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연말은 여러 가지 점에서 특별합니다. 5년만에 새 대통령을 뽑았습니다. 김정일의 핵공갈이 한반도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내년 경제에 대해서는 불안과 낙관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1987년12월말이 기억납니다. 저는 盧泰愚후보를 찍지 않았지만 그의 당선을 축하했습니다. 이제는 그를 정통성 있는 민주정부의 대통령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결심했습니다. 盧泰愚대통령은 물태우란 비아냥을 받아가면서도 막강한 권력의 행사를 자제하였고 민주화를 실천했습니다. 언론인들은 지금도 그때의 언론 자유가 가장 넓었다고 이야기합니다.
  
  1992년12월 金泳三 후보가 당선되었을 때 저는 그의 밝고 당당한 인상 그대로 그의 시대가 전개되리라고 믿었습니다. 머리는 빌리면 된다, 인사가 萬事라는 말도 그럴 듯하게 들렸습니다. 그가 한국 현대사를 부정하고 중앙청을 철거하며 전직 두 대통령을 감옥으로 보낼 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역사부정은 한국 우파의 정통을 이어받아야 할 대통령의 지지기반을 분열시켰습니다. 정치적 자해였습니다. 통치기반이 약화된 연장선상에서 외환위기가 일어났습니다.
  
  1997년12월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 그를 지지하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잘 되었다. 호남사람들도 정권을 잡아보아야지. 우리도 이제 선입견을 버리고 그가 성공하도록 밀어줘야 한다'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소위 북풍사건이란 것을 일으켜 가지고 권영해 안기부장 등을 감옥에 집어넣는 일이었습니다. 취임축하가 정치보복적 수사였습니다. 만약 김대중 대통령이 왜 실패했느냐고 저에게 묻는다면 이 북풍 사건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겠습니다. 낙선한 이회창 후보를 겨냥한 이런 수사가 여야 관계를 삭막하게 만들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친인척 비리에 대한 언론과 야당과 검찰의 집요한 추궁이 있었습니다. 因果應報였습니다.
  
  2002년 12월 말, 이제 우리는 치열한 대선전을 뒤로 하고 새로운 대통령과 새로운 시대를 맞는 설렘과 불안을 느끼고 있습니다. 미래의 한국은 백지 상태로 노무현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5년 전처럼 노무현 반대자들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제발 노무현 당선자가 잘해주었으면 좋겠다. 변호사 출신이니까 경우에 크게 어긋나는 행동은 하지 않을꺼야. 당선 인사나 그 뒤의 기자회견 때 한 말은 사려가 깊고 신중해져서 안심이 되더라. 노무현 대통령이 잘 하면 우리가 이회창 후보를 찍은 걸 후회하겠지, 뭐.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어'
  노무현 당선자에게 바라는 이회창 지지자들의 희망은 세 가지로 요약될 것 같습니다.
  1. 뒷통수 치는 보복수사나 뒷조사를 안했으면.
  2. 김정일을 당당하게 대해주었으면.
  3. 홍위병을 만들지 않았으면.
  저는 설사 배신을 당하더라도 인간을 믿는 쪽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불신의 예측이 적중하기를 바라는 것보다는 신뢰의 예측이 빗나가더라도 그때까지 희망을 걸어보는 것은 손해볼 일이 아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