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씨는 한나라당 총재일 때 우익단체 사람들과 의미 있는 접촉을 거의 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피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철승씨 등 반공우익 단체 사람들과 어울리면 극우라고 욕을 먹게 된다고 이회창씨를 만류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회창의 한나라당은 재야우익과 관계가 없는 순전한 원내정당이었다. 앙상한 나무였다. 가지도 잎사귀도 무성하지 못한 정당, 동원력이 약해 의미 있는 대중시위도 꾸밀 수 없는 정당이었다. 막강한 정권을 상대로 권력의 향배를 놓고 싸우는데 대중조직이 전혀 없는 이런 정당이 집권층의 동원력에 맞설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은 이번에 현실로 나타났다.
  민주화 운동 세력은 그 어려운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도 재야, 학생들과 연계하여 아스팔트를 누볐다. 이것이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회창의 한나라당은 원내중심의 정치를 했는데 이는 언론을 매개로 하여 국민들에게 전달된다. 그 언론이 방송을 비롯하여 압도적으로 친정부적인데 과연 여기에만 의존한 정치와 선거가 제대로 될 것인가 하는 의구심도 이번에 현실로 드러났다.
  방송과 신문에 의존한 정치를 하다가 보니 폭로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 효과도 크게 보았다. 6월의 지방선거, 8월의 재보선 선거 승리는 검찰의 대통령 친인척 수사와 언론의 폭로 보도에 힘입은 바 크다. 이번 대선에서도 폭로의 효과를 과신하고 사이버와 대중운동의 효과를 가볍게 본 이회창측은 이념도, 전략도, 전술도 없는 구멍가게식의 선거운동으로 시종했다. 친여 언론 이외의 새로운 언로를 개발하지 못한 것이 이회창 패배의 한 요인이다.
   한나라당이 우파진영의 주요 인물인 정몽준 김종필에 대한 대책이 없었다는 것은 미스터리 중의 미스터리이다. 97년의 패인을 답습한 것이다. 패배의 교훈을 제대로 배우지 않으면 그 패배가 같은 모습으로 되풀이된다는 것을 실증하기 위한 실수였던가.
  한나라당의 이 모든 실수의 바탕에는 이념무장이 안되어 있다는 점이 있다. 요사이 한나라당안에선 세대 교체 이야기가 나오는 모양인데 그보다 근원적인 것은 이념정립이다. 왜 정치를 해야 하는가, 왜 김대중과 싸워왔고 왜 노무현에 반대했으며 왜 실패했고 왜 미국의 부시와 손을 잡고 김정일을 상대해야 하는지, 왜 자유통일이어야 하고, 왜 현대사를 긍정해야 하는지, 왜 북한인권 탄압 문제에 승부를 걸어야 하는지 등등에 대한 정리된 입장이 먼저 나와야지 나이만 갖고서 신선한 사람을 찾아다니겠다면 차라리 연예기획 회사를 차리는 게 빠를 것이다. 한나라당이 이번 선거의 패인을 정확히 분석하지 못한다면 허탈한 보수층의 마음을 잡지 못하고 관료적 정당으로 서서히 수명을 다하게 될 것이다.
  이회창 지지자의 상당수가 '달리 찍을 사람이 없다'는 생각으로 투표장에 갔다. '이 사람밖에는 없다'는 생각으로 지지자들을 감동시키지 못한 것은 이회창씨가 우파이념으로 무장되지 않아 이념적 정열을 지지자들에게도 심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의 감상적 지지는 곧 식지만 이념적 지지와 이념적 열정은 오래 간다. 한나라당은 이론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럴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 책을 읽고 토론을 해야 한다. 공부와 용기와 희생이 없는 공룡정당의 최후는 물거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