성인(聖人)도 아닌 대부분의 보통사람들은 이 명령선에 의해서 조종받게 되고 그 조종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이 명령선을 장악한 정권이 악마 같으면 명령선에 매달려 있는 보통사람들은 악행(惡行)을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1995년11월3일 저는 이스라엘 수도 텔 아비브에 있는 국방부장관 집무실에서 이츠하크 라빈 수상 겸 국방장관을 인터뷰한 적이 있었습니다. 라빈은 그 다음날 암살되었으니 기자와의 대화가 마지막 인터뷰였습니다. 기자는 그때 월간조선(月刊朝鮮)에 실었던 북한양심수(囚)수용소 기사의 영문번역판을 갖고 갔습니다. 누구보다도 집단수용소의 생리와 학살에 대해서 잘 알고 있고 공분(共憤)하고 있을 라빈의 입을 통해서 아우슈비츠를 방불(彷彿)케 하는 북한수용소의 문제를 부각시켜보려고 인터뷰 말미에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아우슈비츠는 50년 전에 없어졌지만 북한에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김일성(金日成)부자에 대한 비판을 했다가는 3대(代)가 다 수용소로 보내집니다. 그곳에서 살아나올 가능성은 없습니다. 아우슈비츠와 꼭 같은(이때 라빈 수상이 질문을 제지하고 나섰다. 이 70대(代)의 근엄한 할아버지는 약간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분명히 해둘 게 있습니다. 나치에 의한 유태인 학살과 일반적인 인권문제를 같은 차원에서 비교하지말아주십시오. 유태인 학살은 나치에 의해서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인종멸종정책입니다. 그러나 인권문제는 나라마다 사정이 있습니다. 우리는 중동평화협상에서 인권문제를 조건으로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팔레스타인에게 민주주의를 하라, 인권을 개선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선거를 통해서 민주화가 진행되면 인권문제가 저절로 개선되겠지요. 인권문제를 일률적으로 거론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유태인들이 당했던 살육을 일반적 인권문제의 하나로 본다든지 같은 수준으로 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된 겁니다』
  -북한수용소 문제도 인권문제가 아니라 생(生)과 사(死)의 문제입니다. 더구나 북한은 아우슈비츠의 관리방식을 모방해서 그대로 써먹고 있다는 의심을 사고 있습니다.
  『그래도 유태인 학살에는 절대로 비교하지 마세요. 절대로···』
  저의 작전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기자는 북한수용소를 설명하면 라빈 수상이 흥미를 가질 것이고 그때 준비해간 영문 자료를 건네주면서 『유태인이 앞장서서 국제사회에서 여론을 일으켜달라』고 부탁할 예정이었던 것입니다. 유태인들은 「홀로코스트」로 불려지는 나치에 의한 유태인학살이 인류역사상 유례가 없는 특수한 사건이었음을 강조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이보다 더한 고통은 없었다」는 점을 끊임없이 이 세계를 향해서 홍보함으로써 유태인과 이스라엘에 대한 원초적 죄책감을 갖도록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르완다 학살이든, 캠보디아의 킬링필드든, 김일성 부자에 의한 독재대상구역이든 감히 유태인학살과 비교되는 데 대해서 그들은 질투심마저 느끼는 것입니다.
   유태인들은 끊임없이 세계를 향해서 『우리가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당할 때 당신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고 손가락질을 합니다. 남북통일이 된 뒤 북한의 5개 수용소에서 약20만 명의 수인(囚人)들이 풀려나온다면 그들은 남한사람들을 향해서 같은 원망을 할 것입니다. 황장엽(黃長燁)씨는 기회 있을 때마다 북한정권의 가장 큰 약점이 인권문제라면서 왜 남한에서 북한 동포들의 인권문제를 거론하여 세계여론에 호소하지 않느냐고 우리를 나무라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민주투사로, 양심 있는 지식인으로서, 또 소위 진보적 지식인으로서 행세하는 사람들은 북한의 인권문제와 특히 북한판 아우슈비츠에 대해서 침묵함으로써 스스로를 위선자로 만들고 경멸을 자초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독일 교회가 유태인 학살에 침묵함으로써 도덕성과 지도력을 상실한 것처럼 말입니다. 혹자(或者)는 말할 것입니다. 우리에겐 정보가 없다고. 그것은 「우리는 유태인들이 도륙당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했다」고 말하는 독일인들과 같은 변명입니다.
  안혁(安赫), 강철환(姜哲煥), 안명철(安明哲). 수용소 생활을 경험한 이 세 인간이 물증(物)으로 존재하며 그들이 산 총30년이란 수용소의 세월이 증언(言)으로 존재합니다. 지식인의 의무는 모르는 것을 알아내는 것인데 그들은 이미 알려진 사실에 대해서도 눈과 귀를 닫으려 합니다.
  위의 세 사람들이 증언하는 북한정치수 수용소의 운영실태는 나치의 유태인수용소를 연구한 사람이 북한에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게 할 만큼 비슷합니다. 특히 수용된 사람들에 대해서 동정심이 아니라 적개심을 갖도록 하는 의식화가 그러합니다. 북한양심수 수용소를 관리하는 국가보위부 직원들 중 상당수는 6·25동란 때 전사하거나 국군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가족의 자제들이라고 합니다. 짐승처럼 생활하도록 강요되고 있는 앙상한 수용자들을 대할 때 그들은 「계급의 원수」로 보도록 세뇌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유태인들을, 「예수를 죽인 기독교의 원수들」로 보도록 훈련되었던 독일사람들처럼 이들은 수용자들을 볼 때마다 동정심이 아니라 증오심이 샘솟을 것입니다. 학살에는 반드시 「증오의 논리」에 의한 양심의 마취 현상이 따릅니다.
  월간조선(月刊朝鮮)1995년3월호에 실린 「임신者 비밀처형과 生體실험의 내막 - 회령22호 관리소 安明哲증언」제하(題下)의 기사를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치수 수용소의 경비원으로 있다가 1994년에 귀순한 안씨의 증언은 유태인학살보다도 더 처절합니다. 즉, 북한 동포가 유태인들보다 더 참혹하게 도살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유방을 칼로 도려내거나 음부에 삽자루를 박아 목까지 튀어나온 시체를 직접 보았습니다. 팔다리와 목이 떨어져 나가고 너덜너덜한 시체를 본 적도 있지요』
  『비밀처형 담당 보위원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마치 게임을 하듯이 사람을 죽인답니다. 정치수들을 세워놓고 「권총으로 왼쪽 눈을 쏘아맞추기내기」 같은 짓을 한답니다. 시끄럽게 발악하면 산 채로 땅에 파묻기도 했답니다. 구류장에서 정치수들까리 서로 때리고 물어뜯게 해서 살해한 경우도 있다더군요』
  『우(禹)군의관이란 자는 정치수들을 상대로 수술연습을 했습니다. 수술할 필요가 없는 정치수들을 불러다가 배도 가르고 맹장도 자르는 연습을 했습니다』
  『사람의 급소를 가격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를 연구한다. 고무망치로 머리를 때려 얼마나 맞아야 사람이 죽는지에 대한 실험도 한다. 3국 보위원들은 사람을 죽이는 기술이 뛰어난 인간백정이다』
  안명철씨는 정치수들을 증오하도록 교육받은 내용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죄수들은 지난 시기 동무들의 피땀을 빨아먹고 살찐 악독한 원쑤, 인민의 철천지 원쑤이고 반역자이다」
  「그들을 인간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동정을 베푸는 요원은 정치범으로 간주하겠다」
  「실수나 사고로 그들을 죽이는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겠다」
  안명철씨는 또 달달 외워야 했던 김일성(金日成)교시를 이렇게 기억했습니다.
  「계급적 원쑤들에게는 플로레타리아 독재의 맛을 톡톡히 보여주어야 한다. 종파분자들은 우리 혁명의 걸림돌이며 철저히 제거되어야 할 혁명의 대상이다. 종파주의, 계급의 원쑤들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3대(代)를 몰살해야 한다」
  북한 정치수 수용소에 수용된 20만 명은 우리의 통일과정에서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북한내의 정치변동으로 이들이 바깥으로 뛰쳐나온다면 그들은 노동당 지배층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복수를 주도할 것입니다. 이들의 존재는 통일 이후 북한 지배층에 대한 전범(戰犯)재판을 불가피하게 만들 것입니다. 이들의 존재는 또한 남한의 좌익(이들중 일부는 언론에 의하여 진보적 지식인으로 불린다)세력에 골치거리가 될 것입니다. 통일 이후 이들 정치수 출신들은 그동안 남한에서 김일성 - 김정일 세력을 옹호하고 북한의 인권문제에 침묵해온 남한의 위선적 지식인들을 단죄할 것입니다. 지옥을 경험하고 살아나온 이들이 예컨대 이런 글들을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궁금합니다.
  「북한의 인권문제를 남한의 기준으로 평가해선 안된다. 북한은 남한과 다른 발전단계에 있으므로 그나름대로의 인권과 기준이 있는데 우리식으로 재단해선 안된다」
  「북한 정치수 수용소에 대해선 안기부에서 제공한 정보 이외에 없지 않은가. 객관적 정보가 나올 때까지는 판단을 유보하겠다」
  「북한 인권문제를 들고 나와서 무슨 효과가 있나.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지 않은가」
  유태인 학살을 방관한 서구의 기독교와 지식인들, 그리고 독일의 보통 사람들이 받고 있는 비난보다도 더한 비판을 남한 사람들은 받을 것입니다. 동족의 고통을 뻔히 알고도, 또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방도가 많이 있었음에도 침묵한 남한 사람들은 무덤에서 걸어나온 해골 같은 사람들로부터 비수(匕首)와 같은 질문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갈 때 당신들은 무엇을 했나』
  남한내(內)좌익세력과 위선적 지식인들의 문제는 이들의 손으로 자연스럽게 풀릴지도 모릅니다. 일제(日帝)말기 식민통치가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 오판(誤判)한 지식인들은 순간적인 실수로 친일적(親日的) 글을 남겼다가 대대손손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분단이 영구히 계속될 줄 알고 진보로 위장된 친북(親北)활동을 계속해온 지식인들은 이 「북한의 유태인」에 의해서 사후(死後)까지 따라다닐 낙인(烙印)을 받을지 누가 압니까.
  민족통일연구원에서 펴낸 「1997년 북한인권백서」에 따르면 원래 열 군데였던 정치수 수용소는 근래 다섯 개로 줄었다고 합니다. 한만(韓滿)국경지대에 있어 위치가 탄로난 함북(咸北)온성군의 2개소와 평양에 인접하여 보안(保安)이 어려운 수용소 등 모두 다섯 군데를 폐쇄하고 5개소로 통폐합했다고 합니다. 이는 북한이 정치수 수용소 문제에 대해서 굉장히 신경을 쓰고 있음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황장엽씨의 말대로 이것이 바로 북한체제의 급소(急所)입니다. 이 급소를 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지속적인 언론보도, 유엔인권기구에 호소, 앰네스티 같은 국제인권기구에 호소, 한국정부의 지속적인 관심표명, 한국내 인권단체와 시민단체의 운동, 북한에 인도적 원조를 제공할 때마다 이 문제를 의무적으로 언급하는 것 등등. 이렇게 하여 북한수용소문제가 세계적인 잇슈가 된다면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에 대한 처우는 개선될 것입니다. 마구잡이로 죽이는 행동에도 제동이 걸릴 것입니다. 우리 정부가 공개적으로 지금 북한에서 반인류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에게는 통일이 된 이후에도 단죄를 하겠다고 선언해두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이런 경고를 전해들으면 양심수를 다루는 자들도 총칼을 휘두르기 전에 다시 한번 생각할 것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야당총재 시절에 미얀마의 민주투사 아웅산수키 여사를 탄압하고 있는 군사정권에 대한 비판적 국제여론을 일으키는 데 앞장섰습니다. 아웅산수키의 인권도 중요하지만 북한양심수의 인권은 더 중요하고 더 절박합니다.
  많은 시민단체와 종교단체는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주장하면서도 북한주민들의 인권에 대한 지원은 외면하고 있습니다. 북한정권과 주민을 구별하지 않는 인도주의는 결과적으로 「악(惡)의 정권」을 연명(延命)시킬 뿐입니다. 북한에 인권의 잣대를 들이댈 때 비로소 북한정권(가해자)과 북한주민(피해자)의 구별과 차별, 그리고 이간(離間)이 가능해집니다.
  권위주의 정권 치하(治下)에서 민주화와 인권을 외치던 사람들일수록 북한주민들의 인권문제에 대해서 냉담하다는 사실은 차라리 희극적인 현상입니다. 그러나 이해는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외치고 신봉했던 것은 민주주의라는 형식(주로 선거)이었습니다.
  민주주의의 형식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선거입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민주투사들은 선거만 이루어지면 민주주의는 자동적으로 실천되는 것이라고 착각했습니다. 민주화가 직선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되었습니다. 대통령만 직선제로 뽑는 것이 아니라 대학총장 학장도 선거로 뽑고 일부에서는 편집국장도 선거로 뽑자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학회 회장도 선거로 뽑는 바람에 바쁜 학자들이 선거운동을 하러 전국을 순회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선거만능의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미국의 대학에서는 총장도 학장도 직접 선거로 뽑지 않습니다. 재단에서 선임하든지 임명합니다. 학회 회장도 선거로 뽑지 않습니다. 호주를 선거로 뽑을 수 없는 것처럼 이 세상에는 선거로 결정할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대학총장을 선거로 뽑는다는 것은 대학이 진리를 추구하는 장소라는 것을 생각할 때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진리를 다수결로 결정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많은 조직이 선거로 해서 내부 분렬이 일어나고 생산성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정치에는 선거가 필수적이지만 학문이나 언론이나 법치나 예술에도 선거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은 민주주의와는 관계가 없는 일입니다. 미국에 갔다온 교수가 무슨 대단한 발견을 한 것처럼 『미국에는 총장을 선거로 뽑지 않더군요』하고 놀라는 것을 종종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사람의 머리에는 민주주의의 본질인 인권이나 법치라는 실질 대신에 선거라는 형식만 입력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형식은 선거이지만 그 실질은 인권입니다. 외래사상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대주의적으로 받아들일 때 형식주의로 흐르게 됩니다. 주자학(朱子學)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건실한 행동윤리로서 받아들이지 않고 형식논리로서 받아들여 교조화한 역사가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내용은 미국헌법 전문(前文)이 규정한대로 「국가 안보, 복지, 자유」입니다. 안보, 복지, 자유를 한 마디로 줄이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권리, 즉 인권입니다. 인권이라 하면 자유만 떠올리지만 자유만 가지고는 인권이 구현되지 않습니다. 안보가 무너진 상황에서, 복지가 뒷받침되지 않는 상황에서의 자유는 「거지의 자유」일 뿐입니다. 인간다운 존엄한 생활을 영위하려면 국방, 경제, 민주적 정치제도란 세 가지 요소가 갖추어져야 합니다. 안보, 복지, 자유를 구현하는 정치제도가 민주주의인 것입니다. 「민주주의 = 자유(그것도 자기편의 자유)」란 도식을 진실인 줄 믿고 투쟁해온 사람들은 자기들의 인권이 아닌 북한주민들의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정의감도 분노도 의무감도 발동되지 않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를 남에게 요구한 사람은 민주화 운동가이지 실천가란 보장은 없습니다. 주장과 실천 사이에는 절벽이 존재합니다.
  
  20세기의 학살사례 가운데 르완다 사태는 가장 큰 것은 아니지만 가장 빨리 이루어진 학살입니다. 불과 석달 만에 50만 - 80만명이 동물들처럼 도살되었습니다. 이 르완다 사태도 학살의 가장 큰 책임자는 선동적인 정치인들임을 보여줍니다. 르완다는 면적이 강원도 정도인데 인구는 약7백만 명이나 됩니다. 인구의 85%는 후투족이고 14%는 투치족입니다. 이 두 종족은 같은 언어, 종교, 역사를 공유하고 있어 단일민족으로 볼 만한 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수종족인 후투족 정부는 「투치족은 외부에서 침입해온 종족」이라고 정의(定義)내려놓고 있었습니다. 수백 년을 거슬러올라가서 투치족을 가해자라고 낙인찍어두고서 후투족이 독점하는 정권을 유지하겠다는 것이 후투족 정치인들의 계산이었습니다. 고구려 백제 지역 사람들은 삼국통일의 피해자이고 신리지역 사람들은 가해자란 식으로 정의를 내린 다음 정치적 선동을 추구하는 방식입니다.
  1990년 10월 소수종족인 투치족으로 구성된 르완다 애국전선이 우간다에 기지를 두고 르완다로 들어와 반(反)후투정부 게릴라 작전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유엔은 평화유지군을 보내고 양쪽의 협상을 유도하여 1993년8월에는 양(兩)종족이 권력을 공유하는 정부를 세운다는 데 합의했습니다. 1994년4월6일 르완다 대통령이 탄 비행기가 수도 키갈리 근방에서 격추되어 대통령이 사망했습니다. 후투족의 강경파가 투치족과의 공존에 동의한 온건한 대통령을 암살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통령의 피살을 투치족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면서 후투족 정부내의 강경파는 수도에서부터 소수파인 투치족을 섬멸할 것을 선동하기 시작했습니다. 후투족의 민병대가 앞장서 투치족뿐 아니라 온건한 후투족까지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국영방송을 통해서 학살을 부추기기 시작했습니다. 다음날 다수족인 후투족 출신의 온건파 여자수상이 군인들에게 피살되고 그녀를 보호하려던 열명의 베르기 평화유지군 병사들도 죽었습니다. 베르기 정부는 유엔 평화유지군으로 파견한 1개 대대를 철수시킴으로써 이 결정적인 시기에 유엔군을 무력화시켜버렸습니다. 4월29일 이미 학살된 투치족(族)은 20만 명을 넘어섰고 25만의 난민들이 이웃한 탄자니아로 밀려들고 있었습니다.
  이날 유엔 사무총장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는 유엔 안보리(安保理)에 군대파견을 요청했으나 부결되었습니다. 클린턴 행정부는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유엔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5월31일 클린턴 대통령은 르완다 사태를 「학살(Genocide)」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성급하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6월8일 유엔 안보리는 비로소 5천5백 명의 평화유지군을 파견하기로 결의했으나 실제로 투입되기까지는 수개 월을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7월4일 소수파 투치족으로 구성된 르완다 애국전선이 수도 키갈리를 점령,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학살선풍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습니다.
  약3개월간 계속된 학살로 투치족의 절반이 죽었습니다. 투치족이 정권을 잡은 다음에는 살육을 주도했던 쪽인 후투족 백만 명 이상이 보복을 피해 이웃한 자이레로 달아나 난민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유엔난민구호의 상당부분은 난민촌으로 피신한 후투족 살육자들에게 전해졌습니다. 1994년11월8일 유엔 안보리는 르완다의 학살주범들을 처벌할 국제전범재판소의 설치를 의결했습니다. 르완다 정부는 이 전범재판소의 규정에 사형조항이 없다는 이유로 별도의 사법절차를 진행시키겠다고 선언, 최근에는 20여 명을 공개처형했습니다.
  50만 명 이상의 생명을 앗아간 르완다 사태는 죽고 죽인 측이 그럴 만한 불가피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니란 점에서 더욱 심각합니다. 후투족과 투치족은 피부색깔, 언어, 종교, 역사가 같아 종족카드가 없으면 분간도 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현(現) 르완다 정부는 이 종족인식카드를 없애버렸습니다. 종족간의 감정은 순전히 정치적인 조작과 선동에 의해서 집단적 살의(殺意)로 변질된 것입니다. 국민들을 선동하여 어떤 집단을 증오하도록 부추기는 것은 정치인으로서는 최악의 범죄인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소위 문민정치인들이 유행시키고 있는 「내부의 적」 「기득권 세력」 「수구세력」 「반동세력」 「가진 자들」 「음해세력」 「반(反)개혁세력」이란 섬뜻한 말들은 잠재적 위험성을 가진 용어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인간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살의를 품고 살아갑니다. 다행히 전쟁이나 전쟁이나 선동같은 외부의 자극이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인자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히틀러나 김일성과 같은 선동가들이 나타나면 우리 핏속에 잠재된 살의가 폭발하여 사람을 죽일 수가 있습니다. 강도살인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지만 사상적인 살인, 정치적인 살인은 별다른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할 수 있다는 것이 학살사례연구의 결론입니다. 따라서 우리 국민들은 인간의 증오심을 부추겨서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는 선동적 정치인들에게 이용당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 선동꾼들을 선거 때 잘 가려내어서 낙선시키는 것이 비극을 막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