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 대전 때 히틀러의 독일군은 탱크와 전투기를 배합한 전격전으로 초전에 유럽을 석권했다. 기갑부대와 폭격기 편대가 연계되어 한 지점에 집중적인 화력을 투사할 수 있었다. 전선이 돌파되면 그곳으로 병력을 집중시켜 전과를 확대하는 전법을 썼다. 프랑스도 독일보다 더 많은 탱크를 갖고 있었으나 기갑부대를 편성하지 않고 탱크를 사단마다 조금씩 나눠 배치했다. 戰力의 분산인 것이다.
  프랑스는 2차 세계대전도 1차 세계대전처럼 참호전, 지구전으로 전개되리라 예상하여 서부 전선에 마지노선이라는 엄청난 지하요새를 건설했다. 막상 전쟁이 터지자 독일군은 마지노선을 돌파하지 않고 벨기에쪽으로 우회하여 프랑스 군의 후방으로 나타나 순식간에 주력을 괴멸시켰다.
  전 쟁개념이 바뀐 것이다. 히틀러가 개발한 전격전이란 새로운 상황에서 편제가 다르고 전쟁개념이 다른 프랑스 군대는 지리멸렬해버렸다. 히틀러는 자신의 새로운 전쟁 개념을 프랑스 군대에 강요했다. 기습을 했기 때문이다. 기습이란 기습자가 전쟁의 양상을 결정짓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다.
  먼저 상황을 만든다는 것은 먼저 자신의 무대를 만든다는 의미이다. 이 무대로 적을 끌어들이면 그 무대를 만든 사람의 의도대로 전쟁을 진행할 수 있다. 전쟁이든 선거이든 적이 만든 무대와 상황에는 빠져들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적의 공식에 맞추어서 선거도 전쟁도 한다는 이야기이다. 도저히 이길 수가 없는 것이다.
  상황의 개척자과 상황의 추종자는 승자와 패자를 의미한다. 2002년 대선에서 한나라당은 노무현 지지자들이 만든 상황, 즉 반미시위-수도이전 공약을 따라가다가 자신의 페이스를 잃고 말았던 것이다. 자신의 무대를 만들지 못하고 상대가 만든 무대에서 놀려고 했던 것이다.
  새로운 상황의 개발은 새로운 운명의 개척을 의미한다. 한나라당이 곤경에서 탈출하려면 지금 새로운 상황을 주도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국민들이 한나라당에 무엇을 요구할 것인지를 알아야 상황을 만들어도 만들 것이다. 국민들의 숨결과 맥박을 읽을 줄 알려면 대중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한나라당이 대선에서 패배한 이유중의 하나는 한국 사회의 중요한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나라당은 정치의 현장 감각을 다시 찾아야 한다. 그 현장은 어디인가.
  탈북자들이 떠도는 만주 벌판일 수도 있다. 동대문 시장일 수도 있다. 불이 꺼지지 않는 기업 연구소일 수도 있다. 지금 이 순간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국민들 곁으로 다가가서 그들의 고민과 염원을 들어보면 무엇인가 보일 것이다.
  그 체험이 이념과 연결되어야 앙상한 도그마가 아닌 생동하는 정치의 논리가 만들어질 것이다. 선거기간중 텔레비전에 비친 한나라당 선거 대책회의 모습을 본 한 회사원은 '꼭 지방 토호들의 모임 같았다'고 했다. 한나라당은 현장의 감각을 잊은 것이다. 그래서 낡은 정치란 공세에서 탈출하지 못했던 것이다. 현장 속으로!
  한나라당 지지자들은 한국 사회의 주류층이다. 기성세대, 보수층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이들의 나이, 돈, 경륜, 직위, 권위, 전문성을 총계하면 노무현 지지자들의 영향력보다 몇배나 될 것이다. 머리수가 중요한 대통령 선거에서는 근소한 차이로 졌지만 평상시로 돌아오면 역시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한국사회를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들 지지계층의 에너지를 어떻게 동원하느냐이다. 지금 이들이 갖고 있는 절박감과 후회와 다짐이 좋은 에너지원이다. 이 에너지를 생산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발상이 있어야 한다. 당원도 이제는 회비내고 인터넷을 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자발성 있는 한 사람의 당원이 돈으로 움직여지는 백명을 당한다. 회비도 내지 않는 사람을 당원으로 데리고 돈을 주어가면서 하는 용병식 선거는 이제 끝났다. 국민군대, 즉 애국심으로 무장한 열성 당원을 찾아내 묶고 서로 격려하면서 국가위기 때 거리로 나설 수 있는 대중기반을 만들어내는 것이 정치개혁이다. 중앙당을 없애는 식의 형식에 치중하지 말고 동원력이 강한 자발적인 열성 국민정당이 되는 방법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