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처음으로 외손녀를 보았습니다. 두 딸을 키울 때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환희를 알았습니다. 父女, 母子 관계와 할아버지 - 손자 손녀 관계는 이처럼 다르구나 하는 것도 알았습니다. 두 딸을 키울 때는 저와 아내가 모두 직장에 나가고 낮엔 아이를 어머니나 장모에게 맡겨두었습니다. 저는 사회부 기자를 하면서 자정 무렵에 집에 들어왔다가 새벽에 경찰서로 나가니 깨어 있는 아이를 본 적도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 부담감에서 해방된 입장에서, 친구 사이로 외손녀를 보고 같이 놀아주고 하니 귀여운 면만 보이는 모양입니다. 아버지가 딸을 보는 것보다는 할아버지가 외손녀를 보는 것이 보다 객관적인 시각일 것입니다. 이해관계가 그렇게 깊게 개재되어 있지 않으니까요.
  갓 할머니가 된 분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말이 있습니다. '오면 이 갈리고 가면 섭섭하다'. 손자 손녀를 돌본다는 것이 대단한 육체노동이지만 오직 사랑 하나로써 그 노동을 즐거움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인간사의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하나 새롭게 느낀 점이 있습니다. 인간이 핏덩이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른으로 성장하기까지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정성과 관심과 사랑이 들어가는가 하는 놀라움이었습니다. 외손녀가 기어다니기 시작하니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침대에서 떨어질까, 쇠붙이라고 삼킬까, 전선 소키트에 손가락을 집어넣지는 않을까, 감기라도 들지 않을까.
  
  지난 늦가을에 외손녀가 목감기에 걸렸다가 기관지염으로 악화되어 입원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린이 병동에 처음 가 보았는데 어린이 환자 한 명당 2-3명의 어른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우리 아이도 링거 병을 팔목에 꼽고 쉴 새 없이 설치며 노는데 이걸 감시하고 말리느라고 온 가족이 병원으로 출동하였습니다.
  
  인간이 어른이 된 다음 이웃에, 사회에, 국가에, 인류에 그 사랑을 되돌리는 것은 선행도 아니고 의무도 아니고 숨쉬고 물마시는 것 같이 인간의 본능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除夜의 날에 조선일보 건물의 시멘트 벽을 향하여 그 아까운 계란 수백 개를 던지는 젊은이들도 수많은 가족과 이웃의 사랑속에서 그 나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들의 가슴에 누가 그런 증오심을 심었는지, 아니면 왜곡된 영웅심리를 불어넣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누가 이들을 속였는지 참 궁금합니다.
  
  사랑받은 것을 이 세상에서 돌려주지 못하고 죽는 인간만큼 헛된 인생도 없겠지만 받은 사랑을 증오로 변질시키 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떠나는 인간은 얼마나 불쌍합니까. 주변을 둘러봅시다.