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2003년1월호가 어제(12월20일) 나왔다. 선거 결과를 반영하기 위하여 발매날짜를 3일 늦추었던 것이다. 盧武鉉 당선자에 대한 조선일보 신정록 기자의 기사 제목은 '노무현 300일 드라마-정면승부로 大運을 잡다'이다. 이 기사는 노무현 후보의 당선을 전제로 하고 미리 써둔 기사였다(물론 이회창 후보의 당선을 전제로 한 기사도 있었다). 이 기사를 투표일 전에 읽으면서 나는 드라마, 도박, 모험, 정면승부, 大運 같은 단어들이 떠올랐다. 이 정도의 드라마와 모험과 정면승부를 연출한 인물이면 대통령이 될 만하다는 생각이 절로 나는 기사였다. 노무현 당선자는 올해 몇 차례 자신의 모든것을 던져 운명에 맡기는 모험을 했고 모두 성공했다.
  이회창 후보는 그런 모험을 보여주지 못했다. 특히 대통령 선거 막바지에 이르러 모든 여론조사에서 큰 차이로 뒤지고 있을 때 승부를 걸었어야 했다.
  한나라당의 조직력을 총동원하여 촛불시위를 압도할 수 있는 북핵 규탄시위나 親美시위를 하든지 자신이 뒤지고 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였다면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이회창 후보가 패배한 뒤 들려오는 이야기중에는 '당연히 이길 줄 알았는데...'하는 놀라움이 많았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지지도에서는 노무현 후보한테 질 때도 당선 가능성에서는 항상 이회창 후보가 앞서 있었다. 막연히 이회창 후보가 되지 않겠느냐 하는 식으로 안도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선거기간중 여론조사 결과의 공개가 금지되어 있는 것과 맞물려 많은 이회창 지지자들이 안심하고 있다가 당하는 결과를 빚었다.
  만약 투표일 3,4일을 앞두고 이회창 후보가 솔직하게 '지금 저는 참으로 힘든 선거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도와 주시지 않으면 이길 수 없습니다. 함께 나라를 구합시다'고 호소했더라면 보수층이 화들짝 놀라서 자발적인 선거운동에 나서지 않았을까?
  자신의 허약함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도 하나의 도박이다. 이회창씨가 울먹이면서 정치은퇴를 선언하는 장면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안쓰러워했다. 그런 눈물을 선거판에서 보였다면 다시 눈물을 보이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하는 생각이 났다.
  월간조선 1월호의 노무현 드라마 기사를 읽으면서 나는 김정일과 노무현 두 사람을 대비해보았다. 남북한의 두 지도자는 서로가 가장 다른 사람이다. 한 사람은 정권을 세습받았다. 다른 사람은 맨손으로 일어나 한 사람의 의원만 데리고 경선에 도전하여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내어 대통령에 당선된 민주형 지도자이다. 공짜로 정권을 줏은 사람과 쟁취한 사람은 인격과 인간이 다르다고 봐야 한다.
  지역구 의원들은 전국구 의원들을 내심 낮추어본다. 선거라는 승부를 통하지 않고 의원뱃지를 달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서 선거에서 이긴다는 것은 왕조시대 전쟁에서 이기는 것만큼 영광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노무현 당선자는 김정일을 낮추어볼 충분한 이유가 있다.
  노무현 당선자는 민주화와 노동자의 인권 향상, 그리고 지역주의 타파를 자신의 정치 주제로 삼았던 인물이다. 김정일은 수령절대주의 강화, 동포의 인권 말살, 평양우대의 지역주의를 통치의 핵심으로 삼고 있다. 완전히 정반대의 가치관을 지닌 사람이다. 여기서 또한 노무현 후보는 김정일을 경멸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노무현 당선자는 평화를 좋아한다. '좋은 전쟁은 없고, 나쁜 평화는 없다'고 극언을 할 만큼. 김정일은 전쟁을 좋아한다. 국방위원장이란 직함, 先軍정치, 강성대국이란 구호, 핵무기 개발, 병영국가, 서해 기습 등 대남 군사도발...김정일이야말로 전쟁광이다. 여기서도 노무현 당선자는 김정일을 증오해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노무현 당선자의 임기는 5년이고 김정일의 임기는 죽을 때까지이다. 이 점에서는 김정일이 속으로 노무현 당선자를 우습게 볼지 모른다. 자신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등 다섯 대통령을 상대해온 사람이라고.
  노무현 당선자가 김정일에게 약점 잡힐 일을 했을 리도 없다. 상황이 이렇다면 남북한의 두 지도자 사이의 게임은 끝난 것이다. 민주적으로 우월한 능력의 소유자가 있는 대한민국, 국력, 특히 경제력과 민주역량이 우월한 대한민국이 한 사람의 지도하에 있는 북한을 주도적으로 끌고가지 못할 이유가 없다. 김정일은 이제 나이나 승부력에서 자신보다 더 유리한 조건을 갖춘 젊은 남측 지도자를 상대해야 하게 되었다.
  노무현 당선자는 선거중에 '북한정권의 자존심을 건드릴 위험성이 있으므로 대북지원에 대한 검증에는 반대한다'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대통령에 당선된 이상 이제는 대한민국과 국민들의 자존심을 김정일의 자존심보다 더 중하게 생각해주어야 할 것이다. 노무현 당선자는 어제 기자회견에서도 선거중 북핵문제에 대해 한 발언은 그때의 정치적 상황에서 이뤄진 것이라면서 가볍게 넘어갔다. 북한정권의 자존심 운운 발언도 그런 식으로 잊어버렸으면 한다.
  햇볕정책에 대해 많은 국민들이 실망한 것도 김대중 대통령이 자존심 없는 지도자처럼 김정일의 억지와 속임수에 끌려다녔기 때문에 자존심이 상해서였다.
  언젠가 남측의 50대 대통령과 북측의 60대 독재자가 텔레비전 토론을 한번 벌여 통일문제, 핵문제 등을 토론하면 어떨까. 그런 제의를 북측에 한번 해보면 어떨까.
  제발 노무현 당선자는 국내정치판에서 발휘했던 그런 순발력과 정면승부 자세를 김정일을 상대로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대선에서 당당히 이긴 우리의 지도자가 선거 한번 이겨본 적이 없는 김정일을 주눅이 든 모습으로 만나는 일은 이제 없어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